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그곳에 언제나 있었다

여성연대

by 자치언론 파란

재주 디자인 노불


‘공론장’이란 개념은 위르겐 하버마스(Juergen Habermas)를 통해 처음 제시됐다. 그는 시민들이 모여 공적 문제를 토론하고 의견을 형성하는 곳을 공론장이라고 봤다. 이때 공론장은 국가 권력으로부터 독립된 곳이며, 시민의 의견이 사회와 정치에 영향을 미치는 민주주의적 특색이 강한 공간이다. 페미니스트 학자 낸시 프레이저(Nancy Fraser)는 하버마스의 전통적 공론장 개념을 비판했다. 서구 사회에서 19세기까지 교육 기회와 정치적 권리가 남성에게만 집중되었고, 여성은 법률과 사회적 관습에 의해 투표권 등 기본적인 시민권에서 배제된 역사가 있기 때문이다. 공론장에 여성이 참여하기가 어려운 환경에서 공적 문제를 논할 때, 여성의 의견이 얼마만큼 반영될 수 있었을지 의문이 제기된다. 즉, 프레이저는 그간의 역사에서 여성이 주로 머물러온 ‘사적 영역’을 간과한다고 비판한 것이다. 그렇다면 현대 사회의 여성들은 공론장을 어떻게 활용하고 변화시키고 있을까.


Fraser, Nancy. (2021). “Rethinking the public sphere: A contribution to the critique of actually existing democracy.” Public space reader. Routledge. 34-41.












현대의 공론장은 더 이상 구시대적 커피하우스나 신문 논평에 국한되지 않고, 소셜 미디어라는 디지털 장으로 재편되고 있다. 여성들은 엑스(구 트위터), 인스타그램 등 SNS를 통해 의견을 활발하게 표현하

며 새로운 공론장의 주역으로 부상하고 있다. 특히 엑스 같은 플랫폼은 단순히 의견 교환을 넘어, 실시간 이슈 확산과 정치적 담론의 장으로 기능하고 있다. 최근의 사례로 윤석열 대통령의 12.3 비상계엄 선포가 있다. 윤 정부는 국가 안보 상황과 사회적 위기 대응을 명목으로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정당성과 절차가 확보되지 않은 불법 비상계엄 소식을 접한 엑스 이용자들은 계엄 해제 상황에 대해 실시간으로 정보를 공유했다.


윤 대통령 탄핵안 가결 투표를 둘러싼 대국민 집회에서 2030 여성들의 선결제 문화, 응원봉 문화 또한 엑스에서 활발하게 논의됐다. 장르를 불문하고 오랜 기간 팬덤 문화가 형성되어 온 공론장이기 때문이다. 여성 유저의 팬 커뮤니티로 이용되는 소셜 미디어의 정치적 특성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여성들은 단지 ‘팬’이라는 단일한 정체성만으로 소셜 미디어를 이용하지 않는다. 그들은 ‘여성’이라는 정치적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다.


소셜 미디어에서 다시 실물의 공론장으로 돌아와 보자. 지난해 연말부터 이어진 여의도와 광화문 집회에 참여한 여성들은 민주시민의 공론장에서 존재감을 보였다. 시위에 참여한 여성들을 폄하하는 시도에 대한 경계의 목소리도 있었다. 시위 현장의 여성을 “갑자기 튀어나온 기특하고 대견한 소녀”쯤으로 치부하는 것은 역사적 발자취에서 여성을 지우는 일이란 것이다. 어디에나 존재하는 여성의 연대는 분명히 ‘갑자기 튀어나온’ 무언가가 아니다. 연대란 하루아침에 이루어질 수 없다. 소셜미디어와 집회라는 공론장에서 여성들이 보여줬던 연대는 국내 여성 연대의 중요한 사건을 다시금 짚어보게 한다. 본 글에는 여성의 정치적 연대에 앞장서 왔으며 본교에서 여성과리더십 강의를 진행하고 있는 이화영 교수와의 인터뷰도 함께했다.


이슬기. (2024). 탄핵 집회에 2030 여성이 많을 수밖에 없는 이유. 오마이뉴스.


