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경계, 재주 디자인 경계
책은 문자 언어를 전제로 한다. 문자는 쓰는 이가 표현하고자 하는 의미를 필요로 한다. 즉, 사유와 사상이라는 원재료를 바탕으로 책은 쓰인다. 반대로 말하면 사유가 없는 한 표현할 대상이 없고, 언어로 명시하는 행위를 통해 세상과 연결되려는 시도도 불가능하다. 정체성 긍정하기, 새로운 생각 공유하기, 자신이 속한 집단 대변하기 등 글쓰기의 의의가 사유를 바탕으로 시작된다. 고도의 사유는 때로 철학으로 분류되기도 하는데, 철학의 고전으로 알려진 많은 논리가 실상 여성을 배제한 채 뿌리내린 점은 시급히 주목해야 할 사안이다. 침
묵 당한 존재의 사유는 정당한 표현으로서 자신의 영역을 갖지 못하고 세상으로부터 제외되기 때문이다.
『생각하는 여자는 괴물과 함께 잠을 잔다』에서 김은주 작가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유를 언급하며 서문을 시작한다. 이데아라는 정신적 진리를 주창한 플라톤에게 육체의 세계는 정신보다도 자연에 속한다. 그에게 출산을 겪는 여성은 이성으로 이데아를 추구하는 철인이라기보다 자연에 가까운 존재다. 플라톤의 이상국가 속 시민 계급이 수호자, 보조 수호자(군인), 생산자로 이루어진 가운데 노예와 여성은 시민에서 배제됐다. 아리스토텔레스 역시 여성을 사회적 존재가 아닌 동물과 노예의 영역 조에(zoe)로 분류했다. 서양철학
의 시초 격인 앞선 두 철학자를 보면 인간 사유의 역사에서 여성이 머물러온 타자로서의 위치를 가늠해 볼 수 있다.
김은주, 『생각하는 여자는 괴물과 함께 잠을 잔다』, 봄알람, 2017, 9쪽.
여성 없이 철학이 시작됐다고 해서 여성이 사유할 줄 몰랐다는 뜻이 성립되진 않는다. 여성 철학 입문서 『생각하는 여자는 괴물과 함께 잠을 잔다』는 기존 질서를 깨부순 여성 철학자 6인을 소개한다. 곧 소개할 한나 아렌트, 가야트리 차크라보르티 스피박, 주디스 버틀러, 도나 해러웨이, 시몬 베유, 쥘리아 크리스테바는 뚜렷하게 교집합으로 묶을 수 있는 사상을 전개하진 않았다. 해당 도서의 출판사도 “이 여섯 인물이 어떤 하나의 주제를 끌어내기 위해 선택된 것은 아니다”라고 소개한다. 그러나 책의 제목이 말하고 있는 ‘괴물’을 품고 산 여성이라는 점에서 6인은 공통점을 지닌다. 여성이 배제된 역사의 궤도는 이제 여성이자 인간으로서 타오르는 화두를 지니고 세상에 출현한 철학자들에 의해 재정의된다.
심사숙고(réfléchir)하기, 한나 아렌트
한나 아렌트는 불가해한 세상 속에 끈질기게 사유하며 삶을 이어나가는 인간군상의 대표자다. “나는 나 자신에게 문젯거리가 되었다”는 아우구스티누스의 말을 인용한 그녀는 자기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고 대화하는 것으로 사유를 이해한다. 세계 1, 2차 대전 시기를 정면으로 겪은 그녀는 사유하는 행위를 원동력으로 세계의 비참 속에서 살아남았다. 나치의 압박이 심해지자 미국으로 망명한 아렌트는 언론사의 특파원으로 아돌프 아이히만의 전범재판을 취재하게 된다. 유대인 체포, 강제 이주를 도맡은 나치 장교 아이히만은 전형적 악인이리란 예상을 깨고 힘없고 평범한 사람으로 등장했다. 그는 단지 상관의 명령에 복종한 것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명령의 부당함을 비판하지 않고 행동한 것이다. 취재 이후 아렌트는 평범한 누구나 사유하지 않는다면 악한 행동을 자행할 가능성이 있다는 ‘악의 평범성’ 개념을 내놓는다. 여성 철학자가 받아들여지지 않던 당시 주류에 얽매이지 않았던 아렌트는 정치 이론가로 사유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바꿀 수 없어 보이는 인간 조건을 변화시키기 위해 붙들고, 협상하고, 화해하고, 다음으로 넘어가는 끊임없는 사유의 활동가로 말이다.
