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저녁마다 아내와 산책을 한다. 결혼 25년 만의 새로운 습관이다.
처음 시작한 건 건강 때문이었다. 의사가 "매일 30분씩 걷기 운동을 하세요"라고 해서 시작했다. 혼자 걷기는 심심할 것 같아 아내에게 함께 걷자고 했다. "그래, 나도 운동 좀 해야 하는데" 하며 아내가 따라나섰다.
처음 며칠은 어색했다. 결혼한 지 25년이 넘었는데도 둘이서만 걷는 게 이렇게 낯설 줄 몰랐다.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지 몰라 그냥 걸었다. 가끔 "저기 새 건물 생겼네" "저 집은 리모델링했네" 하는 정도의 대화만 오갔다.
일주일쯤 지나자 조금 자연스러워졌다. 아내가 동네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아까 마트에서 누구 만났는데", "옆집 아들이 대학 합격했대". 나는 별로 관심 없는 이야기들이었지만, 그냥 듣고 있었다.
그런데 신기한 일이 일어났다. 아내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내가 모르던 세상이 보이기 시작했다. 내가 회사에 있는 동안 아내가 살아온 일상들. 아이들 학교 문제, 부모님 병원 모시기, 동네 사람들과의 관계. 나는 그저 돈만 벌어오면 되는 줄 알았는데, 아내는 혼자서 그 모든 것을 해결하고 있었다.
어느 날은 아내가 물었다. "당신은 요즘 어때?" 그 질문에 당황했다. 아내가 내 기분을 물어본 게 언제였던가. 아니, 내가 아내에게 내 이야기를 제대로 한 적이 있었던가.
"회사에서 새로 온 신입사원이 있는데, 나랑 나이 차이가 30년이나 나더라고. 그걸 보니까 내가 정말 늙었구나 싶더라." 별것 아니 이야기였지만, 아내는 진지하게 들어줬다. "그래도 당신은 아직 젊어 보여. 요즘 운동해서 그런가."
그날 이후로 우리는 진짜 대화를 하기 시작했다. 회사에서 있었던 일, 아이들 걱정, 부모님 건강, 노후준비. 집에서는 차마 꺼내지 못했던 진지한 이야기들을 산책하면서 자연스럽게 나눴다.
"사실 나 요즘 퇴직이 걱정돼." 내가 먼저 꺼냈다. "정년까지 몇 년 안 남았잖아. 퇴직하면 뭐 하고 살아야 할지 막막해." 아내는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나도 그게 걱정이야. 당신이 하루 종일 집에 있으면 어떻게 지내야 할지."
우리는 함께 웃었다. 그리고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눴다. 퇴직 후에 하고 싶은 것들, 여행 계획, 취미 생활. 막연하게만 생각했던 것들을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니 조금 덜 막막했다.
어느 날 아내가 말했다. "우리 결혼하고 이렇게 많이 이야기한 적이 없었던 것 같아." 맞는 말이었다. 20대에 연애할 때는 그렇게 많은 이야기를 나눴는데, 결혼하고 나서는 대화가 점점 줄어들었다. 아이들 이야기, 돈 이야기, 부모님 이야기. 실용적인 이야기만 하다가 어느새 남남처럼 지내고 있었다.
"나도 그래. 요즘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새롭게 알아가는 것 같아." 25년을 함께 살았지만, 사실 서로를 잘 몰랐다. 아니, 알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각자 바빠서, 피곤해서, 당연하게 여겨서.
산책을 시작한 지 6개월이 지났다. 이제는 저녁 7시만 되면 자연스럽게 운동복으로 갈아입는다. 아내도 준비를 하고, 우리는 함께 집을 나선다. 비가 오면 우산을 쓰고, 눈이 오면 조심조심 걸으며.
요즘은 아내의 손을 잡고 걷는다. 처음에는 쑥스러웠다. 50넘은 사람들이 손을 잡고 걷는 게 우습게 보일까 봐. 하지만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내 인생이니까.
"당신 손이 이렇게 작았어?" 손을 잡아보니 아내 손이 생각보다 작고 가늘었다. "원래 작았지. 몰랐어?" 아내가 웃으면 말했다. 25년을 함께 살았지만 손 한번 제대로 잡아본 적이 없었다.
동네 한 바퀴를 도는 데 30분 정도 걸린다. 그 30분이 참 소중하다. 회사에서의 스트레스도 풀리고, 아내와의 관계도 좋아지고, 건강도 좋아진다. 일석삼조다.
가끔 동네에서 아는 사람을 만난다. "부부 사이가 좋으시네요" 하며 부러워한다. 예전 같으면 "뭘요"라고 겸손하게 넘겼을 텐데, 요즘은 "감사합니다"라고 당당하게 대답한다. 정말 고마운 일이니까.
산책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샤워를 하고 함께 차를 마신다. 아내가 좋아하는 허브차를 한 잔씩 마시며 하루를 정리한다. "오늘도 수고했어" "당신도". 간단한 인사지만, 그 속에 25년의 세월이 담겨 있다.
결혼생활이 항상 행복하지는 않았다. 싸우기도 많이 싸웠고, 힘든 시기도 있었다. 이혼을 생각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50이 넘어서 깨달았다. 결혼은 사랑만으로 되는 게 아니라는 것을. 함께 걷고, 함께 이야기하고, 함께 늙어가는 것이라는 걸.
아내가 묻는다. "내일도 산책 갈 거지?" "당연하지. 평생 갈 거야." 그 말에 아내가 웃는다. 그 웃음이 참 예쁘다. 25년 전 처음 만났을 때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