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골프장이야기 1 ]
이 내용은 [한국의골프장이야기] 책자에 수록된 것입니다.
책자 중 <안양CC> 내용을 전재합니다. 책자의 화려한 사진들이, 브런치에서는 잘 표현이 안되는 점이 아쉽습니다. [한국의골프장이야기 - 둘째권] 작업을 이 브런치 공간에 연재하려 하며, 시험적으로 안양CC 편을 올립니다. 책자에 수록된 내용은 이보다 좀더 보완수정을 하였기에 내용이 약간 다를 수 있습니다.
“한국의 골퍼에는 두 가지 부류가 있다……안양CC에서 쳐 본 사람과 못 쳐본 사람.”
안양컨트리클럽 회원들이 이런 차별적인 이야기를 하지는 않았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아마도 이곳에서 라운드 해 본 이들이 그럴 기회를 얻지 못한 이들 앞에서 자랑 삼아 했음직한 이 말은 안양CC가 우리나라 골퍼들의 마음에서 차지해온 위상과 의미를 짐작하게 합니다.
요즘 들어 안양CC보다 더 폐쇄적으로 운영되는 극소수 회원 전용 골프클럽도 생겼고, ‘삼성생명’의 보험 영업 행사로 안양CC에 초대 받는 수도 있으니 신비감이 조금 덜한 감도 있지만, 안양CC는 여전히 한국의 골퍼들에게 각별한 의미를 갖는 ‘한국 최고 명문 클럽’입니다.
국내외 골프코스들의 순위를 매기는 (방송, 잡지, 인터넷) 기관들은 거의 매년 빠짐없이 안양CC를 한국 최상위 골프장 가운데 하나로 꼽습니다. 2019년 ‘아시아 100대 골프코스 심사위원회’는 최근 안양CC를 한국 1위, 아시아 2위의 골프코스로 선정 했으며, ‘골프다이제스트’가 선정한 ‘2019~2020 대한민국 50대 코스’에서 안양CC는 국내 5위로 꼽혔습니다.
안양CC 스스로 이런 평가에 관심을 갖는지는 모르겠으나, 어느 평가기관의 심사에서나 안양CC를 최상위권 자리에 놓는 것은 불문율 같아 보입니다. 어떤 해에는 제주의 <클럽나인브리지>와 순위가 뒤바뀌기도 하고 최근 몇 해엔 남해 <사우스케이프오너스클럽>의 경치를 높이 사거나 <웰링턴CC>가 약진하고 <휘슬링락CC>가 오르내리기도 하지만, 안양CC는 늘 변함없이 높은 자리에 있습니다.
가치에 대한 평판이 오랫동안 높게 지속되는 골프장을 ‘명문클럽’이라 부른다 할진대, 안양CC가 우리나라 으뜸의 명문인 이유는 굳이 랭킹 평가 기관의 발표 에 기대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한국 골프장의 ‘살아 있는 역사 문화 유적’
잘 알려진 대로 안양CC는, 삼성그룹을 일군 고 이병철 회장이 “일본과 서구의 명문 클럽에 손색없는 골프장을 만들겠다”고 뜻을 세워 1968년에 문을 연 골프장입니다.
한때 ‘안양베네스트’라고 하여 삼성그룹 소유의 다른 몇 개 골프장들과 형제 이름을 갖기도 했으나 2013년 <안양컨트리클럽>으로 돌아왔습니다. 삼성 소유 골프장 가운데서도 다른 골프장들과는 격이 다르다는 뜻이겠습니다.
