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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멀스멀 Jul 15. 2018

내 생애 두 번째 덕질 '컴퓨터, 게임'

덕질은 다 쓸데가 있다

 두 번째 덕질은 컴퓨터라기보다는 컴퓨팅에 가깝다. 컴퓨터 자체를 좋아하기도 했지만 내 주변 세대의 대다수와 비슷하게 컴퓨터 덕후였다고 하기는 그렇고 컴퓨팅 덕후였다. 이 역시 아버지 영향이 적지 않은데 직업적 필요와 개인적 욕구로 미취학 아동이던 시절에도 컴퓨터가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퍼스널 컴퓨터는 물론 자가용도 들이지 않던 때에 우리 집에는 컴퓨터가 있었다. XT, AT로 대변되는 5.25인치 디스켓 수백 장과 함께하던 그때. 체계적으로 배우며 시작하지 않았지만 빠르게 빠져드는 데는 게임만 한 게 없다. 밖에 나가 달리고 놀이터에서 노는 여느 아이들과 다를 바 없는 놀이를 하고 집에 오면 컴퓨터를 할 수 있었다. 대표적으로 기억나는 게임은 로드러너와 팩맨.

로드러너와 팩맨

 아마도 이런 게임들 덕분에 컴퓨터에 빠르게 정을 붙이고 사용법도 빠르게 익혔으리라. 윈도 기본 게임인 지뢰 찾기가 마우스라는 입력장치를 숙달시키기 위함이었으니까. 윈도가 출시되고 보편화되기 전 도스에서 dir 따위를 입력해서 했던 컴퓨팅과 게임들. 14.4Kbps 모뎀으로 정겨운 다이얼업 소리 들으면서 접속하던 PC통신 천리안. 국민학교 1학년 때 팬티엄 컴퓨터가 나오고 친구의 집에서 심시티2000을 만난 나는 PC게임에 심각하게 몰입하기 시작했다. 바둑판처럼 된 빈 지형에 도로, 수도, 전기 등 각종 인프라를 설치하고 구획을 정비하는 도시 개발 시뮬레이션. 교육이나 복지, 행복도 등도 따지면서 도시를 번영시키는 게 목적이었다. 이 즈음부터 본격적으로 밤을 새우거나 주말이면 하루 종일 컴퓨터에 붙어있게 되었다. 시간과 노력을 들여 충성도 높게 키워나가야 하는 게임들이 성행하기 시작했다.


 일산으로 이사하고 우리 집 컴퓨터 책상에 팬티엄 컴퓨터가 들어왔을 때 기존의 486 컴퓨터는 방바닥 좌식 테이블로 밀려났다. 팬티엄 컴퓨터로는 심시티2000 같은 고사양 게임을 즐겼고 다른 가족이 사용해서 쓸 수 없을 땐 486 컴퓨터로 삼국지, 프린세스메이커 등을 플레이했다. 이때의 나는 자전거 타기를 좋아해서 내가 살던 고봉산 아래의 동네뿐 아니라 일산 신도시 전역을 돌아다니고 아파트 놀이터에서 저녁시간이 지나도록 놀곤 했었는데 잠을 줄여서라도 컴퓨터를 했다. 돌이켜보면 정말 어린 시절엔 한없이 바쁘게 놀았다.

브런치 에디터가 인식하게 무리해 키우니 깨진다

 PC통신과 월드와이드웹을 넘나들며 인터넷에 적응하기 시작하던 세기말 홈페이지 제작이 하고 싶어 나모 웹에디터 3.0으로 입문했다. 서점에서 책을 한 권 사서 메모장에 HTML 코딩을 해보다 에디터를 쓰니 신세계였다. 눈에 보이는데 관심이 가자 포토샵도 해보고 싶어 포토샵 5.0을 독학으로 열심히 배웠던 기억이 있다. PC통신 자료실의 사진을 이용해 홈페이지를 만들곤 했는데 또 다른 덕질이던 비행기에 관련된 홈페이지를 만들었었다. 사진과 함께 비행기의 제원이 나열되고 뭐 그런 뻔하고 촌스러운 홈페이지.


