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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규섭 Apr 23. 2024

태평성대의 꿈-십장생도 7화

1714년 숙종 대왕이 재위한 지 40여 년이 되었다. 그해 봄, 영남에서 기근이 들었다. 한성 진율청에서 쌀을 보냈다.
날이 오랫동안 가물어 임금이 몸소 향을 피우며 묵도했다.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어려움을 겪자 팔도의 환곡을 고루 탕감하도록 하고, 전라도 충청도의 고을에는 세금을 줄어서 내도록 했다.

9월, 대신과 당상관, 종친의 70세 이상 부인에게 쌀과 고기, 면포를 하사했다.
팔도 벼슬아치의 80세 이상 부인과 평민 90세 이상 여인 모두에게 쌀과 고기를 하사하라고 교지를 내렸다.     

다음 날 아침, 조회가 열렸다.

이조판서가 보고한다.     


“올봄에 제주도에 기근이 들어 많은 백성이 굶주렸습니다.
서울의 진율청(흉년에 빈민구제를 담당하는 임시 관청)에서 영남의 쌀 2천 석과 조미(粗米) 3천 석을 제주도로 보냈습니다.”  

   

“다행히 진율청에서 일 처리를 잘해서 목숨을 잃은 백성은 없었소. 지금은 비가 내려 농사가 잘되고 있다는 보고 받았소. 이대로만 유지된다면 올해 농사는 괜찮을 것이오.
특히 역병이 돈다는 이야기도 없고 하니 별 탈 없는 한 해가 될 것 같소.”  

    

“모두 상감마마의 공덕이옵니다.”   

  

“모든 관료 대신들은 백성들에게 헌신할 수 있는 바른 마음을 가져주시오.
내년 정초에 전국의 관료들에게 세화를 하사할 것이오. 예조판서는 관료들의 마음을 다잡을 만한 내용의 세화를 준비해서 보고하도록 하시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빠르게 준비하겠사옵니다.”  

   

[연말이 되면 도화서 화원들은 눈코 뜰새없이 바빴다. 세화를 제작하기 때문이다. 조선은 공식적으로 연 평균 1,000여 점 이상의 세화를 창작해 관료들에게 하사했다.]


그해 가을, 예조판서는 세화(歲畫) 계획안을 임금에게 올렸다.
계획안에는 왕실 친인척부터, 지방의 하급 관리에게 주는 그림의 세세한 항목이 적혀 있었다.
그림의 종류만 20종에 그 양은 1,000점이 넘었다.
세화 제작에 필요한 예산과 계병(契屛)에 참여할 부서와 관리들의 이름들이 첨부되어 있었다.

여기저기를 뒤적이던 숙종이 말한다.    

 

“십장생도는 빠져있네요.”    

 

“예, 중종 대왕 이후로 십장생도는 거의 그리지 않았습니다. 도교의 내용이 많다고 하여 사간원, 홍문관 관료들이 반대했기 때문입니다.” 

    

“시대가 바뀌었소. 조선은 더 이상 도교를 믿지도 권장하지도 않습니다.
시대에 맞는 새로운 십장생도를 제작하도록 하시오.”   

  

예조판서를 비롯한 도화서 수장인 별제와 화원들이 모였다.    

  

“십장생도를 제작하라는 어명이 떨어졌소.” 

    

“십장생도는 광통교의 서화사나 지전에서 많이 팔리는 그림이지 않습니까?”

     

“그렇소. 하지만 이번에서는 민가의 속화가 아니라 새로운 십장생도를 그려야 합니다.”

     

“새로운 십장생도라면 어떤 그림을 말하는 겁니까?”  

   

“나는 모르오. 다만 도교나 미신의 흔적은 없어야 합니다.”  

   

“아, 난감한 문제입니다. 뭔가 표본이 될 만한 그림이 있다면 좋을 텐데요.”     


“세종대왕 시절, 안견 선생이 그린 몽유도원도가 큰 도움이 될 것 같은데, 기록으로만 전해지고 실물은 감쪽같이 사라졌다지 뭡니까.” 

    

“사라진 것이 아니라 왜놈들이 약탈해 갔습니다.”   

  

통신사절단을 따라 일본에 다녀왔던 화원 이수영이 말한다.  

   

“그것을 어찌 아시오?”  

   

“제가 일본 승려에게 들었습니다.”    

 

“자세히 말해 보시오.”     


“제가 일본을 다녀온 지 10여 년이 되어 기억이 가물가물하고 좀 긴 이야기입니다. 일본 승려에게 직접 들은 말이지만 진위는 알 수 없소.  하지만 개연성이 아주 높습니다.”     

[조선통신사의 행렬 모습이다. 숙종 때는 1682년, 1711년, 1748년 3차례 있었다.]    

