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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규섭 Apr 17. 2024

태평성대의 꿈-십장생도 6화

1501년 중종반정이 일어난다.
연산군은 폐위되고 강화도로 유배되어 두 달 만에 역병으로 죽었다.
 
1515년, 유학의 영수였던 조광조는 사간원 정언이 된다. 그의 나이 34세였다.
파격적인 상소를 통해 세간의 주목을 받았으며 정6품에 불과한 관직으로 권력의 실세로 떠올랐다.
조광조는 현령과(천거제도)를 실시해 젊은 선비들을 대거 발탁하여 고위직에 앉혔다.
 
조광조는 철저한 성리학자였으며 사림세력과 함께 도학정치(道學政治)를 실현하고자 했다.
도학정치란 유학, 성리학을 중심으로 펼치는 정치이며, 요순시대의 태평성대를 본보기로 삼았다.
 
새롭게 조정에 들어온 조광조를 비롯한 사림세력은 민본정치를 주장하며 정치 개혁에 착수하였다.
임금에게 철저한 경연과 수양을 강요했으며 조정 내 언로의 확충을 강조하였다.
 
조광조는 조선을 성리학적 이상사회로 만들려고 했다.
성리학적 생활 규범을 규정하고 있는 소학이나 향약의 보급 운동 등을 추진하였다.
이러한 노력은 조선시대의 풍습과 사상을 유교식으로 바꾸는 결정적 역할을 한다.
일반백성까지도 주자의 가례(家禮)에 따라 관혼상제를 행하게 된 것이다.
 
우의정 정광필이 조광조를 불러 세운다.
 
“이번 소격서 폐지에 대해, 묻고 싶은 것이 있소. 어디 가서 술 한 잔 하시지요. 제가 좋은 기방을 알고 있습니다.”
 
조광조는 내키지 않았지만, 이참에 소격서(昭格署)에 관한 자신의 의견을 확실히 해 둘 필요를 느꼈다.
 
“기방은 가지 않소. 차라리 대감의 집이면 좋겠소.”
 
정광필의 집은 으리으리했다.
정원에는 소나무, 단풍나무, 복숭아나무로 가득했고 여기저기 괴석이 놓아 마치 신선 세계를 연상케 했다.
사랑방에는 명나라에서 들어온 장식용 고동기, 옥 장신구, 유리병과 진귀한 물건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상다리가 휘도록 차린 음식이 들어왔다.
조광조는 술잔을 입에 대다 말고 사랑방 벽면에 둘린 병풍 그림을 쳐다본다.

[조선 중기의 십장생도는 대략 이런 형상이었을 것이다. 해와 달이 동시에 그려져 있는 도교의 성격이 강했다. 그림 속의 사슴, 학, 거북, 영지, 소나무 따위는 불로장수를 뜻하고 대나무는 귀신을 쫓는 상징이다.]


“아, 이 그림은 십장생도입니다. 말씀드리기 송구합니다만, 세화(歲畫)로 받은 그림입니다.”
 
조광조가 나무라듯 말한다.
 
“그렇다면 연산군 때가 아니오? 아직도 이런 그림을 가지고 있었소?”
 
“특별한 의도는 없습니다. 세화는 왕이 관료들에게 내리는 그림으로, 관례일 뿐입니다. 

저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이 하사받았습니다. 이 그림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참 편안해집니다.”

 
“이 십장생도는 이단인 도교의 내용을 담고 있소. 나는 보기에 아주 불편하오.”
 
“백성들은 이런 그림을 아주 좋아합니다. 백성들은 아직 성리학을 어려워합니다.
무엇보다 성리학은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구체적인 숭배의 대상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에 반해 이 십장생도에는 풍요와 장수를 가져다주는 여러 신비한 동물과 식물이 그려져 있지요.”
 
“도교는 미신과 다를 바 없소. 미신은 언제나 사람들의 눈을 현혹하여 기망에 빠지게 합니다.”
 
“반드시 그러한 것은 아닙니다. 도교는 미신과 유학(노장사상)이나 불교가 결합한 것입니다.”
 

