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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규섭 Jan 19. 2023

무자비한 양심

심사정의 호취박토도(豪鷲搏兎圖)

"현재(玄齋) 심사정(沈師正, 1707~1769)이 죽기 직전에 그린 작품이 있네. 그야말로 평생의 경험을 모으고 마지막 열정을 불살라 창작한 작품이지.”

    

“그런 작품이 있었던가?”     


“심사정은 1768년 이 작품을 완성한 후 다음 해 사망했네.

아주 뛰어난 작품인데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모른다네. 의도적으로 은폐했다는 의심이 들 정도이지.”     


“오호. 점점 흥미진진해 지는군. 작품에 보물지도라도 숨겨 놓거나 세상에 알려지면 위험해지는 뭔가가 있는 것인가?”


“놀라지 말게. 정말 잔인하고 무서운 그림이라네.”   

  

“뜸들이지 말고 그림을 먼저 보여주게.”         

[심사정/호취박토도-토끼를 사냥하는 매/종이에 담채/115*53.6cm/1768년/조선/국립중앙박물관]   

   

“화제는 호취박토도(豪鷲搏兎圖)이라고 하네. 호취(豪鷲)는 용맹하고 호방한 독수리(매)를 뜻하고, 박토(搏兎)는 토끼를 잡는다는 뜻일세. 용맹한 독수리가 토끼를 잡고 있는 모습을 그린 것일세.”   

  

“아, 정말 무서운 눈빛의 독수리가 커다란 발톱으로 나약한 토끼를 움켜쥐고 있네. 금방이라도 갈기갈기 찢어버린 것만 같군. 놀란 토끼는 몸을 웅크리고 발발 떨고 있는 표정일세.

아래쪽에 있는 꿩은 깜짝 놀라 쳐다보고, 위에 있는 까치는 위험을 알리고 소리 지르네.

독수리가 토끼를 잡는 순간, 주변의 동물들이 놀라 일시 정지된 느낌일세.”    

 

“같은 시대를 살았던 최북이라는 화원도 이와 비슷한 그림을 그렸는데, 매가 토끼를 멀리서 노려보는 정도의 장면을 그렸네. 하지만 심사정의 그림에는 망설임이 없네.”   

  

“강한 동물이 약한 동물을 잡아먹는 약육강식의 세계를 표현하다니.

심사정은 몰락한 양반가문에, 만년 야당인 남인세력으로 불우한 삶을 살았다고 알고 있네. 그렇다면 세상이 돌아가는 원리와 피해자의 원망을 담은 그림이지 않겠는가?”  

   

“역적의 자손으로 벼슬길이 막힌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탄압하거나 차별한 것은 아니네.

당시 집권당이었던 노론세력에 속한 겸재 정선 문하에서 진경산수화를 배웠고 강세황, 이광사, 이덕무, 김광국 같은 유명 문인들과 교류했네.

비록 5일 만에 그만두기는 했지만, 30대 초반에는 왕의 초상을 모사하는 감독을 맡기도 했네. 그림이 잘 팔리고 경제적 후원자도 있었네.

추정하건데, 중산층 이상의 삶을 살았을 것이네.”


“심사정의 삶을 불우하게 만든 것은 후세 사람들이라는 말이군. 화가의 삶을 비참하게 만들어 작품 값을 올리는 상술은 흔한 수법이지.”     

[좌-최북의 그림이다. 독수리가 도망가는 토끼를 노려보고 있는 모습을 그렸다. 우-정홍래의 욱일취도이다. 아침 해를 맞이하는 한 마리의 매를 그렸다.]


“작품 안에는 흥미로운 글귀가 있네.

무자하방사임량(戊子夏倣寫林良). 1768년 여름 명(明)나라 화가 임량의 작품을 참작하여 그렸다는 뜻일세.”

    

“그러니까, 모방한 작품이라는 뜻이네. 진경산수화, 남종화를 바탕으로 독창적인 작품세계를 만든 심사정이 마지막 열정을 불태워 그린 작품이 모방작이라니. 이해할 수가 없군.”

  

“자신의 창작품이 아니라 명나라 그림을 따랐다고 기록한 가장 큰 이유는, 두려움 때문일세.”

    

“무엇이 심사정을 두렵게 했는가?”

    

“바로 자네가 앞에서 말한 약육강식의 세상으로 해석하는 것을 두려워 한 것이지.”     


“뭐라고? 누가 보아도 독수리가 불쌍한 토끼를 사냥하는 장면은 그리 해석할 것이네. 오해할 줄 알면서 꼭 이렇게 그려야만 하는 절박한 이유는 도대체 뭔가?”

