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사람들은 덕후여야 한다
살면서 처음으로 스스로가 덕후임을 인지 한 건 고등학생 때다. 일반적인 방식과는 조금 별나게 키워주신 부모님 덕에 좋아하는 것들을 온전히 좋아할 수 있었다. 많은 어린이들이 그러하듯 자라면서 좋아하는 것은 조금씩 달라졌고 금전적으로 많이 지원해주시진 않았지만 내가 좋아하는 것을 즐기도록 그냥 두셨다. 좋아하는 것을 보통의 친구들보다 깊이 파고 즐겼지만 오래가지 못하는 성격에 참 많이도 바뀌었다.
스스로 덕후임을 인지할 즈음 한참 빠져있던 건 음악, 컴퓨터, 사진, 미드였다. 고등학교 1학년을 마치며 자퇴하고 홀로 호주 아들레이드에서 11, 12학년 과정을 밟았다. 귀에 이어폰을 꽂지 않는 날이 없어 왼쪽 귀에는 소음성 난청이 생겼고 본체에 쿨한 파란색 네온사인이 들어오는 컴퓨터를 조립해서 호주로 들고 갈 정도로 컴퓨터가 소중했다. 인터넷 환경이 한국처럼 좋지 않아 54Kbps 다이얼업 모뎀을 쓰던 2003년의 호주에서 홈스테이 브라더와 함께 컴퓨터를 싸들고 주야장천 랜파티를 찾아가 밤을 새우며 놀았다. 니콘에서 나온 쿨픽스 똑딱이 디카를 갖고 매일 사진 찍기 바빴고 홈페이지를 직접 만들어 올리곤 했다. 미드 24 첫 시즌 24개 에피소드를 밤새며 스트레이트로 보며 미드에 입덕 해 중국인 친구들이 수백 장씩 갖고 오는 DVD를 보느라 시간이 부족했다. 이때 내가 덕후임을 알게 되었다. 그 이후 15년 가까이 흐른 지금까지도 나는 덕후로 살고 있다. 나는 모든 사람들은 덕후여야 하고 좋아하는 것에 덕질을 할 만큼의 즐거움 하나씩은 있어야 건강한 사람이 아닐까 생각한다.
내가 태어나 첫 번째로 꽂혔던 것은 무엇일까. 당연히 모든 아기들이 그러하듯 엄마, 아빠를 비롯한 가족과 주변 환경이겠다. 프로이트 발달단계의 리비도 같은 얘기를 빼면 아마도 내가 처음으로 꽂혔던 건 자동차다. 아버지 직업의 특성상 오너드라이버라는 말도 생소하던 때에 회사 차를 운전하셨다. 다른 집엔 없는 특이한 물건이라 그랬는지 태어날 때부터 타서 그랬는지 나는 말을 하지 못할 때도 차에 대한 애착이 컸다고 한다. 엄마, 아빠라는 단어 다음에 거의 가장 먼저 뱉은 말이자 집착했던 대상이 '차' 였다고. 이때부터 시작된 차 덕질은 장난감을 갖고 놀 때는 미니카 사랑으로 이어졌다. 여느 남자아이들이 다들 가져봤을 자동차 장난감이나 작고 조악한 다이캐스트들을 참 좋아했다. 전자공학을 전공하고 엔지니어로 일하셨던 아버지는 나에게 공구 같은걸 들려주시기도 하셨는데 자동차 장난감도 포클레인, 덤프트럭, 쓰레기차 등을 쥐어주셨다. 그리고 나는 그것들에 꽤나 빠져들었다. 국민학교 3학년 초반까지 살았던 신월동의 한 작은 아파트에서 쓰레기차 아저씨들(환경미화원)이 쓰레기를 수거하는 모습을 내려다보는 게 미취학 아동이던 나에겐 큰 즐거움이었다. 급기야 "엄마, 저는 커서 쓰레기차 운전수가 될 거예요."라고 얘기해 어머니께서 속상하셨다고. 보통 그런 때에는 대통령, 과학자, 경찰 같은 클리셰가 있지 않은가.
아버지께서 차량 보닛을 열고 소모품이라도 만지실 때면 항상 붙어 구경을 했고 아버지는 내게 많은 설명을 해주셨다. 혼자 종이에 그림을 그리고 놀 때면 일반적인 자동차부터 소방차나 중장비 따위를 그리곤 했고 도로 그리기를 좋아했다. 교차로의 평면도를 그리거나 건물의 진입로, 주차장 따위를 참 많이 그렸다. 국민학교가 초등학교로 바뀌었을 즈음에는 건전지가 들어가고 트랙에서 경주할 수 있는 미니카가 대유행하던 때였다. 용돈이 많지 않아 최고의 차량을 갖지는 못했지만 정말이지 진지하게 조립하고 튜닝하고 연구했던 때다. 그리고 다른 아이들이 그 정도의 흥미에 그칠 때 나의 덕력은 나를 다음 단계로 이끌어 실제 엔진이 달린 RC카를 갖기에 이른다. 용돈이 많지 않고 친척은 많으나 세뱃돈도 박한 집안이라 덕질을 위해서 열심히 전단지와 명함을 돌렸다.
표지 이름 칸에 '__국민학교'라고 적힌 공책이 문방구에서 더 이상 보이지 않던 땐 굉장히 다양한 흥미와 취미가 생겼고 덕력이 폭발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RC카를 끝으로 내가 자동차를 직접 소유하는 덕질은 멈췄다. 덕후의 덕질은 끝나는 게 아니라 더 많은 것에 입덕 하는 거라고 나는 다음 단계의 탈것인 비행기에 꽂혔다. 매달 <월간항공> 잡지를 사모으고 일산에 사는 초등학생이 성남비행장에서 열리는 에어쇼를 찾아가는 레벨업 된 덕후가 되었다.
30대의 덕후가 된 지금의 나는 아직도 자동차 덕후일까. 지금도 자동차를 좋아하고 네이버 모바일 첫 화면의 '연예'나 '스포츠' 섹션은 애써 없애도 '자동차' 섹션은 앞에 둔다. 길을 걷거나 운전할 때 테일 라이트만 봐도 시판되는 대부분의 차량 메이커와 모델, 세대를 구분할 수 있다. 지금 왕성하게 덕질 하는 활화산 같은 차 덕후는 아닐지라도 머릿속 어디 한 구석에는 확실히 '자동차'라고 이름 붙은 방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당신은 말을 갓 배우던 영아 때부터 꽂혀서 덕질 하던 게 무엇인지, 그리고 여전히 그것을 좋아하는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