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6시 정각에 컴퓨터를 끈다. 30년 직장생활 중 가장 큰 변화가 있다면 바로 이것이다. 정시퇴근.
20대 신입사원 시절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때는 상사가 퇴근할 때까지 기다리는 불문율이었다. 7시, 8시는 기본이고 9시, 10시까지 남아있는 날도 많았다. 퇴근이 빠르면 "열정이 없다"는 소리를 들었고, 눈치가 보여서 일이 없어도 자리를 지켰다.
30대에는 더 심했다. 결혼하고 아이가 생겼지만, 회사가 우선이었다. 승진 경쟁도 치열했고, 살림살이도 빠듯했다. "가족을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밤늦게까지 일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게 정말 가족을 위한 것이었는지 의문이다.
아내는 늘 혼자였다. 아이들 재우고, 설거지하고, 빨래하고. 전화로 "오늘도 늦어"라고 하면 "그래, 조심히 와"라고 했지만, 그 목소리에 담긴 외로움을 그때는 몰랐다. 아니, 알면서도 모른 척했는지도 모른다.
40대 초반, 과장이 되고 나서도 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 바빠졌다. 부하직원들 관리에, 윗사람 눈치에, 실적 압박에. 집에는 자러 가는 것 같았다. 아침에 나갈 때 아이들은 자고 있고, 밤에 들어올 때도 아이들은 자고 있었다.
어느 날 초등학생이던 딸아이가 물었다. "아빠는 왜 주말에만 집에 와?" 그 말이 가슴에 박혔다. 나는 매일 집에 오는데, 아이에게는 주말에만 만나는 아빠였던 것이다.
변화는 40대 중반에 찾아왔다. 건강검진에서 적신호가 켜진 것이다. 고혈압, 고지혈증, 지방간. 의사는 말했다. "이러다가 큰일 납니다. 생활습관부터 바꾸세요."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때부터 조금씩 바꿔나갔다. 가장 먼저 한 것이 정시 퇴근이었다. 처음에는 눈치가 보였다. 하지만 용기를 내서 6시가 되면 일어섰다. "먼저 들어가겠습니다." 하고 인사하고 나왔다.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세상이 무너지지 않았다. 내가 없어도 회사는 돌아갔다. 오히려 시간 안에 일을 끝내려고 집중력이 높아졌다. 불필요한 회의는 줄이고, 업무 효율은 높아졌다.
집에 일찍 들어가니 또 다른 세상이 보였다. 아이들이 아직 깨어 있었다. "아빠 왔어?" 하며 반겨주는 아이들의 얼굴. 그동안 내가 놓친 것이 얼마나 많았는지 깨달았다.
아내와 저녁을 함께 먹으며 대화를 나눴다. 처음에는 어색했다. 평일 저녁에 함께 있는 게 오랜만이라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하지만 점점 자연스러워졌다. 오늘 있었던 일, 아이들 이야기, 뉴스 이야기까지.
저녁 식사 후에는 산책도 하게 되었다. 동네 한 바퀴를 걸으면 아내와 이야기를 나눈다. 결혼 25년 만에 처음 제대로 하는 대화 같았다. "당신, 요즘 달라졌어. 좋은 쪽으로" 아내의 그 말이 얼마나 기뻤는지.
건강도 좋아졌다. 일찍 퇴근해서 운동할 시간이 생겼다. 헬스장에 등록하고 일주일에 세 번씩 다닌다. 체중도 줄고, 혈압도 내려갔다. 의사도 "잘하고 계시네요"라고 칭찬했다.
무엇보다 마음이 편해졌다. 항상 쫓기듯 살았는데, 이제는 여유가 생겼다. 책도 읽고, 영화도 보고, 취미 생활도 할 수 있게 되었다. 20-30대에 "나중에 시간 나면"이라고 미뤄뒀던 것들을 하나씩 하고 있다.
50이 넘어서야 깨달았다. 일은 평생 해도 끝이 없다는 것을. 하지만 가족과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은 한정되어 있다는 것을. 부모님도 나이 드시고, 아이들도 곧 독립할 것이고, 나 자신도 늙어간다.
요즘 후배들에게 말한다. "정시에 퇴근해. 일은 내일도 있어. 하지만 오늘의 가족은 오늘만 있어." 젊은 후배들은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다. 나도 그랬으니까.
며칠 전 신입사원이 물었다. "부장님, 일찍 퇴근하시면 불안하지 않으세요?" 나는 웃으면 대답했다. "30년 전에는 불안했어. 하지만 지금은 일찍 퇴근하지 않으면 불안해. 내 인생을 놓치까 봐."
오늘도 6시에 회사를 나선다. 퇴근길 지하철은 여전히 붐빈다. 하지만 예전처럼 피곤하지 않다. 오히려 설렌다. 집에 가면 무엇을 할까, 아내와 무슨 이야기를 나눌까, 저녁에는 뭘 먹을까.
퇴근길이 이렇게 즐거울 수 있다는 것을 50이 넘어서야 알았다. 늦은 것 같지만, 아직 늦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정년까지 앞으로 몇 년 남았지만, 그 시간만큼은 제대로 살고 싶다.
일과 삶의 균형. 요즘 젊은 세대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라고 한다. 나는 그들이 부럽다. 나보다 일찍 그 가치를 알았으니까. 그리고 응원한다. 그 가치를 지키며 살아가기를.
회사 정문을 나서며 하늘을 올려다본다. 6시의 하늘은 아직 밝다. 이 시간에 하늘을 보는 것도 오랜만이다. 저 하늘 아래 나를 기다리는 가족이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