이 안양CC가 우리나라 골프 역사의 여러 의미 있는 발전적 사건들을 만들어 온 ‘살아있는 골프 문화 유적’이라는 것을 부인하는 이들은 거의 없습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골프장은 일제 강점기 서울 효창공원 안에 운영되었던 9홀 규모의 <경성구락부>라 알려져 있고, 지금의 어린이 대공원 자리에 1930년 건설되었던 <군자리코스>가 최초의 18홀 정규코스(파69, 6,045야드)였으며, 경기도 고양시에 있는 <서울한양CC>가 그 맥을 이었다고 하나, 엄밀하게 보아 국제적인 기준을 제대로 적용하여 만든 골프장은 안양CC가 나라 안에서 처음이었다고 합니다.
고 이병철 회장의 나무, 자연, 골프 사랑
안양CC 설립자인 고 이병철 회장은 골프를 무척 좋아했음은 물론 아름다운 조경에 대한 안목과 의욕이 남달랐다고 알려집니다. 또한 무슨 일을 하든 그 일을 가장 잘할 수 있는 인재를 키우는 데 인색하지 않았고 스스로 사회에 보탬이 되고자 하는 소명의식도 분명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꽃과 나무, 잔디 등 자연에 대한 사랑이 각별했던 듯합니다.
땅이 좁고 산이 많은 우리나라 형편에서 골프장을 만들 수 있는 곳은 거개가 산중이기 마련이므로, 자연 생태를 해치지 않으면서 골프코스를 조성하기는 사실상 어렵습니다. 그러니 “자연을 사랑하지 않는 이는 골프장을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역설적인 말이 소중하게 느껴질 때가 많습니다. 골프장을 짓는 것이 과연 불가피한 것인지의 여부는 접어두고라도, 생태의 보전을 감안하지 않고 무신경하게 땅을 깎아낸 모습의 골프장에서 라운드 한다는 것은, 한편으로 마음 찜찜한 놀이인 것이 사실이겠습니다.
그런 가운데 안양CC는 원래 평지였던 땅을 돋우고 마름하여 앉힌 골프장이기에 그런 불편함이 덜하거니와, 이 골프장에 극진히 모셔진 꽃과 나무와 잔디의 자연 조화를 보면 마음에 위안이 되기도 합니다.
안양CC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유명한 명문 골프장일 뿐 아니라, ‘가장 진귀한 수목이 생장하는 생태 정원’으로도 알려집니다, 그에 더하여 고 이병철 회장은 안양CC 안에 ‘잔디연구소’를 만들어 우리나라 기후와 토양에 맞는 잔디를 개발하도록 독려했다 합니다.
한국 골프장 잔디들의 조상 -‘안양중지’
한국의 들에서 자생하는 잔디인 ‘들잔디(야지)’는 잎이 넓고 여름에 강하지만 추위에 약해서 가을이면 일찍 생장을 멈추고 누렇게 변하는 반면, 켄터키블루그래스 종 같은 한지형(추운 지방이 고향인) 양잔디는 잎이 가늘고 추울 때에도 비교적 녹색을 지키지만 한여름 더위를 이기지 못하고 녹아 내립니다. 버뮤다그래스 종 등의 난지형(더운 지방이 고향인) 양잔디는 추위에 약해서 우리나라의 엄혹한 겨울 추위를 견디지 못하지요.
골프장 잔디는 짧게 깎을수록, 잎이 얇을수록 좋다고 합니다. 그럴수록 잔디에 놓인 공을 골프채로 내리칠 때 깨끗한 접촉이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양잔디는 잎이 얇고 짧게 깎을 수 있으며, 일본 골프장에서 많이 쓰이는 ‘고라이 잔디’도 잎이 가늘지만 이 모두 사계절이 뚜렷한 우리나라 기후에 적합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 ‘들잔디’ 가운데 잎 넓이가 비교적 얇은 것들을 골라 낸 품종이 ‘잎 넓이가 중간 정도’라는 뜻의 ‘중지’이며, 특별히 안양CC 잔디연구소에서 선별해 보급한 질 좋은 품종이 ‘안양중지’입니다. 이 잔디는 들잔디보다 직립성이 강하고 밀도를 높일 수 있어서 골프공을 잘 받쳐주며, 잔디 전염병에 대한 저항성도 강합니다.