 

“일본을 통일한 풍신수길(豊臣秀吉, 토요토미 히데요시)이란 자가 임진년에 왜란을 일으킨 것은 잘 알고 있을 것이오.
일본을 통일하니 할 일이 없어진 사무라이들이 문제였답니다. 나누어줄 관직이나 영지가 부족했기 때문이지요.
그냥 죽일 수도 없고, 놔두면 반역을 일으키거나 해적이 되어 조선이나 명나라를 약탈할 것이 틀림없었습니다.
비대해진 군사력을 처리하는데 골치가 아프게 되자, 이들을 중심으로 조선을 침략할 계책을 짭니다.
전쟁 중에 죽으면 좋고, 만에 하나 조선을 손에 넣게 되면 더욱 좋은 일이지요.
풍신수길은 출정을 앞둔 장수들에게 조선의 최고 보물을 가져오라고 했답니다.

그런데 장수들은 조선의 최고 보물이 뭔지 몰랐습니다. 금은보화나, 팔만대장경 따위를 가져와야 한다고 서로 주장했습니다.
그러던 중 한 승려가 조선 최고의 보물은 도자기와 몽유도원도라고 대답합니다.”


풍신수길이 연유를 묻습니다.  

   

“우리 일본은 아직 최고급 기술의 결정체인 도자기를 만들지 못합니다. 일전에 네덜란드 상인에게 들으니 유럽에서는 도자기가 비싼 값에 팔리고 있고 그것을 명나라가 독점하고 있답니다. 조선은 명나라와 비견할만한 도자기 기술을 가지고 있지만 무역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조선의 도자기 기술을 가져올 수 있다면 일본 전체가 먹고살 만할 것입니다.”     

[일본 아리타에 있는 이삼평 조각상과 기념비. 조선 도공 이삼평은 일본 도자기의 신으로 불린다.]  

   

별제가 끼어들어 한마디 한다. 

    

“그 얘기는 나도 들었소.

왜놈들이 잡아간 조선의 도공은 2,000여 명이 넘었다지요. 여주 관요에 소속된 최고 도공이 700명 정도였소.
2,000명이면 조선의 도공은 모조리 잡아갔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오. 왜란이 끝나고 백자 그릇이 없어서 임금이 제사를 지내기가 어려웠다는 말도 전하오.”

     

풍신수길이 과연 최고의 보물이라고 할 수 있다며 고개를 끄덕입니다.    

 

“그럼 두 번째는 무엇이냐?”     


승려가 대답하길,  

   

“몽유도원도는 조선인의 꿈과 이상이 담긴 그림입니다. 조선이 중국보다 높은 학문과 문화를 가진 것은 성리학을 만백성까지 전파하고 실천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조선의 문화의 정점을 표현한 것이 몽유도원도입니다.
이 몽유도원도를 공부한다면 일본인의 수준도 높아질 것입니다.”    

 

풍신수길은 조선을 침략하는 장군에게 이를 실행할 수 있도록 명령합니다.  

    

“이 두 가지를 훔쳐 간 다음 어떻게 했답니까?”  

   

승려가 말하길,


 “일본에 온 조선 도공들은 처음에는 백자를 만들지 못했습니다. 백자의 원료인 백토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조선 도공 이삼평은 일본 전국을 돌며 백토를 찾아다녔고 결국 아리타라는 지역에서 발견합니다.

그런데 유럽의 상인들이 도자기를 구매할 수 없는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명과 청이 전쟁하느라 도자기 공장을 폐쇄했기 때문입니다.
결국 유럽 상인들은 백자를 만들었던 일본으로 발길을 돌립니다. 첫 주문이 백자 50만 개였다고 합니다.”


이로써 도자기는 일본을 먹여 살리는 보물이 되었습니다. 

   

“두 번째 보물인 몽유도원도는 어찌했답니까?”  

   

[안견/몽유도원도/비단에 담채/38.7cm*106.5cm/1447년 조선/일본 덴리 대학. 몽유도원도가 어떻게 일본에 있는지 정확히 알지 못한다. 다만 임진왜란 중에 약탈당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승려가 말하길,

몽유도원도를 펼쳐 놓고 풍신수길과 영주들이 감상하는데 모두 고개를 갸웃거렸답니다.

평생 전쟁만 해 온 무사들이라 그림의 전혀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풍신수길이 승려에게 설명하라고 명령했습니다.
승려는 무릉도원 이야기를 먼저 하고 조선의 왕자였던 안평대군의 꿈 이야기를 조선 최고의 화원인 안견이 그렸다고 말했습니다.
옆에 있던 귀족이 그림의 뜻하는 세상이 뭐냐고 다그치자,

승려는 전쟁과 약탈이 없고, 평범한 사람들이 주인공이 되어 공생공영하는 세상이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풍신수길을 비롯한 장군들은 무섭고 위험한 그림이라며 경악합니다.


