지난 세기의 선생님들을 추억하면

폭력과 불합리가 가득했던 공간에서

by 스멀스멀

90년대 초반 학교에 입학해 세기말과 신세기를 겪는 학창 시절을 보냈다. 지금의 학교를 다녀보지 못했으니 얼마나 다른지 모르겠지만 가끔 뉴스에 나오는 경우를 제외하곤 육체적 체벌은 교육현장에서 많이 사라지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나보다 앞서 학창 시절을 보낸 이들은 더했겠다 싶지만 그 또한 내가 알 길은 없다. 국민학교 2학년 때 나는 서울 변두리의 큰 학교에 다녔다. 전교생이 수천 명은 족히 되는데 학급당 5, 60명씩 배정해도 오전, 오후반을 나눠 다녀야 하는 학교였다. 굉장히 좋은 선생님을 만나 좋은 추억을 많이 쌓았을게 분명한데 저학년 때를 돌이켜보면 강렬한 기억은 딱 하나만 있다. 돌바닥으로 된 1층 복도를 친구들과 내달리는데 교감 선생님이 내 뒷목(인지 머리인지)을 때렸던 기억이다. 그냥 때린 정도가 아니라 강력한 스윙이라 내달리던 내가 바닥으로 매다 꽂힌 정도의 충격이었다. 나는 9살이었고 맞은 이유는 복도에서 뛰었기 때문이었다.


building-ceiling-classroom-373488.jpg 거 어릴 땐 달리며 크는 거 아닙니까


3학년 1학기 초반 우리 가족은 신도시로 이사했다. 입주한 아파트 근처의 학교는 아직 공사 중이어서 걸어서 30분 정도 거리의 옛 동네 학교를 잠시 다녔다. 교실과 복도 모두 마루인 이 학교는 수백 년 되었다는 멋있는 고목나무가 있는 전통 깊은 학교였다. 나처럼 서울이나 타지에서 이사 온 학생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전학생으로 들어와 분위기가 어수선하기 그지없었다. 뒷문을 나서면 좁은 비포장 도로 양쪽으로 판잣집에서 아이들을 유혹하는 불량식품과 조잡한 장난감을 팔았는데 쉬는 시간마다 발 디딜 틈이 없이 붐볐다. 나에겐 신세계를 만난 듯 신기했던 광경인데 아이들은 수업 중에도 불량식품을 먹거나 장난감을 조립했고 바닥에는 쓰레기가 산처럼 쌓여 더욱 놀랐다.


담임을 맡았던 배가 불쑥 나온 남자 선생님은 수업하며 연신 바지를 올렸는데 그 폼이 우스워 아이들이 많이 흉내 내곤 했다. 이 선생에겐 XY이론이라는 게 있었다. 잘못한 학생을 중심으로 X자와 Y자 선상에 있는 아이들도 분명 무언가 잘못을 했다며 함께 때리곤 했다. 이 신박한 이론을 어수선한 교실에 적용하면 연신 아이들을 불러내 때리느라 수업이 제대로 될 리 만무하다. 전학 간 교실에 채 적응하기도 전에 이런 이론으로 두드려 맞느라 정신을 못 차리고 있을 때 핵펀치 같은 장면을 목격했다. 아무 잘못 없이 XY이론에 걸려든 여학생이 억울함을 표했으나 먹혀들지 않자 울분에 찬 나머지 소리 지르며 달려 나가 선생님을 때리기 시작한 것이다. 당황한 선생님도 학생을 같이 때리기 시작해서 흡사 스파링 같은 광경이 되었는데 잠시 후 무승부로 끝나고는 서로 분을 삭이고 수업을 이어나갔다. 곧 새 학교로 떠나갈 전학생이 많아지자 이 학교에선 해당 학생들만 모아 낡은 창고를 청소해 교실로 쓰게 했고 이내 새 담임과 함께 심신의 안정이 찾아왔다. 그러나 새 학교로 갈 때 왜인지 XY 선생님도 그 학교로 발령나 같은 학년을 가르쳤다. 돌이켜보면 어머님들과 학생들이 창고를 청소하고 새 학교에 며칠이나 나가 왁스칠과 입주청소를 한 것도 지난 세기니까 가능했던 장면이다.