또한 이 안양중지는 가을이면 차갈색 또는 자색의 단풍이 듭니다. 안양중지를 뒤따라 중지 품종들이 이후에 몇 가지 나와 보급되었는데, 단풍이 드는 것을 ‘오리지널 안양중지’로 봅니다.
그러니 이 ‘안양중지’가 우리나라 많은 골프장들 잔디의 조상 격입니다. 우리가 흔히 ‘한국잔디’, ‘조선잔디’라고 부르며 우리나라 수많은 골프장 페어웨이에 퍼져 있는 품종이 사실은 ‘안양중지’의 직계 자손이거나 방계 후손들인 셈입니다.
한국 회원제 골프장들의 ‘거울’이자, '골프장 인재 사관학교'
골프장 경영과 인재 배출 면에서도 안양CC를 빼고 우리나라 골프 역사를 말하기 어렵습니다.
이 골프장 설립 당시의 삼성그룹은 제일제당을 중심으로 소비자를 직접 만나는 소비재가 중심 사업이었고 신세계백화점, 신라호텔 등의 접객 서비스업에서도 오랫동안 최고의 자리에 있었는데, 그런 사업을 통해서 체득한 고객 섬김의 자세, 그리고 브랜드 관리와 경영의 체계적 노하우가 골프장 운영에도 적용되었던 듯합니다.
이곳에서 일하면서 이러한 경영 감성과 노하우를 몸에 익힌 사람(이른바 ‘안양출신’)들이 이후 수많은 골프장의 경영자로 발탁되면서 안양CC의 관리, 운영 비법이 한국의 많은 골프장으로 전파되었던 것이니, 지금도 안양CC는 ‘한국의 골프장 인재 사관학교’로 불리기도 합니다.
또한 안양CC는 국내의 모든 회원제 골프장들의 귀감 또는 넘어야 할 벽이기도 했습니다.
가평베네스트, 동래베네스트 등 ‘삼성 계열’ 골프장들이 당연히 안양CC를 거울삼아 운영되고 있음은 물론이고, 다른 대기업 운영 골프장들 또는 ‘프리미엄 프라이빗 클럽’을 지향하는 모든 골프장들이 저마다 성격과 추구하는 길은 다를지라도, ‘안양CC 처럼’ 또는 ‘안양CC 이상’이라는 보이지 않는 기준을 설정하여 노력하고 있음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살구꽃 피는 이른 봄에 1번 홀 티잉 구역에 설 때, 벚꽃 날릴 무렵 2번 홀 페어웨이를 걸을 때, 연꽃 피는 여름 6번 홀 연꽃 다리 길을 건널 때……
이곳은 코스 조경이 아름답기로 유명한 곳이지만, 특별히 더 아름답다고 칭송 받는 장소는 계절에 따라 다릅니다.
장소마다‘황금비율’로 연출된 조경
아름다움은 상대적인 것이라서 골퍼 개인의 경험과 취향에 따라 느낌이 다르겠으나 이곳은 정원 조경의 정밀한 설계로 아름다움이 연출된 곳이어서, 플레이 하는 골퍼는 누구나 대개 비슷한 곳에서 비슷한 시간에 설계자와 조경 연출자의 의도에 감응하게 됩니다.
어느 여름날 연꽃 핀 아침에 라운드를 한다면, 6번 홀 첼로 허리 모양 곡선 연못 가득한 연잎들이 뜬구름처럼 흐르는 가운데, 꽃인지 사람인지 모를 분홍 꽃 얼굴들과 인사하며 ‘연꽃다리’를 건네게 될 것입니다. 일렁이는 바람에 서늘히 흔들리는 꽃과 잎들에서 현악기의 낮은 음률을 느끼게 될 지도 모릅니다. 연못을 황금비율로 가르는 곡선으로 난 나무다리 길을 건너는 눈길 발길을, 연잎마다 꽃마다 담긴 이슬방울들이 자꾸 붙잡을 것입니다.
