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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와 역사의 블랙리스트
만약 공공기관에서 추천한 도서에 정치적인 의도가 개입되었다면, 우수한 가치를 가진 책이 탈락되고 정치권의 입맛에 맞는 책만이 선정되어, 그것도 국민의 세금으로 전국에 뿌려진다면 어떨까? 마치 어느 독재국가에서나 일어날 법한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 것이다. ‘세종도서’는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에서 매년 발표하는 도서 선정사업이다. 문화체육관광부 주최,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 주관으로 진행되며, 국내 출판산업의 양서출판 의욕을 진작하고 국민의 독서문화 향상을 도모하려는 목적으로 추진되는 국책사업이기도 하다. 매년 교양도서 550종, 학술도서 390종을 선정하며, 사업 취지에 맞춰 국내 창작도서를 우선 추천하고, 선정된 도서는 전국 도서관 등에 무료 배포된다.
과거 세종도서는 박근혜 정부의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사건에 연루되었다.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은 2014년, 2015년 세종도서 선정사업 당시 박근혜 정부의 정책 또는 이념에 반하는 입장을 가진 작가의 작품 또는 그러한 입장을 담은 도서를 세종도서 선정에서 배제하라고 지시하였고, 그 지시를 받은 청와대, 문화체육관광부 및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 담당 직원들은 세종도서 심사 과정에서 총 22종의 특정 도서 및 특정 출판사를 불법적으로 탈락시켰다. 이는 명백한 정치적 검열 행위로, 헌법에 보장된 사상·표현의 자유와 출판의 자유를 심각하게 훼손했다. 블랙리스트 사건 이후, 세종도서사업의 공정하고 투명한 운영을 위해 ‘세종도서운영위원회’가 설치되어 매년 사업 제도 개선 및 운영 등 전반에 관련된 사항을 심의·의결하고 있다.
블랙리스트의 그림자는 아직도 드리워져 있는 듯하다. 작년에 개최된 서울국제도서전의 홍보 대사로 오정희 작가가 위촉되어 한창 논란이 되었다. 그는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시행 당시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위원이었기 때문이다.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진상조사 및 제도개선위원회’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문인을 지원하는 ‘2015 아르코문학창작기금 사업’의 심의를 맡았던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블랙리스트 인사를 배제하기 위해 부러 지원 규모를 축소했다고 한다. 그가 블랙리스트의 존재를 인지했다는 사실이 밝혀졌음에도 출판계 대표격 행사의 얼굴로 서자 여론이 들끓었다. 결국 서울국제도서전 운영팀에서는 언론간담회를 취소했고 홍보대사 토크쇼에서도 오정희 작가를 배제했으며, “홍보대사 선정과정에 문화체육관광부는 전혀 관여한 바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노불]
부림사건을 다룬 법정 영화 『변호인』에서는 한 대학생이 당시 ‘불온서적’, 즉 금서였던 E.H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를 소지하고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영장도 없이 끌려가 갖은 고초를 겪습니다. 10년 남짓한 시간이 흐른 지금도, 영화관에서 그 장면을 봤을 때의 충격이 가시지 않습니다. 책 한 권 때문에 옥살이를 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아요. 그런 시대였다는 거겠죠. 실제로 『역사란 무엇인가』 외에도 조세희 작가의 『난쟁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황석영 작가의『삼포 가는 길』이 불온서적 목록에 있었습니다. 옛날에 제가 수업을 들었던 사회탐구 과목 선생님께서도 대학교 도서관에서 특정 분야의 책을 자주 이용한다면 반동분자로 여겨져 특별관리대상이 될 수 있다는 소문이 떠돌았다고 합니다.