같은 책, 33쪽
서발턴‘들’의 흔적을 찾아서, 가야트리 차크라보르티 스피박
스피박은 전면적으로 여성의 목소리를 찾아 나섰다. 데리다의 해체론에 영향을 받은 그녀는 논문 「서발턴은 말할 수 있는가?」를 쓴다. 지배자의 입장에서 ‘서발턴’일 뿐인 피지배자는 그녀의 논문에서 실은 어느 하나로 완벽히 재현될 수 없이 다원적인 존재‘들’로 확장된다. 서발턴은 스피박을 통해 서발턴‘들’이 되는 것이다. 제국주의 식민 지배와 가부장제라는 이중적 억압 구조 속의 비서구권 여성들 또한 ‘제3세계 여성’이라는 울타리 하나에 포섭될 수 없다. 서발턴들은 이렇듯 완전히 재현될 수 없는 흔적이며 포착 불가능한 상태로 남는다. 스피박은 이분법적 사고에서 벗어나 다원적 존재로서 타자에 접근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자신의 주장을 실천하며 그녀는 이모할머니 부바네스와리 바두리의 죽음을 다시 추적한다. 결국 바두리가 인도 여성으로서 제국주의와 가부장제에 대항하며 자살했음을 밝혀내며 스피박은 한 여성의 역사를 다시 쓴다.
데리다의 해체론 : 구조주의가 체계를 세워 현실을 조직 단위로 이해하려는 기조일 때, 해체론은 ‘구조’가 가진 폐쇄성에 반발하며 출발했다. 해체론은 바로 그러한 ‘규정됨’을 통해 세상을 이해하는 철학적 울타리를 넘어서려는 노력이다. 존재와 부재, 안과 밖이란 이항 대립적 사고방식과 이를 가능케 하는 언어의 경계를 ‘해체’를 통해 초월하고자 했다.
서발턴 : 제국주의 지배층의 헤게모니에 종속되어 권력 없이 배제된 하위 계층을 지칭한다.
젠더는 문젯거리가 된다, 주디스 버틀러
여자는 남자만을 사랑할 수 있는가? 사람들 몰래 게이 클럽에 다니는 것이 잘못된 행위인가? 동성애자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10대에 이미 인식한 버틀러는 ‘삶이 자신을 배제할 때 이 삶을 도대체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 질문을 던진다. 그녀에겐 욕망을 ‘인정’받는 것이 화두였다. 인정이란 자신의 욕망을 사회 안에 무사히 놓는 것이다. 그녀는 더 많은 인정 규범을 제시하는 일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이성애와 이원적 젠더 밖 사람들이 긍정하며 바라볼 수 있는 삶을 고민한다. 더 많은 인정 규범
속에 더 많은 인간이 마땅한 인간이 되는 세상을 상상한다.