 초등학교 6학년 때 우리 학교가 컴퓨터 선도교육 시범교로 선정되며 선별된 몇에게 1교시엔 컴퓨터 과목을 수강하게 했는데 갖고 노는 게 컴퓨터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선정되었고 학교에서 공식적으로 덕질을 할 수 있으니 참으로 살만한 때였다. 지난 세기가 얼마나 열악했냐면 95년에 개교한 새 건물에 시범사업으로 좋은 커퓨터실을 만들었는데 장마 때 벼락 맞고 컴퓨터가 다 죽어버리는 초유의 사태도 있었다. 다른 학생들이야 별 관심도 없었지만 컴퓨터실이 놀이터였던 나에게는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나는 사건이다. 결과적으로 배운건 없지만 남은 게 있다면 강제로 시험 본 워드프로세서 3급. 듣자 하니 지금은 아예 없어진 급수라고.


 홈페이지 만드는데 심취했다고 게임에 소홀할 수 있나. 게임도 계속했는데 내가 만든 심시티 세계를 날아다니는 심콥터는 너무나 대단한 세상이어서 한동안 놓지 못했다. 나이를 먹고 게임을 그만둘 때까지 좋아하던 FPS에 입문한 것도 이때이다. 선후 순서는 기억이 안 나는데 퀘이크, 레인보우 식스, 카운터스트라이크를 했다. PC방이 전국으로 퍼져나가고 친구들은 모두 스타크래프트로 난리일 때도 나는 꾸준하게 총만 쏴댔다. 학원을 다니지 않던 중학생 시절 독서실을 끊고 부모님 몰래 매일같이 같은 건물 PC방에서 총 쏘기에 바빴다. 단골 PC방에 너무 붙어있던 나머지 사장 내외는 매일 내 밥을 챙겨주기에 이를 정도였다. 그러던 어느 날 직원이 갓 출시된 디아블로2 패키지를 갖고 왔는데 어릴 때 기억이 적은 내게 굉장히 사진처럼 남아있는 장면이다. 그 날부터 한동안 총은 쏘지 않고 네크로멘서로 시체 일으키고 마법 쏘는 매일이 시작되었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유명한 게임 타이틀 들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1년간은 덕질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고등학교는 7시 20분 등교에 밤 12시가 되어서야 하교를 시켜줬다. 도대체가 게임은 고사하고 컴퓨터를 할 시간 자체가 너무 부족했다. 그래서 이때 다른 덕질인 음악 감상에 엄청나게 심취하기 시작했다. 그것도 잠시, 담임과의 트러블 등으로 학교를 박차고 나와 자퇴한 나는 부모님과 상의 끝에 홀로 호주의 작은 도시 애들레이드로 갔다. 컴퓨터를 사랑한 나는 일 없는 주말엔 용산 전자상가를 하이에나처럼 돌아다니며 구경하곤 했는데 용산과 인터넷에서 공수한 부품들로 PC 하나를 조립해서 들고 호주로 떠났다. 본체 옆면이 투명 아크릴이었고 파란색 네온이 빛났다. 온도가 높아질 때 추가적으로 냉각팬을 작동하는 빨간 버튼을 아버지께서 달아주셨는데 이게 참 예뻤다. 호주에 도착해 짐을 풀다 홈스테이 브라더에게 인터넷 여부를 물으니 세상에 호주는 아직도 56Kbps 다이얼업 모뎀을 쓴다고. 충격에 빠졌지만 어쩌겠나 배고프면 다 먹게 되어있다고 전화선을 추가로 신청하고 다이얼업 모뎀으로 한국의 게임 동호인들과 IRC로 소통하며 뚝뚝 끊기는 카운터 스트라이크를 즐겼다.

 랜 파티라는 걸 들어본 적이 있는가? 인터넷 환경이 좋지 못한 호주에서는 주말이면 친구 집 차고에 컴퓨터를 들고 모여 소규모 랜파티를 하거나 사진처럼 수백 명이 체육관 등지에 모여서 랜파티를 한다. 멀티플레이 게임도 함께 즐기고 음악, 영상, 프로그램 등 온갖 파일도 공유한다. 보통 낮에 시작해 밤을 새우고 다음날 낮에 끝나는 1박 2일 기간 동안 진행된다. 무대에서 행사도 하고 동네 맛집들도 몰려와서 먹고 마시며 노는 끝내주게 재미있는 행사다!라고 해봤자 인터넷 천국인 우리나라에서 자라온 사람들에겐 도대체 이해가 되지 않는 파티겠지. 나는 게임을 좋아하는 덕후일 뿐 특출 나게 잘하는 사람이 아닌 줄 알았다. 이게 다 또래 그룹의 문제인데 모든 게임 챔피언은 다 한국인들이라고 게임 실력의 평균이 너무 높은 거였다. 랜 파티에서 카운터스트라이크, 메달오브아너, 퀘이크, 언리얼, 배틀필드 등으로 다시 총을 쏘기 시작했는데 몇백 명 중에서 항상 최상위권에 있었고 내 플레이를 구경하러 사람들이 몰려오기도 하는 진기한 경험을 했다.(내 컴퓨터 본체의 파란색 네온이나 빨간색 버튼도 인기였다.) 이런 이야기를 한국에 있는 친구들이나 카스 클랜 형들에게 들려주면 다들 웃느라 바빴다.