         

“독수리나 매는 조선 초기부터 그렸다네. 왕족이었던 이암이 그린 사냥매가 대표적이지.

하지만 사냥매를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도 만만치 않았네. 조선은 철학자, 문인이 통치하는 사회였네. 사냥은 무력과 폭력을 상징하므로 금지해야 한다는 상소가 빗발쳤지. 당연히 사냥매 그림도 사라졌지.

그런데 조선 후기가 되면서 상황이 바뀌었네. 독수리나 매를 강인한 선비의 상징으로 수용하는 정세가 형성되었지.

심사정과 비슷한 시기에 활동한 정홍래 화원은 매 그림을 그려 유행시키고 세화에 선정되는 영광을 누렸지.

최북이나 정홍래는 직접 사냥하는 형상을 피했네. 홀로 있거나 노려보는 정도에 그렸지.  

심사정은 직접 사냥감을 움켜쥐는 모습을 그렸네.

이  그림을  강자가 약자를 잡아먹는 약육강식의 세상을 표현한 그림이라고 오해를 한다면 지금까지 쌓은 명성을 단번에 날려버릴 수 있는 위험이 있었다네.

사실, 현재도 이 작품을 약육강식으로 해석하는 사람들이 많다네. 심사정의 우려는 결코 과장이 아닐세.

조선 후기, 망한 명나라를 철학의 중심국가로 여겼네. 명나라에서 유명했던 임량의 독수리 그림을 약육강식의 뜻으로 해석하는 사람은 없었기 때문에 이를 이용한 것이네.”     

[임량/쌍응도/14세기 명나라/중국 광동성 박물관. 심사정은 자신의 그림 속에 임량의 그림을 본받았다고 적었다. 독수리의 모습이나 기법은 유사한 부분이 있다. 하지만 임량이 토끼를 움켜 잡는 그림을 그렸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정은 토끼와 꿩, 까치, 노송을 결합하여 새로운 작품을 창안했다.]


“독수리와 매 중에 정확히 어떤 새를 말하는가?”    

 

“혼용이라네. 독수리는 몸집이 크지만 보기 힘든 철새이고, 매는 쉽게 관찰할 수 있는 텃새일세.

생김새가 비슷해서 독수리인지 매를 그린 것인지 애매한 경우도 많네. 이 둘을 구분하는 논쟁은 의미가 없네. 투영된 상징이 같기 때문이지.”   

  

“독수리나 매에는 어떤 상징이 붙은 것인가?”  

   

“강인한 양심, 호방한 양심, 무자비한 양심을 가진 군자의 상징일세.”     


“그러니까, 독수리가 토끼를 사냥하는 것은 군자의 본모습이라는 뜻인가? 그런데 하필 사냥감이 토끼인가?”

    

“그림 속의 토끼는 그저 나약함을 뜻하네. 탐욕, 거짓, 불의 따위나 나쁜 놈 혹은 나약한 선비라고 여겨도 되네.”    

 

“매가 토끼를 무자비하게 사냥하는 것처럼, 호방한 군자는 세상의 악을 이겨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인가?”     

[호취박토도의 부분 그림이다. 독수리가 날카로운 발톱으로 토끼를 움켜잡고 있다. 이 장면만 보면 약육강식에 기반한 강자의 폭력을 옹호하는 것으로 오해할 수 있다.]

 

“그렇다네. 자칫 토끼를 움켜쥔 매가 잔인하고 폭력적인 모습으로만 보일 수 있네. 심사정은 이를 놓고 노심초사했다네. 그래서 그림 속에 여러 장치를 넣어 내용을 보강했지.”

    

“그림 속에 어떤 장치가 있다는 것인가?”   

  

“먼저 한 쌍의 꿩을 자세히 보게. 장끼는 뭔가를 먹고 있는 모습이고, 까투리는 매를 바라보고 있지. 매가 토끼를 잡는 모습이 겁나면 도망가야 하는데 평안하게 먹이를 먹는 모습일세.

꿩은 왕비의 예복 문양에 넣기도 하는 풍요의 상징이지.

심사정이 생뚱맞은 꿩을 그려넣은 것은 나약함을 이겨내는 강인한 군자만이 만백성의 풍요를 이룰 수 있기 때문일세.”     

[호취박토도의 하단 부분이다. 한쌍의 꿩이 평온하게 먹이를 먹고 있는데,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 까투리가 무심하게 위를 쳐다본다. 이런 표현은 긴장감을 풀어주는 조형적 해학이다. 꿩은 풍요의 상징으로 만백성의 모습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


“그렇게 깊은 뜻이 있는 줄 몰랐네. 그렇다면 위쪽의 까치는 왜 그린 것인가?”     