도서 『반일 종족주의』 표지에 붙인 딱지의 취지는 이해가 갑니다. 독자에게 왜곡된 역사관을 심어줄 수 있는 책이니 경고하려는 의도였겠죠. 하지만 역사 왜곡을 우려했다면 아예 처음부터 자료를 관내에 반입하지 않는 게 더 좋았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대신 저라면 도서구입신청을 한 이용자에게 구입취소 사유와 함께 해당 도서 열람이 가능한 도서관을 조회할 수 있는 ‘국가자료종합목록’이나 다른 도서관의 장서를 받아볼 수 있는 ‘책바다’, ‘상호대차’ 서비스에 대해 알려줬을 것 같아요. 아무리 좋은 의도이더라도 이런 식으로 금서 취급을
하면 안 된다는 의견입니다.
[별밤]
정치적 요소는 옳고 그름을 논할 수 없는 주제입니다. 사상과 표현의 자유가 허용된 대한민국에서는 누구나 자유롭게 정치적 의견을 가질 수 있죠. 특정 당이나 인물이 권력을 잡았다고 해서, 다른 의견을 지닌 도서를 읽지 못하게 하는 것은 절대로 일어나지 말아야 할 일입니다. 본문에서 언급한 세종도서 선정 사업 같은 경우, 정부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하여 발생한 사건이라고 생각합니다. 청와대의 직원들이 심사 과정에 참여할 정도였으니까요. 그러나 이 같은 사건이 여러 번 반복된다면, 결국 정부에 대한 국민들의 신뢰가 하락할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러한 사례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다면 더 많은 도서 관련 사업에서 이런 일들이 벌어지겠죠. 단순히 도서의 정치적 검열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의 목소리를 꾸준히 제기하는 것이 자유
를 향하는 길입니다.
‘성교육, 성평등, 페미니즘 도서’가 금서라고?
도서의 내용이 선정적이라는 이유로 도서관 수서에서 제외되는 일은 역사적으로 매우 빈번하게 발생하는 수서제한 조치 중의 하나이다. (중략) 합리적 절차에 의한 수서 배제는 검열이라고 판단하기 어렵다. 검열의 문제는 정상적인 수서 절차 이후 배가된 상태에서 이용자의 민원 등에 의해 선정성 이슈가 제기되고 열람
제한조치가 이루어지는 경우에 발생한다.
도서관 수서: 도서관에서 사서가 직접 선별하거나 이용자에게 구입 신청을 받은 자료를 구매나 기증 따위로 입수한 뒤 검수와 회계까지 처리하는, 일련의 자료 입수 업무
배경재, 『지적자유와 도서관 장서검열 문제의 현장 인식과 과제』, 한국문헌정보학회지 제56권 제2호, 2022.3 나다움 어린이책 교육문화사업: 책을 통해 성별 고정관념과 편견에서 벗어나, 다양성을 존중하고 남자다움이나 여자다움이 아닌 ‘나다움’을 배우고 찾아가는 사업(대한민국 정책브리핑)
[별밤]
한국 사회가 선정적인 작품으로부터 미성년자를 보호하고자 하는 것을 비난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금서 조치에 대해 조금 더 깊은 논의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책을 선정적이라고 규정할 수 있을까요? 저는 성과 관련된 내용이 언급된다고 해서 무조건 선정적이지는 않다고 생각합니다. 본문에서 언급된 『나다움을 찾는 어린이책』은 어린이 성교육을 위해 만들어진 책이죠. 또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에 대해 다룬 책은 성 보다는 역사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이 책들이 객관적으로 선정적이라고 볼 수 있나요? 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민원으로 인해 서가에서 제외된 책들은 제목과 책 설명에서 성에 대해 언급하기만 했을 뿐 그다지 선정적이지 않다고 생각해요. 굳이 따져보자면 성과 전혀 관계없는, 이를테면 해외 추리 소설 등에서 선정적인 장면이 적나라하게 묘사되어 있기도 하거든요. 이런 책은 선정적이라고 규정하지 않는데, 어린이 성교육과 ‘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책만 선정적이라고 판단하는 것은 납득할 수 없습니다. 정말 미성년자를 보호하기 위해서라면, 지금처럼 민원이 들어오는 모든 책을 무작정 서가에서 빼는 것이 아니라 충분한 논의 후 조치가 이루어져야 하는 것 아닐까요?