예쁜 그림책 같은 다차원의 정원
모든 홀의 조경은 3분할 또는 4분할로 안배되어 플레이어가 걷고 머무는 곳마다의 시선을 계산한 경치가 연출되어 있는 듯합니다. 진귀하고 특색 있는 나무와 꽃들은 눈이 머무는 곳마다에 시각의 황금비율을 마감하며 서있습니다.
한 홀 한 홀 걸어갈 때마다 고아한 미장본 그림책을 한 페이지씩 넘기는 듯한데, 저 혼자 과민한 호들갑으로 그렇게 느끼는 것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한 3차원적 안배 위에, 계절과 시간이 흐르는 자연 섭리에 따라 꽃이 피고 나뭇잎이 변하니, 공간 위에 시간이 들고나는 다차원적 풍광으로 느껴집니다.
그러니 이 코스는 당연히 걸어가며 곳곳의 아름다움을 천천히 즐겨야 합니다.
이곳에서는 두 명의 캐디가 골프백 만을 싣는 반자동 카트를 밀고 걸으며 경기를 보조하고, 사람이 타는 카트는 없으므로 플레이어는 전 홀을 걸어서 라운드 합니다.
"땅 값보다 나무 값이 더 비쌀 것이다"
클럽하우스에 들어설 때부터 한눈에 봐도 신령스러운 느낌의 아름드리 백매화 고목이 손님을 맞는데, 이곳만큼 진귀한 나무들을 한 곳에 많이 모셔놓은 골프장은 우리나라에는 따로 없는 것이 분명하고 세계적으로도 그렇지 않을까 추측해 봅니다.
1번 홀의 살구나무 고목들, 10번 홀의 반송 군락, 11번 홀의 노송들, 13번 홀의 분재처럼 아기자기한 반송들, 14번 홀의 장려한 목련, 15번, 17번 홀의 메타세과이어 나무들, 클럽하우스 앞의 커다란 다박송 들……
이 밖에도 다른 곳에 있으면 단박에 눈에 띌 진귀한 나무들이 코스의 이곳 저곳에서 눈에 드러나지 않게 빛나고 있습니다.
값을 따지는 속된 습성이 민망하기는 하나, 이곳에 모셔진 나무 값을 합하면 수천억 원 또는 그 이상의 가치일 거라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계절마다 다른 꽃이 피고 잎이 물든다
이 나무들이 계절마다 꽃을 피웁니다. 살구꽃, 벚꽃, 홍매화, 백매화, 복사꽃, 해당화, 목련 꽃들이 차례로 피어날 때 이곳에서 라운드 할 수 있는 이는 드물게 선택 받은 사람입니다.
나무 말고도 땅에서 올라온 초본들도 질세라 꽃을 피웁니다. 꽃밭에는 아네모네, 수선화, 실개천에는 꽃범의 꼬리 들꽃이 골퍼의 발길을 불러 세우고, 연꽃, 능소화 들이 차례로 만발하다가 가을에는 낙우송, 은행나무, 단풍나무들이 꽃보다 더 현란하게 물듭니다.
고 이병철 회장은 생전에 나무를 지극히 사랑하였으며 그 가운데서도 은행나무를 특히 좋아했다고 하는데 17번 파3홀 티잉 그라운드 옆에는 고인의 홀인원 기념식수 은행나무가 서 있습니다. 저와 함께 라운드 했던 ‘삼성 출신’ 사람들 가운데는 그 홀에 이르면 말없이 그 나무에 고개 숙여 인사하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저는 이 17번 홀에 배롱나무 꽃이 필 때 모습이 넋을 잃을만큼 좋던데 말입니다.
생태적, 미적 완결성의 '무한 추구'
골프장을 짓는 것은 어쨌든 자연 상태의 땅을 헤집어 사람의 놀이터로 만드는 일이겠습니다.