경계를 흐리는 대가인 동시에 아마추어 애호가, 도나 J. 해러웨이
해러웨이는 믹소트리카 파라독사(Mixotircha paradoxa)라는 조금은 생소한 생명체를 비유로 이분법의 미로를 빠져나오기 시작한다. 여기서 그녀는 숙주인 믹소트리카 파라독사와 기생하는 박테리아들이 서로 독립해서 살 수 없는 공의존 관계라는 것에 주목한다. 존재의 범위를 특정할 수 없는 이 생명체를 비유로 해러웨이는 개체성과 집합성의 개념에 의문을 제기한다. 세계를 새로운 사고방식으로 고민하는 그녀의 삶은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다양한 경험을 통해 그 자체로 상호 의존을 실천했다. 그렇기에 해러웨이는 객관성, 이성을 강조하는 서양 과학이 여성을 배제했음을 비판하고, 객관적 지식이란 사실상 죽은 백인 유럽 남성들의 산물이었음을 폭로하면서 ‘상황적 지식’이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상황적 지식: 모든 사람의 비전이 그 사람의 변화하는 정체성에 의해 구성되기 때문에 궁극적으로 부분적일 수밖에 없다는 인식에서 출발하며, 모든 지식이 부분적이고 상황적임을 인식하며 성찰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사유를 통한 자아실존의 무한한 물음표, 시몬 베유
시몬 베유는 중력이라는 자연의 법칙에서 인간의 삶과 실존 즉, 중력의 삶을 고찰한다. 중력은 인간을 지구에 구속하려는 힘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베유가 ‘중력의 작용’이라고 칭한 것은 전쟁이나 생존과 관련된 모든 일을 의미한다. 그녀는 제1, 2차 세계대전을 마주하면서 바라본 인간의 생존에 대한 욕망을 중력에 묶여 살아가는 모습으로 바라보았다. 이처럼 중력의 삶은 마치 잔혹하기만 한 세상의 이치처럼 보이지만, 베유는 그 속에서 허무에 압도되지 않고 은총(빛)을 찾고자 한다. 베유는 자신의 고통뿐만 아니라 타인의 고통을 사유하면서 더 나아가 그들의 고통을 함께하기를 소망했다.이해하고 포용하려는 그녀의 의지는 결국 당시 가장 핍박받았던 노동자들의 삶을 체험하며 『시몬 베유 노동일지』를 탄생시킨다.
끝없이 언어의 바다를 탐구하는, 쥘리아 크리스테바
쥘리아 크리스테바는 글쓰기라는 행위를 탐구하면서 학문의 종류, 심지어는 소설가와 학자의 경계까지 넘나들며 언어를 이해하고자 한다. 크리스테바는 오랜 시간 남성이 주체가 되어 남성의 목소리로 행해지던 말하고 글쓰기에 여성의 목소리를 추가하여 기존의 경계를 허물고자 했다. 그녀는 이렇게 만들어진 수많은 목소리(언어)가 점차 변화와 역동성의 성질을 갖는다고 말한다. 그 당시 프랑스 지식인 사이의 통념이었던 구조주의는 언어를 단순히 기호 간의 연결 속에서 발생하는 의미 작용이라고 여겼다. 반면 크리스테바는 바흐친의 다성성 이론을 바탕으로 언어 체계가 역동적인 의미를 생산하고 있음을 강조한다. 구조주의가 가지고 있던 언어의 완결성에서 벗어나 ‘상호텍스트성’의 개념을 토대로 글의 재해석을 통해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고, 플라톤의 『티마이오스』에서 가져온 ‘코라’라는 개념을 사용해 텍스트의 무한한 동적 변화에 주목한 것이다. 그녀는 언어의 경계를 넘나들 뿐만 아니라 나와 타인의 경계를 넘나들고자 하는 시도를 한다. 대표적인 예시로 비체를 공포, 혐오감과 거부감의 상징으로써 나와 타인을 구별하고, 동질성을 판단하는 수단으로 설명한다. 반대로 타인을 나로 동일시하게 되는 사랑은 크리스테바에게 언어활동의 창조성과 변화의 상징임과 동시에 그녀가 추구한 궁극적인 언어활동인 것이다.
바흐친의 다성성 이론: 텍스트는 상황에 따라 다른 텍스트, 혹은 언어와 결합하면서 새로운 텍스트를 생성하며 이로 인해 텍스트의 의미가 생겨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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