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넓은 세상으로

by 자치언론 파란

동경 디자인 지구


언제나 더 넓은 세상으로 뛰어들기를 꿈꿔왔다. 내겐 ‘교환학생’이 그 꿈의 모습이었고, 간절히 바라왔다. 고등학생 때부터 ‘교환학생 브이로그’ 등을 찾아보며 대학생이 된 나의 모습을 상상하곤 했다. 지루한 일상에서 벗어나 낯선 곳에 떨어져, 예측할 수 없는 내일을 맞이하는 그들의 모습은 내게 새로운 세상을 꿈꾸게 했다. 지구 반대편에서 만나는 새로운 환경, 언어, 그리고 사람들. 그때부터 교환학생은 내 대학 생활의 가장 큰, 어쩌면 졸업보다 더 간절한 목표가 되었다. 교환학생을 위해 필요했던 것은 두 가지, 어학 성적과 돈이었다. 그런데 막상 가려고 하니 내겐 어학 성적도, 돈도 없었다. 심지어 학점도 좋지 못했다. 막막했다. 그렇게 교환, 교환 노래를 불러놓고는 돌아보니 준비된 건 하나도 없었다. 이러다간 정말 지원도 못 해보고 졸업하겠다는 두려움이 들기 시작했다. 많은 고민에 휩싸였던 5학기를 마치고, 나는 결국 휴학을 결심했다.











가장 큰 산을 넘어서

사실 나는 영어가 싫다. 영어는 내게 너무 어렵고도 힘든 존재다. 그러나 교환학생 지원을 위해 일정 기준 이상의 어학 자격증은 필수였다. 내가 휴학을 한 가장 큰 이유기도 하다. 학기를 병행하면서는 절대 기준을 넘을 수 없으리라는 확신이 있었기에, 몇개월간 오로지 영어에 매진하기로 마음먹었다. 문제집을 가득 채운 가방을 메고 아침 일찍 강남으로 향했다. 대형 영어학원의 내부는 내가 고등학생 때 다녔던 입시학원과 무척 비슷했다. 문 너머 들리는 강의 소리, 곳곳에 쌓인 문제집들, 산만한 백팩에 몸을 틀어 복도를 바삐 지나가는 사람들. 마치 고등학생이 된 것 같았다.



명칭만 겨우 떠오르는 영문법을 다시 공부하자니 머리가 아팠다. 하루는 스피킹 수업에서 지적을 들었다. 내가 말하는 문장의 문법이 엉망이며, 이렇게 하다간 큰일 난다고 했다. 영어 공부와 담을 쌓아둔 내 과거를 들킨 것 같아 부끄러웠다. 다른 사람들은 술술 잘만 뱉어내는 영어 문장이 왜 내 입에서만 턱턱 막히는지 그저 답답할 뿐이었다. 그래도 열심히 다녔다. 선생님들이 주시는 자료를 매일 풀고 읽었다. 수업을 빠지지 않으면, 숙제를 열심히 하면 점수가 오르는 줄 알았다. 그래서였을까, 내 점수는 기대와는 달랐다. 기본기가 부족한 내겐 남들보다 더 많은 노력이 필요했지만, 애써 무시하고 있던 탓이었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내신의 발목을 잡았던 영어에게 대학에 와서까지도 시달리다니. 머리로는 해야지, 해야지 하면서도 내 손은 어느새 펜을 내려놓고 있었다. 시험 직전까지도 내 모의 테스트 결과는 기대만큼 나오지 못했다. 조금 웃길지 모르지만, 그 때문에 밤잠을 설쳤다. 성적이 잘 나오지 않아서, 정말 교환학생을 가지 못할까 봐.




산 넘어 또 산

밟는 곳마다 흰 눈이 소복이 쌓여있던 어느 날, 시험을 쳤다. 인생의 모든 시험이 그렇듯, ‘더 잘할 수 있었는데’ 하는 후회가 계속 남았다. 결과가 나오기까지 아이엘츠 홈페이지를 수십 번 들락거렸다. 볼품없는 학점을 가진 나로서는 높은 어학성적이 간절하게 필요했다. 4일 정도 지났을까. 친구들과 푸켓 여행을 가기 위해 공항에 도착해 있던 날, 성적을 확인할 수 있었다. ‘6.0’. 내가 받은 점수였다. 아이엘츠는 9점 만점이다. 교환학생 지원을 위한 기준 점수인 5.5는 넘었지만, 대부분 6.5, 높은 경우는 7.5까지도 받는 경우를 생각하면 내 점수는 턱없이 낮았다. 안그래도 낮은 학점 탓에 그나마 어학성적으로 보완해야 했던 나는 쓸쓸히 휴대폰 화면을 덮었다. 며칠 내내 재시험에 대해 생각했다. 네 과목 전체 응시료가 30만원 가까이하는 반면, 한 과목만 재응시할 수 있는 시험의 가격은 19만원으로 꽤 부담되는 편이었다. 이미 학원비로 돈을 많이 쓴 상황에서

고민은 계속되었고, 결국 나는 재시험을 선택했다. 그러나 2주 뒤 본 재시험의 결과는 그대로 ‘6.0’. 내 19만원이 허공으로 사라졌다.