금서 난제, 성범죄
2021년, 서울도서관에서 박원순 전 서울시장의 성추행 사건을 다룬 『비극의 탄생: 50인의 증언으로 새롭게 밝히는 박원순 사건의 진상』에 열람 제한 조처가 내려졌다. 열람을 제한한 이유로는 ‘서울시에서 발생한 사건을 배경으로 한다는 특수성’, ‘서울도서관이 피해자가 근무하는 서울시청 건물의 바로 옆에 위치함’, ‘2차 가해 가능성이있음’ 등이 꼽힌다. 발간 즉시 정치/사회 분야 베스트셀러에 등극할 정도로 높은 관심을 받고 있었던 책이었기에, 열람 제한 조치의 파장도 컸다. 일부에서는 『비극의 탄생』이 취재 윤리 위반, 2차 가해 등
이라고 주장하며 서울도서관의 조치에 찬성했다. 그러나 일부 시민들은 ‘21세기 분서갱유’라며 제한 조치를 비판했다.
앞선 사건이 정치와 성범죄가 결합한 경우라면, 작가의 성범죄로 인해 열람이 제한된 책도 존재한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한예찬 동화 작가와 강석진 전 서울대 교수의 사례이다.
한예찬 동화 작가는 한 출판사에서만 43종의 책을 출간할 만큼 활발히 활동하는 작가였다. 그러나, 그가 직접 가르친 초등학생을 성추행한 혐의로 기소돼 징역 2년 6개월을 선고받았다는 사실이 알려지며 논란이 되었다. 그의 주 독자층, 그리고 피해자 모두 아동이었기에 파장은 더욱 컸다. 재판 결과가 알려진 후, 출판사는 출간한 책들을 전량 회수하고 희망자에 한해 반품을 받기로 결정했다. 국립중앙도서관, 국립어린이청소년도서관, 서울도서관 등 공공도서관에서 잇달아 그의 책에 열람 제한 조처를 내렸다. 성북 구립도서관에서는 연구 목적 등의 일부 특수한 이유가 있다면 제한적인 열람을 허용하고 있으나, 그 외에는 한 작가의 모든 책을 열람 제한하고 있다.
제자 성추행 혐의로 대법원에서 징역 2년 6개월을 선고받은 강석진 전 교수의 책 또한 열람 제한 조치를 받은 바 있다. 서울도서관에서는 보유하고 있던 강 전 교수의 책 3권에 대해 모두 열람 제한 조처를 내렸다.
[별밤]
『비극의 탄생』과 한예찬, 강석진의 사건에 대해 각각 생각이 다릅니다. 『비극의 탄생』의 경우, 예상 독자층이 아동이 아닙니다. 따라서 저는 이 책의 독자가 스스로 사고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을 것이라고 전제했는데요. 그렇다면 『비극의 탄생』을 읽고 박원순 전 시장의 성추행 사건에 대해 판단하는 것도 독자의 역할 아닐까요? 서울도서관이 피해자의 직장과 가까이 있어 특수한 상황이었다는 것은 이해하지만, 도서관 측에서 시민이 특정한 책을 읽을 권리를 침해하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반면, 한예찬 동화 작가나 강석진 전 교수의 경우에는 열람 제한 조치에 동의하는 입장입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강석진 전 교수에 대해서는 의견이 모호하지만 한예찬 동화 작가의 책에 내려진 열람 제한 조치에는 동의합니다. 한예찬 동화 작가의 책은 아동을 주 독자층으로 두고 있죠. 그가 저지른 성범죄의 대상 또한 아동이었고요. 그의 책 내용이 성범죄와는 관련이 없다고 해도, 아동을 대상으로 성범죄를 저지른 사람의 글을 아동이 읽는 게 적절하다고 느껴지지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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