“껍데기일 뿐입니다. 도교는 실체도 없는 온갖 귀신을 신봉하고 불로장생이나 방중술 따위나 찾는 욕망의 결집체로 어떠한 철학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대만의 화려한 도교 사원 모습이다. 도교는 불교, 유학, 삼국지 영웅, 용, 봉황, 사자를 비롯한 온갖 요소가 결합했다. 내용은 불로장수, 부귀영화, 액막이이다. 점을 치고 부적을 쓰기도 한다. 칠성신, 신선, 성황당, 무당, 만신 따위는 모두 도교에 포함된다. 백성들은 도교를 좋아했다. 원초적 욕망을 투영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생활환경이 어렵고 세상이 혼란할수록 도교는 발전한다. 조선 말기나 일제강점기에 무당이나 사이비종교가 난립한 이유이기도 하다.]


“제 말을 들어 보십시오.
사람은 원래 욕망이 가득한 육신의 형태로 태어납니다.
이런 욕망은 결코 없애지 못한다고 선현들께서도 말씀하셨지요.
욕망을 추구하는 가장 기본적인 형태가 미신입니다. 따라서 미신도 없애지 못합니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유학이나 불교 같은 수준 높은 철학과 결합하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지금 도교를 없애고자 한다면 백성들은 삶의 의욕을 잃어버릴 것이 틀림없습니다.”
 
“귀신은 없소. 불로장생도 없고 내세도 없소. 사람은 죽으면 그저 기의 상태로 돌아갈 뿐이오. 허상인 옥황상제에게 빈다고 욕망이 이루어지겠소? 
그래서 내가 미망에 빠진 백성을 올바르게 인도하고자 소학과 향학을 보급하고자 하는 것이오.”
 
“당연히 그리 해야지요.
하지만 성리학이 가뭄이나 역병을 해결하지는 못합니다.
천재지변 같은 어려움이 있을 때 백성들은 지푸라기도 잡는 마음으로 옥황상제나 귀신을 찾습니다.
최근에 실시한 현량과에 급제하기 위해 사찰에 가서 기도하거나 무당집에서 부적을 쓰는 일도 있었다고 합니다.
백성들은 결코 도교를 포기 하지 않을 것입니다.”
 
“소인배 같은 행위입니다. 가뭄이나 역병은 임금과 신하, 백성이 힘과 지혜를 모아 이겨나가야 합니다. 귀신을 찾아 푸닥거리를 한다고 해결됩니까?
또한 과거급제를 위해 부적이나 기도를 하는 사람은 모두 공부를 게을리해서 요행을 바라는 것이니 엄히 처벌해야 합니다.”
 
우의정 정광필이 한숨을 쉬듯 말한다.
 
“도교를 믿는다고 세상이 혼란해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노장사상이나 불교의 영향으로 도교는 권선징악을 추구합니다. 
선은 권하고 악을 벌하는 사상은 필요하지요.
어쩌면 가장 쉽게 백성들을 교화하는 방법일 수도 있습니다.”
 
“헛소리입니다.
권선징악은 껍데기입니다. 선악이 욕망과 결합하는 순간 충돌하고 변질합니다. 나에게 선이 타인에게는 악이 되고, 타인의 선이 나에게 악이 된다는 것을 정녕 모르시오?
임금도 사람이니 마음이 약해지면 도교를 찾을 것이 분명합니다.
도교에 빠지면 연산군처럼 욕망의 정점인 쾌락을 찾아 백성의 삶을 돌보지 않습니다.
관료들은 아첨하고 매관매직하며 탐욕에 따라 백성들의 고혈을 쥐어짤 것입니다.
도교가 마음의 위안을 준다고 해서 백성의 삶을 지옥으로 빠트릴 수 없습니다.
우리가 반정을 일으킨 것은 이를 바로잡기 위함입니다.”
 
조광조는 성리학을 가장 잘 이해한 학자이며 유학의 영수였다.
도교의 권선징악은 욕망을 숨기기 위한 껍데기이고, 본질을 흐리기 위한 간교한 개념이라고 여긴 것이다.
 
“사람은 우주의 본성인 양심을 가지고 있지만, 동시에 욕망의 본성도 가지고 태어나지요. 그래서 늘 위태합니다.
중용에 이르기를, 이 둘의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고 했소.
지금은 사람의 우주적 본성인 도심을 높여야 할 때요.
도심은 노력하고 애써야 발현됩니다. 가만히 있어도 생기는 욕망과 다르오.”

조광조의 확고한 주장에 정광필은 할말을 잃었다.


조광조는 화려한 십장생도를 보면서 다짐했다. 
 
“소격서(昭格署)는 반드시 폐지할 것입니다. 나라를 다스리는 정부에 도교기관을 둘 수 없소.”
 
조광조는 상소를 올렸다.
 