그 죗값을 덜기 위해서인지 골프코스를 만드는 이들은 ‘재 자연화’, 즉 ‘자연을 다시 조성한다’는 생각으로 접근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아름다울지언정 사람의 눈에 그런 것이지 자연 그대로인 것만이야 하겠습니까.
안양CC를 만든 고 이병철 회장은 ‘원래의 자연보다 더 아름다운 정원으로서의 질서’를 부여하는 쪽으로 ‘재 자연화’의 철학을 세웠던 듯합니다. 사람이 공을 치고 노는 공간이되 그 자체의 생태적, 미적 완결성에 있어서 극한에 이르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9번 홀 그린 옆에는 묵색 빗돌에 ‘무한추구 無限追球’ 라는 이 회장의 생전 휘호가 새겨져 있습니다. ‘구’ 글자가 ‘구할 구求’가 아니라 ‘공 구 球’인 것이 흥미로운데 골프장에 있어서도 이렇듯 한계 없는 완결성을 추구했던 것으로 읽힙니다.
로버트 트렌트 존스 주니어의 도전적 코스 리뉴얼
1968년 처음 문을 열 때에는 미야자와 조헤이라는 일본 사람(뒤에 통도 파인 이스트, 88CC등을 설계함)이 설계하여 ‘투 그린’이었고 일본 코스 느낌이 강했는데, 1997년 세계적인 골프코스 설계자 로버트 트렌트 존스 주니어(Robert Trent Jones Jr.)에게 맡겨 전면적인 코스 개선 공사를 했고, 2013년에 클럽하우스를 새로 짓고 일부 코스를 보완하는 부분 개선 공사를 하여 도전적인 코스로 거듭 변모했습니다.
삼성 그룹이 직계 3대에 이어졌으니 소유주의 변화에 따라 코스의 취향도 변화했다고 보는 이도 많습니다. 다만 그런 변화 속에서도 고 이병철 회장의 치밀한 조경 연출의 맥락과 정수는 이어진 것으로 보입니다.
(골프코스에서 ‘도전적’이란 플레이어가 모험적인 시도를 하도록 ‘코스가 플레이어에게 도전하는’ 성격이 강한 것을 말합니다. 코스가 플레이어에게, 플레이어가 코스에게 도전하는 상호관계를 형성해 놓은 것입니다. ‘전략적’이란 ‘생각하면서 영리하게 치도록’ 유도하는 유형입니다. 자신의 실력에 따라 공략법을 선택하도록 안배된 것을 말하지요 좋은 골프코스는 대개 도전적인 면과 전략적인 면이 동전의 양면처럼 적절하게 안배되어 있습니다,
또한 ‘투 그린’이란 일본에서 비롯된 것으로 각 홀의 ‘주 그린 [Main Green]’ 옆에 ‘보조 그린 [Sub Green]’을 설치하여 번갈아 사용하는 것을 말합니다. 공식 용어는 아니지만 편의상 ‘원 그린’, ‘투 그린’으로 부릅니다. 투 그린은 관리하기에는 편하지만 그린 주변 플레이에 불공정한 우연이 개입할 여지가 많아서 국제 규격의 골프장에서 적용되는 예는 극히 드물다 합니다. 우리나라에 초창기 골프장들은 일본의 영향을 받다 거의 ‘투 그린’이었으나 1990년대 중반 이후에 문을 연 골프장들의 대다수는 ‘원 그린’으로 조성되고 있습니다)
‘호암 풍’, 서구풍, 동양풍의 완벽한 조화
3대에 이른 코스의 변화는 단순히 취향에 따른 것이라기보다는 세계적 흐름에 발맞춘 ‘진화’라고 보는 게 맞겠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수목 정원 조경은 선대(先代)의 호암 湖巖 이병철 회장이 이룬 조형적 미감을 최대한 살리되, 전략적인 플레이 루트와 그린 공략에 있어서는 로버트 트렌트 존스 주니어의 도전적인 서구풍을 적극 도입하는 한편, 페어웨이를 걷는 느낌은 일본식 정원형 코스의 평안함을 지켜서 조화를 이룬 듯합니다. 이런 이질적인 요소들의 조합이 완벽하게 이루어질 수 있음을, 실제로 경험하기 전에 짐작한 이는 드물었을 것입니다.