타지에서 온 전학생들로 이루어진 새 학교에서 보낸 고학년 기간은 꽤 평화로웠다. 지금의 나를 만드는데 큰 몫을 하신 초임의 여자 선생님에 대한 추억이 많다. 일체의 체벌을 하지 않으려 애쓰시며 시스템의 반대와 맞서 싸우며 학생들을 데리고 이리저리 견학이며 여행이며 다니셨다. 교육관을 관철시키고 바르게 키우고자 고독한 싸움을 하시는 선생님과 보냈던 1년 반의 기간이 아직까지도 나에게 좋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 공놀이 하다 망가트린 선생님 차의 사이드미러 문제로 전 학년 남학생을 운동장에 머리 박게 만들고 누군가 자백할 때까지 윽박지르던 얼굴들이 기억난다. 하루는 반 친구가 장난치다 놓친 우산이 창밖으로 날아가 아래 있던 차가 망가졌는데 이때도 고층의 남학생 모두를 불러내 몇십 분이고 벌을 주며 피의자를 색출하는 작업을 벌였다. 왜인지 똘똘 뭉쳐 그 친구를 보호하던 나를 포함한 몇에게는 결국 야구배트와 당구채가 다가왔다. 아주 세고 빠르게, 많이. 운동장의 돌을 고르기 위해 한 줄로 쪼그려 앉아 운동장을 훑으며 정해진 개수 이상 돌멩이를 주워야 했고 양동이를 든 반장이 실적을 관리해서 주울 돌이 없으면 만들어 내기라도 해야 했던 시절의 학교니 그럴 만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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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구채는 당구공을, 야구배트는 야구공을 치는데 씁시다


초등학교와 담장을 나란히 한 중학교에선 방송반 활동도 하며 선생님들과 꽤 친하게 지냈다. 아이들과도 두루 잘 지내고 선생님들 대부분도 친했으니 나름 인싸였다. 인싸는 곧 적폐였던 나라의 청소년이었으니 꽤 여러 상황에서 체벌을 피하거나 방송반 일을 핑계로 수업을 빠지기도 여러 번 했다. 덕분에 같이 장난치다 걸린 친구들도 프리패스로 넘어가던 때도 많아서 친구들도 좋아했다. 어릴 적부터 해온 덕질로 컴퓨터도 곧잘 다루고 자잘한 재주가 있던 터라 여러 선생님들의 대소사를 도우러 교무실에도 많이 불려 갔었다. 만년도장에 잉크 넣는 일부터 컴퓨터나 복사기 같은 장비를 수리하기도 했다. 분명 그 보직으로 와있는 공익이 있었는데 그 양반은 주로 수위 아저씨와 함께 몸을 쓰느라 제 일을 할 시간이 없었다.


새로 부임한 교장 선생님은 유명한 스타였다.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최연소 교장인지 뭔지로 불렸는데 마흔 정도에 교장으로 왔던 걸로 기억된다. 매주 월요일 아침은 교장 선생님의 훈화 말씀을 주로 하는 주간 조례가 있었다. 대부분 운동장에서 이루어지고 가끔 교실에서 방송으로 진행되는데 이러나저러나 방송반의 가장 큰 일이자 존재 이유다. 대부분의 교장 선생님 말씀이 다 그러하겠지만 학생들에게 뼈가 되고 살이 되는 얘기는 별로 없는데 시간은 굉장히 오래 걸렸다. 식순은 줄 세우는 게 반, 부동자세로 지루한 이야기를 듣는 게 반. 이 교장의 레퍼토리 8할은 돈이었는데 근검절약부터 본인이 얼마의 예산을 따왔는지 까지 스펙트럼은 넓었고 대부분 학생이 알 필요 없는 내용이었다. 조례가 너무 길어지면 반항심 강한 인싸였던 나와 방송반 친구들은 가끔 기계 전원을 내려버리고 끊어진 퓨즈를 꽂아 기계 탓을 하곤 했다. 방송이 끊기는 순간 얼굴이 새까매 블랙 조라 불리던 학주가 '야이 씨발 방송반!' 하고 창밖에서 소리치곤 달려올라와 맨손으로 우리를 두들기긴 했지만 그래도 몇 년간 계속 끊었다. '이거 하나 하라고 뽑아놓은 새끼들인데 이걸 못해!' 하며 온갖 육두문자와 사랑이 가득한 주먹질과 싸대기를 받아낼 때면 좀 서럽기도 했지만 영웅심리였는지 멈추지 않고 소심한 반항을 이어갔다.


중학시절 가장 큰 추억은 반나절은 걸렸던 교장과의 면담이다. 당시 학교는 증축 공사 중이었는데 체육시간을 마치고 현관에서 신발을 갈아 신던 내 옆으로 벽돌이 떨어졌다. 신발 때문에 수그리고 있었는데 머리에 스치듯 떨어졌으니 죽을뻔한 경험이었다. 곧장 담임 선생님께 알렸고 초임의 그녀가 상급자에게 안전 조치를 건의했으나 보통 그러하듯 묵살되고 변함없이 공사는 진행됐다. 벽돌을 실어 올리는데 남학생들을 투입하던 때이니 당연한 일이었는데 문제는 내가 참지 않고 지방 교육청에 민원을 제기한 것이다. 당당히 소속과 이름을 적어 상황을 알리고 시정을 요구하고 다음날 학교에 갔더니 1교시도 되기 전에 교무주임이 나를 찾으러 교실로 왔다. 평소 나를 아끼던 그는 왜 그런 큰일을 벌였냐며 먼저 선생님께 얘기하지 그랬느냐 채근했다. 그렇게 했으나 묵살되어 민원을 제기했다 하니 교장 선생님께 잘 말해뒀으니 크게 혼나진 않을 거라며 교장실에서 얌전하게 행동하라고 조언했다.


