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이늠을 바라보다, 2024 서울국제도서전
글 재주 디자인 별밤
『걸리버 여행기』에서 걸리버는 마지막 여행지로 ‘후이늠(Houyhnhnm)’ 나라에 도착한다. 이성이 지배하는 후이늠에선 거짓말, 교활, 오만, 전쟁이 존재하지 않는다. 반면에 이곳 지배자들이 사육하는 ‘야후’는 인간의 원초적 야만성을 지닌 추악한 존재로 등장한다. 후이늠의 지배자들과 야후라는 이항 대립적 상징은 이성과 야만이라는 인간 사회의 끊임없는 줄다리기를 보여준다.
지난 6월 26일부터 30일까지 서울 강남구 코엑스에서 개최된 2024 서울국제도서전(이하 도서전)의 주제가 바로 후이늠이었다. 주제전시에 비치된 도서들은 “이성적, 상식적으로 완벽한 ‘후이늠’의 세상을 만들면, 우리는 전쟁을 그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던졌다. 질서와 논리가 선두 주자로 달리는 현대에서 왜 전쟁 같은 삶의 모순이 여전한가를 책과 독자가 파고들어야 할 시급한 주제로 본 것이다. 독자들은 ‘완전한 이성
의 영역’에서 출발해 ‘이성의 뒷골목’을 지나 자신만의 후이늠을 상상해 보며 도서전 여정을 시작했다.
도서전은 책 판매 외에도 강연과 세미나 등 복합적 프로그램으로 이루어진 행사였다. 강연에서는 후이늠 주제 소개, 문화적 교차점, 팔레스타인 분쟁과 세계 평화, 생태적 감수성 등의 이야기가 진행됐다. 세미나에선 서로 맞물려 살아가는 톱니바퀴 사회의 구성원들이 공유하고 있는 고민이 화두였다. 특히 AI 시대 예술과 저작권, 가짜 노동 등 노동의 가치를 고민할 수 있는 지점들이 많았다. tvN 프로그램 <알쓸별잡>에서 김상욱 교수가 소개하며 많은 관심을 끈 『가짜 노동』의 저자 데니스 뇌르마르크도 세미나에 참석했다. 그는 기술이 발전했지만 노동을 줄여주지 못한 채 가짜 노동이 증가했음을 지적했다. 기계적인 이성과 합리, 기술 우월주의가 현세대의 후이늠을 이룩할 수 없을 때 어떤 가치와 대상이 소외되고 있는지 미래로 향하는 방향을 수정해 보는 시간이 됐다.
종이책의 다음 걸음
출판사들이 한데 모여 이색적인 관람 경험을 선사한 행사는 관람객의 일상에 새로움을 불어넣었다. SNS가 발달한 지금 사람들의 전시 욕구와 오락을 채워주기에도 충분했다. 다만 도서전에 대한 성원을 종이책에 대한 꾸준한 관심으로 곧바로 이해하기엔 오류가 있다. 전자책이 주류가 되는 현재, 종이책은 돌파구를 찾아야 할까? 찾는다면 어떤 것이 있을까? 인터뷰에 응해준 학우 세 명의 의견을 들어보았다.
y학우: 종이책이 전자책에 비해 집중이 잘된다고 생각해요. 종이책 자체가 갖는 물리적 실체가 디지털 전자책에 비해 몰입감이 확실하다는 느낌도 들고요. 종이책은 독서 경험에서도 훨씬 풍부한 것 같아요. 종이엔 각자의 방식대로 표식을 남길 수 있는 무궁무진한 방법들이 함께하고 북 커버나 책갈피 같은 물품까지도 포함되죠. 전자책도 흔적을 남길 순 있지만 결국 물리적 실체로 이어지진 않는단 점이 가장 큰 차이네요. 종이책의 경우엔 해당 이야기를 계속 보유하고 있단 소유감도 강한 것 같아요. 결국 물리적 실체로서 종이책이 갖는 특징을 강화하면 어떨까 싶어요.
s학우: 휴대성 때문에 전자책을 많이 이용하긴 해요. 편의성 면에서는 전자책이 확실히 월등하죠. 다만 종이책이 가진 낭만은 전자책이 대체할 수 없다고 생각해요. 요즘은 모든 것들이 디지털 속에서 구현될 수 있잖아요. 특히 콘텐츠를 향유하는 플랫폼이 즐비하다 보니 오히려 수납할 수 있는 실체가 갖는 가치가 극대화되는 면도 있어요. 종이책을 소장한다는 사실 그 자체에서 오는 가치가 높아지면서 굿즈와 닮아가고 있단 생각이 드네요. 지식을 전달하는 기능에서 종이책과 전자책은 크게 다르지 않지만, 디지털 세상에선 점차 소장품으로 서 종이책만의 가치가 높아질 것 같아요. 이젠 종이책도 과거의 지식 전달 측면에서 나아가 굿즈처럼 친화적인 접근 속에 이해하면 어떨까요.
h학우: 종이책에 대한 흥미가 떨어져서 이용자가 줄었다고 생각하진 않아요. 오히려 종이책에 관심을 얼마나 기울일 수 있느냐의 환경 문제에서 접근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독서 자체가 요구하는 여유로운 시간, 공간, 정적인 상태를 현대인이 확보하기가 쉽지 않잖아요. 전자책으로의 이행도 이러한 흐름인 거죠. 책 자체에 대한 관심은 여전하다고 생각했을 때, 종이책은 역시 소장품이란 특징을 기반으로 여러 돌파구를 찾아야 할 것 같아요. 『전지적 독자 시점』이란 작품을 보면 새로운 디자인으로 리커버 에디션을 계속 출판하는데 독자들이 지속적 애정으로 응하고 있단 말이죠. 결국 소장품으로서 종이책이 지속적으로 독자의 관심을 끌려면, 소장하려는 욕구를 어떻게 새롭게 일으킬 것인가 고민해야 할 것 같아요.
‘물리적 실체를 가진 현물’이라는 종이책의 사실적 특성은 이제 소장의 욕구를 역으로 자극하는 시대에 하나의 가치가 되었다. 언제든지 타 콘텐츠의 유혹에 휩쓸리기 쉬운 디지털 세상에서 종이책은 집중력이나 소장 가치의 논의에만 머물진 않는다. 종이책은 독자를 완전히 이야기의 세계, 최초의 이야기 현장으로 끌어들인다. 백지 위엔 오로지 문장만이 있다. 붕 떠 있던 디지털 인간을 다시 지상으로 끌어내린다. 종이책을 보며 독자가 느끼는 장점의 스펙트럼은 상이하겠지만, 존재의 필요성에 대해선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공감할 것이다. 서울국제도서전은 독서 인구와 그로부터 거리가 먼 사람들도 종이책으로 발길을 향하게 하는 마일스톤임에는 분명해 보인다.
파란의 글을 마저 보고싶다면?
지금 바로 <파란>을 구매하세요! 재고 프리오더 진행 중!
브런치 메시지
파란 텀블벅 https://www.tumblbug.com/u/smwuparan
파란 인스타그램 DM https://www.instagram.com/smwu.paran.officia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