이곳의 회원들은 연배가 높은 분들이 많은 편이지만 골프코스는 전장이 짧지 않고 세컨샷 공략과 그린 주변 플레이가 쉽지 않습니다. 거의 모든 그린 앞에 깊고 큰 벙커들이 입을 벌리고 있는데 벙커는 대개 한 쪽 편에만 있어서 다른 방향으로 안전하게 공략할 수 있는 길을 열어두었습니다. 도전을 유도하면서도 ‘플랜B'의 전략적 선택 또한 가능하게 안배한 것이지요.
18홀 총 연장 6,951야드의 코스로 길지 않은 듯하나 플레이 해 보면 블루 티, 레귤러 티에서 느껴지는 길이가 수치보다 길게 느껴집니다. 공을 높이 띄워서 치지 않으면 장애물을 피해 그린에 올리기 쉽지 않습니다. 그린은 당연히 빠르게 관리되는데다가 그린 면이 크고 변화 굴곡도 많은 편이라서 예민한 어프로치와 퍼팅을 해야 합니다.
세상에서 우드 클럽 치기 가장 좋은 코스
그래서 코스의 설계 의도를 생각하며 플레이 하지 않으면 다른 곳보다 서너 타 더 친 스코어카드를 받게 되는 경우가 많다고 하는데, 잔디 관리 상태가 워낙 융단같이 곱고 좋아서 페어웨이에서 공을 치기에 더없이 좋은 점이 그런 핸디캡을 상쇄합니다.
짧고 촘촘하게 관리된 안양중지 잔디는 언제나 공을 살짝 들어 예쁘게 떠받치고 있습니다. ‘숏티’를 짧게 꽂아 올려놓은 듯한 느낌으로 아마도 ‘세상에서 우드 클럽 치기 가장 좋은 코스’일 것이라 생각합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안양CC가 골프코스로서 가장 매력적인 점은 ‘예민하면서도 편안하다’는 이중성입니다. 얼마 전 우리나라에서 가장 유명한 골프코스 설계가를 만나 말씀 듣는 중에 “국내 골프코스 중 어디가 마음에 듭니까” 하고 물었더니 “안양CC는 꼭 내가 설계한 느낌이 들어요. 꼭 필요한 곳에 장애물이 있고 골퍼의 마음에 평화를 줍니다. 난도가 충분히 있는데도 편안한 느낌이 듭니다”라고 하더군요.
두 차례 코스를 수정하면서 공략 루트에는 전략성을 부여하고 그린 주변으로 갈수록 도전적이고 예민하도록 안배하는 한편, 아름다움과 평화로움을 지킨 조화가 돋보인다고 생각합니다.
14개 클럽을 모두 사용하도록 안배
그런 가운데 연만하신 분들은 옛날에 비해 어려워졌다고 하고 힘 좋은 이들은 생각보다 전장이 길지 않다는 이야기도 하지만, 코스가 짧다고 느끼면 뒤쪽 ‘백티’로 가서 치면 전혀 다른 코스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물론 레귤러 티도 보통 이상 실력의 아마추어 골퍼에게 결코 짧지 않다고 봅니다)
로버트 트렌트 존스 주니어가 설계한 코스는 대개 모든 수준의 골퍼들이 골퍼 자신의 선택에 따라 ‘샷 밸류’를 극대화하며 칠 수 있도록 안배하는 것이 특징이라는데, 이곳도 스스로의 선택에 따라 14개 클럽을 모두 사용하도록 설계된 코스라 평가됩니다.