한치 앞도 예상할 수 없는


낮은 학점, 낮은 어학 점수. 원하는 교환교를 고르기는 커녕, 어디도 합격하지 못할 것 같은 두려움에 휩싸인 채 지원 자소서를 쓰기 시작했다. 당시 거의 포기한 채로 해외로 나갈 수 있는 ‘어학연수’, ‘방문학생’ 등 다른 방법을 찾아보기도 했다. 지원 기간동안 최선을 다하고 있음에도 힘이 죽죽 빠지는 심란한 경험을 했다. 학

점을 좀 더 잘 받을걸, 영어강의 좀 들어놓을걸, 아이엘츠 공부 더 열심히 할걸. 새벽마다 내 방은 후회와 걱정으로 가득 채워졌다. 교내 커뮤니티에 교환학생 결과가 떴다는 글을 보자마자 심장이 차갑게 식는 기분이었다. 설렘은커녕, 이미 불합격을 받아들일 준비를 한 채 결과 창에 접속했다. 포털에 접속한 후 화면을 몇 번 넘기자 보인 것은 ‘합격’. 놀라움이 기쁨을 압도했다. 믿기지 않아서 새로고침을 수차례 하고, ‘합격’ 두 글자를 몇 번이고 다시 읽었다. 혹시나 글자 앞에 ‘불’이 붙어있는 건 아닌지 수없이 확인했다. 그러곤 바로 엄마아빠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아빠. 나 교환학생 됐어.”


사실은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 자소서를 잘 써서일까? 아니면 정말 운이 좋아서? 오지 않을 것만 같았던 순간이 왔을 땐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하는지 아직도 모르겠다. 그래도 영어때문에 밤낮으로 머리를 싸매던 지난날들을 생각하면, 그저 수고했다고 말해주고 싶다.


또 다른 나와 만나

합격으로써 교환학생의 첫 단추를 끼운 내게 남은 미션은 딱 하나, 돈이었다. 프랜차이즈 음식점 알바만 2년 넘게 했던 나는 늘 새로운 일을 해보고 싶었다. 그중 하나였던 ‘테마파크 알바’. 자취방에서 그나마 가까운 L 테마파크에 지원했다. 감사하게도 합격 문자를 받아 첫 교육을 가던 날이었다. 어떤 이유에선지 다인원으로 진행된다고 들었던 교육장엔 나 포함 2명밖에 앉아있지 않았다. 이상한 낌새가 들 무렵 담당자가 건넨 명찰을 받았고, 내 이름 위에 새겨진 작은 글씨를 발견했다. ‘AQUARIUM’. 아쿠아리움? 얼마 전까지만 해도 놀이기구

앞에 서서 출발 멘트를 외치는 나를 상상했었는데. 상상과는 전혀 다른 전개가 펼쳐졌다. 그렇게 나는 아쿠아리움 캐스트가 되었다.


일은 쉬웠고, 사람은 어려웠다. 포스기를 다뤄본 경험이 있었던 덕분일까, 업무는 빠르게 익혔다. 그러나 그 속에 자연스레 파고드는 것이 어려웠다. 또래들이 모인 그곳에서, 나는 잘나 보이고 싶었던 것 같다. 어떤 일이든 빠르게 배우고, 혼자서도 잘 해내는 그런 사람으로. 나도 모르게 나를 감췄던 것 같다. 즐거운 경험을 해보자고 시작한 일인데도 정작 즐겁지 않았다.


왜 진작 알지 못했을까? 그저 ‘나’면 충분하다는 것을. 그 후 나는 조금씩 달라졌다. 모르는 것도 많고, 친구들도 필요한 진짜 내가 되었다. 같이 근무하고, 점심 저녁을 먹을 때면 같이 있기만 해도 즐거웠다. 돈이 필요해서 이곳에 왔지만, 여기가 일터인지 학교 쉬는 시간인지 헷갈리기도 했다. 간혹 일이 너무 힘들 때면 퇴사 일자를 손꼽아 기다리면서도, 같이 근무하는 캐스트들을 떠올리면 금세 아쉬워졌다. 일주일에 40시간이 넘는 시간을 함께하며, 나도 모르게 이곳에 녹아들고 있었다. 사는 곳, 나이, 학교, 관심사. 공통점 하나 없는 우리들은 아쿠아리움에서 만났다. 다채롭고도 다채로웠던 그 공간이 나는 때로 그리워진다.















이제 시작이야

정들었던 아쿠아리움을 퇴사하고, 학교 근처 자취방을 정리했다. 몇 가지 서류를 처리하니 진짜 출국 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자취방에 가득 찼었던 살림을 캐리어 두 개와 백팩 하나에 모두 담았다. 고작 이것만 들고 해외로 떠나야 한다니. 자취방을 통째로 옮기고 싶은 심정이었다.


1년 전, 교환학생을 꿈꾸며 신청했던 휴학. 어느새 그 1년이 마무리되고 있다. 시간이 너무 빠르게 지나간 것 같아 아쉽지만, 그 안을 살펴보면 어느 하나 중요하지 않은 순간이 없었다. 3개월 내내 영어와 씨름한 순간도, 마지막 기회라 생각하며 절실히 자소서를 썼던 순간도, 그리고 돈보다 더 소중한 것을 얻은 아쿠아리움 캐스트로서의 순간도. 며칠 뒤, 나는 비행기를 탄다. 교환학생이 시작되는 첫 순간이다. 이렇게 간절히 바라던 소망이 있을까? 휴학 1년을 마무리하며 생각한다. 꿈을 이루기 위해 끙끙 앓았던 과거의 나와, 앞으로 낯선 곳에서 힘겨워할 나 모두를 다독여주려고 한다. 나는 이제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갈 준비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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