“까치에 붙은 상징은 내면의 즐거움이네. 토끼를 구하기 위해 달려드는 모습이 아니라 내면의 기쁨으로 다가 온다는 것이지.

까치 한 마리는 소나무에 앉아있지. 둥치가 이리저리 휘어지고 이파리가 듬성듬성 난 것이 영락없는 노송(老松)을 표현한 것이네. 노송은 완성된 전통을 상징하네.  

심사정은 의도적으로 노송을 그렸네. 매가 토끼를 잡듯이 군자가 나약함을 이기는 것은 완성된 전통에 따른 것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이지.”     

[생생한 소나무를 그릴 수 있는데 굳이 구불구불한 노송을 그렸다. 작품의 내용을 탄탄하게 만들기 위한 의도된 장치이다. 노송은 완성된 전통의 뜻이다.]


“분명 수묵화인데 군데군데 채색한 것처럼 보이네.”    

  

“수묵담채화라고 부르네. 담채(淡彩)는 아주 연하게 색을 입히는 기법을 말하지. 주로 연한 갈색을 칠했네. 자세히 보면, 진한 색을 칠한 곳이 두 군데 있네. 한번 찾아보게.”  

   

“음, 꿩 머리 부분과 매 뒤쪽에 작은 열매에 붉은색으로 칠하지 않았는가?”  

   

“연한 색으로 칠해도 충분한데, 굳이 진한 빨간색을 칠한 것은 강조하기 위함일세.

붉은 열매는 양심을 뜻하네. 흔히 한 조각 붉은 마음, 일편단심을 떠올리면 쉽네. 꿩 머리의 붉은 색은 만백성의 풍요를 강조하기 위함이네.”

     

“앞서 최북이나 정홍래, 임량의 매 그림에는 사냥하는 모습이 없다고 했는데, 심사정은 매가 토끼를 움켜쥐는 자극적인 그림을 통해 사람들의 관심을 받고자 한 것인가?”   

  

“이 작품은 죽음을 코앞에 두고 그렸네. 이런 심사정에게 인기, 관심, 돈 따위는 아무 쓸모가 없었네. 심사정은 만년 야당인 남인, 역적 가문 출신이지만 엄연히 성리학을 공부한 선비였네. 뭇 선비들처럼 늘 정치를 걱정했고 올바른 세상을 꿈꾸었지.

환갑의 심사정은 세상을 구하고 태평성대를 이룰 방법을 깨우쳤네. 이를 그림에 담아 후세에 전하기 위해 마지막 힘을 짜내었네.”  

   

“심사정 평생의 경험과 공부가 이 작품에 녹아있다는 말인가? 그게 뭔가?”   

  

“세상을 구할 비급은 무자비한 양심밖에 없다고 여긴 것이네.

부정부패, 불의, 파렴치. 비겁 따위가 판치는 세상이 된 것은 양심이 나약하기 때문이기에, 무식하고 게으르며 실천하지 않는 나약한 선비를 비판한 것이지.

나쁜 놈들에게 자비를 베풀지 말라, 나쁜 놈들을 배려하면 더 나빠질 뿐이다. 폭력을 동반한 강력한 힘과 의지로 제압해야 한다. 한 치의 망설임이 있으면 도리어 나쁜 놈들에게 죽는다. 단번에 숨통을 끊어야 한다. 이것은 역사적 사명이고 만백성을 풍요하게 하는 지름길이다. 이 길 밖에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네.”  

   

“아, 소름이 돋네. 안중근 의사, 김구 선생이 침략자인 이토 히로부미를 죽이고, 무자비한 테러와 암살을 감행한 것도 이와 다르지 않네.”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이 작품이 은폐 왜곡된 것과 무관하지 않네.

토끼를 불쌍하고 힘없는 백성으로 바꾸고, 독수리는 잔인한 폭력을 행사하는 양반, 지배자의 상징으로 만들어 주객을 전도시켜 놓았다네.”    

 

“이 작품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뭔가?”     


“세상이 어지럽고 혼란하네. 이런 시기에 나쁜 놈들을 따라가면 총알받이가 되어 가장 먼저 죽는다네.

우리 마음속에 단단하게 숨 쉬고 있는 양심의 힘을 믿고 따라야 하네.

심사정은 모두가 무자비한 양심의 독수리가 되어야 한다고 외쳤네. 그게 유일한 살길이라고.

그리고 담담하게 죽음을 맞이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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