(중략) 여성들은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로 범죄의 대상이 된다는 사실에 공통된 분노를 느꼈다. 여성들의 분노와 반응이 특별히 해당 사안을 기점으로 결집한 이유가 무엇일까? 해당 사안이 전례 없는 방식을 보여 세간의 관심과 분노를 일으킨 것일까? 이 교수는 단호하게 ‘No’라고 말했다.


이화영 교수: 2016년 강남역 살인사건과 유사한 일들이 아예 없었던 것이 아니다. 그런 종류의 사건들은 그동안 드러나지 않았을 뿐 과거에도 끊임없이 발생해 왔다. 현재 현장에 모인 여성들은 그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고 과거로부터 지속해 온 여성운동, 여성교육이 축적된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1980년대 공공영역에서 직장을 잡고 사회생활을 시작했는데, 그 당시에는 여성들이 많지 않았을뿐더러 여성이 경험한 일들은 남성과 달랐다. 이런 환경에서 조직 내 여성들과 생존하기 위해 조용히 티를 내지 않고 연대해 문제를 해결하곤 했다. 당시 한국 최초로 여성단체들이 모여 만든 ‘한국여성단체협의회’에서 첫 근무를 시작했고, 다양한 이슈를 중심으로 한 여성 연대를 경험하기도 했다. 과거의 여성 운동가들이 연대하고 조직화하고 목소리를 낸 결과가 지금까지 계속 이어지는 것이다. 지금의 여성들은 행동할 줄 안다. 그들은 ‘아젠다’를 중심으로 여성뿐만 아니라 퀴어, 노동자, 농민들과 연대하며 인권 전선에 앞장선다. 연대에서 중요한 건 ‘아젠다’, ‘포용’, ‘설득’이다. 공통된 아젠다를 중심으로 연대하고 포용하고 설득해서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을 만들고 조직화하면 연대는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하게 된다. 연대란 나와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신뢰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여성 연대 집회는 여성이 주최하고 여성이 참여하며 여성이 발언한다. 혜화역에서 벌어진 딥페이크 성착취 엄벌 촉구 시위도 서울의 6개 여대 학생들이 조직한 `여성혐오폭력 규탄 공동 행동’을 통해 주최됐다. 소셜 미디어 ‘엑스’에서는 주최 측 계정을 중심으로 집회 참여를 촉구하며 당일 참여 인원이 실시간으로 늘어나는

모습을 공유하는 미디어들이 이어졌다. 프레이저가 하버마스를 비판했던 과거와 비교했을 때, 현대의 여성들은 이제 공론장의 주체가 되어 여성 의제를 중심으로 여론을 형성하고 있다.













지난 1월엔 ‘자경단’이라는 이름으로 4년이 넘는 기간 동안 아동 및 청소년 성착취물을 제작한 성범죄 일당이 체포됐다. 243명의 피해자를 대상으로 디지털 성범죄를 저질렀다.앞서 언급했듯, 2016년 강남역 이후 2025년 서천에서 벌어진 사건처럼 n번방 사태와 딥페이크 성범죄의 가시화 이후에도 비슷한 양상의 범죄는 끊이지 않고 있다. 개인의 일탈로 치부하기엔 디지털 공간의 방장을 필두로 조직적인 성범죄가 일어나는 양상이다.


그러나 여성 연대 또한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며 정치적으로 견고해지고 있다. 과거로부터 이어진 여성 운동은 단체를 조직하고 공론화한 역사를 후대에 전승했다. 2016년 강남역 추모에 참여한 여성들은 2024년 딥페이크 성착취 엄벌 촉구 시위에 참여한다. 이제 여성들은 여성 인권이라는 아젠다뿐만 아니라 광화문과 여의도 곳곳의 범시민적 공론장에 나아가 여성 해방을 외치고 사회의 약자들과 연대하고 있다. 여성 연대는 현재도 치열한 정치적 투쟁의 길 위에 있다.


고나린. (2025). 피해자만 243명...텔레그램 성착취 범죄 조직 ‘자경단’ 검거.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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