일본은 봉건국가로 영주와 같은 귀족과 사무라이, 농노로 계급이 분화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이 그림이 일본 백성들에게 알려진다면 기존의 질서가 붕괴하고 영주나 장군의 권위는 위협받을 수 있습니다.

조선에서 경전으로 추앙받는 맹자의 책이 일본에서는 금서가 된 것도 이런 이유입니다.


풍신수길이 명령합니다.


“우리에게는 독과 같은 그림이니 당장 불태워 버리고 싶지만, 조선의 보물이니 그러진 않겠다.

이 그림을 가져온 장군에게 돌려주고 다시는 세상에 나오지 못하도록 하라.”   


이후 일본에서도 몽유도원도를 본 사람은 없답니다.   


묵묵히 듣고 있던 예조판서가 한숨을 쉬며 말한다.  

   

“조선에서 훔쳐 간 도자기 기술로 일본이 부강해지면 또다시 조선을 넘볼 텐데 참으로 걱정이오.

그간 일본의 한 행동으로 보면 언젠가는 다시 조선을 침략할 것이오.”   

  

별제가 말한다.   

  

“이수영 화원 이야기의 핵심은 몽유도원도를 십장생도의 근본으로 삼자는 것입니다.

나도 동의하오. 안평대군이나 조광조 선생은 이미 복권되었고 사당을 지어 기리고 있으니 정치적 문제도 없습니다.”     


“몽유도원도는 기암괴석과 복숭아나무를 중심으로 그렸고 사람이나 학이나 사슴, 거북이 같은 동물도 그리지 않았다고 들었습니다.


십장생도에는 동물을 비롯한 소나무와 대나무, 영지 따위를 그려 넣어야 하는데 어떻게 결합해야 할지 막막합니다.”  

   

“겸재 정선 선생에게 여쭈어보면 어떻겠습니까? 겸재 선생은 진경산수화를 창시한 조선 최고의 선비 화가가 아닙니까?

그분이라면 뭔가 답을 알고 있지 않겠습니까?”  

   

“조만간 찾아뵙고 의견을 구합시다.”(계속) 


    

(참고1) 세화(歲畫)-“세화는 세시에 미리 화사(畵師)로 하여금 각기 화초, 인물, 누각을 그리게 하고, 그림을 아는 재상에게 명하여 그 우열을 상하 등급으로 매기게 하여 부록(付錄)하고, 그 그림은 골라서 왕실에서 사용하고 나머지는 재상과 신하들에게 하사한다.”고 하였다. [중종실록(中宗實錄), 5년 1510]  

   

“도화서(圖畵署)에서 수성(壽星), 선녀(仙女)와 직일신장(直日神將)의 그림을 그려 임금에게 드리고, 또 서로 선물하는 것을 이름하여 세화(歲畵)라 한다. 그것으로 송축하는 뜻을 나타낸다.”-조선 후기 홍석모(洪錫謨)가 지은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

     

세화(歲畵)는 조선 시대 내내 행했던 국가사업이었다. 


조선의 헌법인 경국대전에는 세화에 대해 명시되어 있다. 


‘도화서 화원 20여명은 1인당 20점, 자비대령화원 10여 명은 1인당 30점을 12월 26일까지 그려야 한다.’


지방 화원까지 합하면 1년에 1,000여 점을 창작했다.

흉년이나 전쟁, 왕이 죽은 해에는 그리지 않았다. 일부 대신들은 세화 제작에 너무 많은 돈이 든다며 축소하자는 상소를 올릴 정도로 많은 예산이 들어갔다. 

조선 500여 년 동안 최소 30만 점 이상의 세화를 창작하여 관료들에게 뿌렸다. 

내용은 성리학적 내용과 이에 따른 태평성대이다. 

국가에서 관료에게 그림을 하사하자 관료들은 더 낮은 관직자에게 그림을 구매해 하사했다. 민간에서도 지역유지들이 그림을 구매해 백성들에게 나눠주었다. 친분있는 사람끼리 그림을 선물하고 받았다.  

매년 새해 조선 팔도에는 수 만점의 그림이 유통되었다.

조선은 그림으로 정치를 한, 그림의 나라였다.    

 

(참고2) 계병(契屛)-여러 사람이 돈을 모아 제작한 풍 그림.     


(참고3) 서화사, 지전-글씨와 그림을 사고파는 상점이다. 서화뿐만 아니라 미술용품, 종이와 먹, 붓 따위의 문방구를 제작, 수입 판매했다. 이를 운영하는 화상들은 글씨와 그림의 감식과 비평, 복원 따위의 역할까지 겸임했다. 

서화사는 고급 화랑이고, 지전은 저렴한 서화를 취급했다. 조선 후기 팔도에 수천 개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참고4) 별제-종6품으로 도화서 수장을 일컫는다. 초기에는 도화서 상급기관인 예조판서가 겸임했으나 이후 도화서 내부 출신이 맡았다. 별제는 미술교수 역할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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