 고2 때 수강했던 미디어 디자인 수업에서 홈페이지 제작 실습이 있었다. 믿기지 않겠지만 이때 컴퓨터를 처음 만져보는 학생들도 있었다. 그렇다 보니 선생님은 컴퓨터 기초부터 홈페이지 제작까지 엄청나게 많은걸 가르쳐야 했는데 첫 수업에서 한글 입력기를 설치하고 한글 각인이 되지 않은 키보드로 한타를 치는 나를 보고선 바로 나를 내버려둬 선생님이 좋아졌다. 그다음 주부터는 나에게만 엄청 어려운 엑셀 자료나 이미지 편집 등을 시켜서 선생님이 조금 미워졌지만. 홈페이지 제작 프로젝트로 깔끔한 흰색 바탕에 BGM(Radiohead의 No Surprises라는 우울한 곡)이 흘러나오는 사이트를 만들었다. 다른 친구들은 무지개색 굴림체 글자들, GIF 이미지가 난무해 마치 보노보노가 보일 것 같은 수준이었으니 당연히 좋은 평가를 받으며 한국의 IT교육에 대한 위상을 높였다. 이렇게 덕질은 다 쓸데가 있다.


 스무 살이 되고 대학에 진학하지 않았던 나는 티끌만 한 경제력이 생기자 이를 PC방과 술집에 모두 탕진하여 지역경제 활성화에 기여하기 시작했다. 친구들과 심취했던 배틀필드는 그다지 인기 있는 타이틀이 아니라 우리끼리 사비로 구매해 단골 PC방의 지정석에서 플레이했다. 아침부터 플레이하다 밥 먹고 들어와 플레이하고 술 먹고 플레이하는 뭐 그런 사이클. PC방 사장님께선 뉴스에 나오고 싶지 않다며 때가 되면 밥을 챙겨주거나 잠을 자라고 독촉할 정도로 빠져 살았다. 박지성 선수가 맨체스터유나이티드에서 뛰던 땐 새벽에 있는 EPL 경기를 꼬박꼬박 챙겨봤는데 주로 PC방에서 볼 정도였다. 이런저런 일을 하며 지내다 스물여섯에 검정고시 준비를 했다. 지금의 짝꿍이 국사와 사회 등을 공대생 친구가 수학과 과학을 가르쳐줬다. 퇴근 후 하교한 친구를 만나 1시간쯤 배우고 2, 3시간 게임하고 2, 3시간 술 마시는 생활을 하던 어느 날 스스로 너무 한심해 게임을 끊기로 결심했다. 그게 2011년인데 지금까지 PC방 문턱은 몇 번 넘었어도 의자에 앉아본 적이 한 번도 없다. 그 이후 캔디크러쉬사가 같은 모바일 게임에서 1000레벨을 넘긴다던가 하는 기행이 몇 번 있었지만 사실상 게임 덕후로서의 나는 그렇게 끝났다.

 물론 여전히 컴퓨터 덕후다. 어릴 때처럼 용산 전자상가를 배회하거나 프로세서 모델명을 외우고 다니진 않는다. 더 이상 얼리어답터도 아니다. 그래도 덕질 해온 가닥은 어디 가지 않는다. 늦깎이 대학생 때는 해외봉사 덕후였는데 네 번째 라오스 봉사로 루앙프라방 고아원 학교에서 컴퓨터를 가르치고 국립대 컴퓨터를 수리했다. 전공자 한 명 없고 컴퓨터 본체를 한 번도 열어본 적 없는 단원들을 교육시켜 해냈으니, 위에서 말했다시피 이렇게 덕질은 다 쓸데가 있다. 주변에 무언가 파고들어가는 덕후가 있다면 응원을 보내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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