“세상을 규범하는 것은 오직 성리학뿐이며, 다른 이단을 모두 혁파해야 합니다.
소격서는 도교와 관련되어 있으므로 폐지되어야 마땅합니다.”
 

[서울 종로구 소격동에 있는 소격서 터 표지석이다.]


소격서는 조선 건국 때부터 문제를 일으켰다.
태조 이성계는 도교에 관심이 많았다.
가뭄이나 기상이변이 생기면 소격소에서 기우제를 지냈다. 심지어 국가의 주요 정치 사안에 대해 점을 치기도 했다.
 
세종대왕은 ‘도교와 불교의 가르침은 허황된 것이며 특히 도사들의 말은 더욱 허황되다.’며 비판했지만, ‘소격전에서 제사는 오랜 관습이므로 지금에 와서 폐지할 수는 없다.’하였다.
 
성종 12년(1481), 가뭄을 맞아 흥천사에 기우제를 지낸 것을 두고 홍문관 부제학 이맹현이 상소를 올린다.
 
“부처님에게 빌어 비를 내리게 했다는 말은 사서를 아무리 뒤져도 상고할 수 없는데, 왜 그토록 부질없는 일에 기대십니까?”
 
성종 23년(1492), 경연 자리에서 시독관(侍讀官) 이달선(李達善)이 “소격서는 도교를 위해 설치한 것으로 정도를 벗어났습니다.”라고 간언했다.
 
중종은 “소격서는 오래된 관습이라 혁파하지 않는 것뿐이다.”라고 주장한다.
 
이에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의 관료들은 출근을 거부하고 맞선다.
이에 중종은 참여자를 모조리 파면하겠다고 협박한다.
 
조광조는 사퇴라는 배수의 진을 치고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다.
 
“만약 이단을 택한다면 전하께서 연산군과 같은 군주가 되려 함이므로 결코, 용납할 수 없습니다.”
 
조광조는 소격서가 대단한 관청이라고 여기지는 않았다. 사실 있으나 마나 한 조직이었다.
하지만 소격서는 국가기관이었고 도교의 상징과도 같았다.
 
“왕도 성리학의 가르침에 따라야 합니다.”
 
조광조는 왕이 미신이나 도교와 같은 이단에 빠지는 것을 결코, 용납할 수 없었다.
결국 중종 13년(1518), 소격서는 사실상 폐지된다.
 

[담양에 있는 소쇄원 모습이다. 무계정사가 안평대군의 꿈을 담은 곳이라면, 소쇄원은 조광조와 사림의 꿈이 담겨있다.]


이 일로 중종의 체면이 구겨졌다.
별일도 아닌 소격서 문제로 하여, 연산군처럼 취급되는 수모를 당했기 때문이다.
 
사림파의 원칙적인 언행과 정책에 적응하지 못한 중종은 훈구파를 지원하여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난다.
중종 14년(1519) 11월, 새벽 5시경.
중종은 승정원, 홍문관, 대간을 모조리 교체하고 새로 승지가 된 성운에게 명령한다.
 
“조정의 큰일이 이미 결정되었으니 지체해선 안 된다. 빨리 조광조를 처형하라는 전지를 내려라. 두세 번 재촉하였는데 밤이 새도록 결정을 못하는 것은 옳지 않다.”
 
조광조는 전남 능주로 유배되었고 한 달 만에 사약이 내려졌다.
사약을 마시기 전에 이렇게 유언한다.
 
“내가 죽거든 관을 얇게 만들고 두껍게 하지 말라. 먼 길을 가기 어렵다.”
 
양산보(梁山甫)는 조광조(趙光祖)의 제자였다. 

조광조가 기묘사화로 죽임을 당하자 세상에 미련을 두지 않고 고향인 창평(담양군의 일부)으로 내려왔다.
양산보와 살아남은 선비들은 조광조가 꿈꾸던 세상을 상상하며 정원을 만들었다.
바로 소쇄원이다.
소쇄(瀟灑)는 ‘맑고 깨끗하다.’는 뜻의 옛말이다.
 
소쇄원은 안평대군이 무릉도원의 꿈을 꾸고 무계정사를 지은 것과 비슷하다.

안평대군의 꿈이 조광조로 이어진 것이다. (계속)


(참고1) 화려(華麗)-사치, 호화와 같은 뜻으로 부정적 내용이다. 한자문화권에서 잘 사용하지 않는 글자이다. 

애국가에 있는 '화려강산'도 부정적 단어를 사용한 모호한 개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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