교장실에 들어서니 초등학교 동창이자 친한 친구였던 여학생도 있었다. 듣자 하니 그녀는 한 체육교사의 여러 학생을 대상으로 한 성희롱과 성추행 문제로 민원을 제기했는데 공교롭게도 나와 같으 날이었던 것이다. 면담을 빙자한 자리에서 교장선생님은 그 어떠한 논리나 근거도 없이 모든 일을 없던 일로 만들려 했다. 어린 학생들이니 구슬리면 되리라 생각했는지 한참 동안 헛소리를 늘어놓으며 다과를 권했다. 왜인지 입도 대기 싫어 몇 시간 동안 입이 마르는데도 한 모금도 마시지 않았다. 긴 설득이 소용이 없자 그는 협박으로 전략을 바꿨다. 학교 이름에 먹칠을 한 죄로 무슨 일이 있어도 퇴학을 시키고 어느 학교에서도 받아주지 않도록 만들겠다 했다. 그 또한 통하지 않자 돌아버린 그는 도끼로 대가리를 찍어 죽여버리겠다며 소리 질렀다. 결국 결론 없이 면담이 끝나고 집에 가 부모님께 소식을 알렸다. 개입을 원하는지 물으시기에 내 선에서 하겠다 말씀드렸고 부모님께서도 개입하지 않으셨는데 학부모회의, 교직원회의 등을 거쳐 무사히 학교를 다닐 수 있었다. 단, 그다음 조회 때 '익명'과 '허위'로 학교 이름에 먹칠한 두 명이 있다며 헛소리를 해대 고선 '실명'으로 학교를 칭찬한 학생도 있으니 본받을만하다기에 나는 방송 기계 전원을 다시 한번 내리고 블랙조를 만났다.


7시 20분에 등교에 24시에 하교했던 고등학교에선 크게 즐거웠던 기억이 없다. 저런 일정을 소화하면서 즐겁기 힘들기도 하겠지만 교우 관계가 썩 좋지 않았다. 그래도 사제관계보다는 나았던 게 나의 담임 선생님은 모든 것을 등수로 나누는 사람이었다. 반에서 10등 이내의 학생은 야자 때 잠들면 쓰다듬을 받았지만 11등부터는 주먹질과 싸대기, 육두문자를 받았다. 매달 진행된 진로상담이 최악이었는데 나는 결국 쌓인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하고 연말에 학교를 뛰쳐나왔다. 이듬해 담임이 촌지 때문에 징계를 받았다는 소식과 야자를 빠지고 광화문에 가서 봤던 2002년 월드컵 거리응원만이 기억에 남은 1년이었다.


안 좋은 기억들만 적다 보니 굉장히 암울한 학창 시절 같지만 사실 좋은 선생님들을 더 많이 만났다. 때가 되면 산으로 들로 다니며 세상을 보여주신 선생님이 계셨다. 초등학생 때 강촌, 삼척으로 여행을 갔고 중학생 땐 스키장을 가기도 하고 소풍을 가기도 했다. 오락실에서 애들을 끌어내 때리기보단 친구처럼 같이 게임하러 갔던 선생님들도 기억난다. 학교 행사로 집에 가지 못하고 방송반 일을 하다 보면 꼭 맛있는 밥을 챙겨주시던 생물 선생님과 체육 선생님도 생각난다. 교장실 면담이 끝날 때까지 퇴근하지 않고 기다리며 걱정해주신 분들과 교직원 회의에서 미움 살게 뻔한데 맞서 주신 분들이 계셨다. 자퇴를 통보하고 투명인간 취급하던 선생님도 있었지만 반대로 매일같이 찾아주시던 선생님들도 계셨다.


세기가 변하고 시간이 흘러 요즘 학교 현장은 사뭇 달라 보인다. 그런데 뉴스를 보면 여전히 폭력과 부조리, 불합리가 이어지고 문제를 적극 해결하기보다 묻어두고 넘어가려는 몸짓들이 보인다. 비단 학교만의 문제가 아니지만 다른 곳은 몰라도 우선 학교부터 변해야 하지 않을까. 주먹질과 뺨따귀, 더러운 손길은 지난 세기의 추억 속에서도 이미 충분하지 않았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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