회원은 있지만 회원권은 없다
이곳은 국내에서 가장 폐쇄적인 회원제 클럽 가운데 하나입니다. 회원 또는 회원 동반자 아니면 절대 라운드 할 수 없는 곳으로 유명했는데 삼성생명 우수 고객들을 초청하는 행사가 가끔 여기서 열리기도 해서 ‘회원 동반’ 아니어도 라운드 기회가 생기기도 합니다. 또한 삼성그룹 소유 <가평베네스트GC> 회원들에게 일부 주중 예약 자격이 주어지기도 하는 것으로 압니다
그런 면에서는 신세계 그룹의 <트리니티클럽>이 가장 폐쇄적인 클럽이라고 하는 게 맞을 듯하지만, 더 폐쇄적인 것이 곧 더 나은 골프장임을 말하는 것은 물론 아니겠습니다.
돈이 있다고 해서 회원 자격을 얻을 수 없는 클럽의 깐깐한 심사 조건도 우리나라에서는 이곳에서 비롯되었다고 알려집니다. 왕년의 톱스타 연예인이 회원 신청을 했는데 심사에서 탈락했다는 유명한 이야기도 소문으로 떠돌았던 적이 있지요.
엄밀하게 말하자면 안양CC는 일반적인 의미의 ‘회원제 클럽’과는 다릅니다. 매년 일정액의 이용회비를 내는 이에게만 회원 자격이 주어지는 것이며 그 금액은 기간 경과 뒤에 소멸됩니다. 사고 팔 수 있는 회원권을 발행하는 것도 아니고 회원 자격은 오로지 수천만 원의 ‘소멸성 연회비’를 냄으로써 유지되는 것이지요. 여타 명문 클럽이 보증금 형태의 회원권을 판매하면서 이러한 소멸성 연회원을 동시에 유치하고 있는 것과는 다릅니다.
회원이 몇 명인지는 공식적으로 밝히지는 않지만 ‘극소수’인 것으로 알려집니다.
단아한 클럽하우스와 은근한 서비스
안양CC의 서비스 철학은 ‘만인중 萬人中의 1인, 1인을 위한 만인萬人’이라 합니다.
이 말에서 ‘황제 대접’을 생각하기 쉽지만 ‘되도록 표시 안 나게 세심한 서비스’라고 하는 것이 맞을 듯합니다. 고 이병철 회장의 자서전 <호암자전>에는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안양골프장은 시설이 완비된 국내에서 가장 아름답고 쾌적한 골프장으로서, 골퍼들의 모임에 알맞은 질서 있고, 예절 바른 장소가 되도록 그 운영에 힘쓰고 있다.”
‘국내에서 가장 아름답고’라는 말과 ‘예절 바른’이라는 말이 눈에 들어옵니다. 이곳 현관에 도착하면 내장객 모두에게 발렛파킹 서비스가 제공됩니다. 예전에는 옷 가방(보스톤백)도 라커룸까지 직원이 들어다 주기도 했는데 요즘에는 라운드 끝나고 나올 때만 직원이 라커룸에서 받아 차에 미리 실어줍니다. 옷 가방을 옮겨주는 서비스는 이곳에서 시작되어 다른 명문 지향 골프장들에도 퍼진 것으로 아는데 오히려 안양CC가 가방을 라커룸까지 손님이 직접 들고 가도록 바꾼 것입니다. 운동하러 온 사람은 가방을 직접 들고 가는 것이 옳다고 여기는 것이겠습니다. 운동이 끝나고 나서는 클럽하우스에서 모임이 있기도 하니 차에 대신 실어 주는 서비스가 유효하다고 본 듯합니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클럽하우스에서 지켜야 할 격식도 다소 너그러워졌습니다. 클럽하우스에서 자켓 착용을 해야 하던 에티켓 조항이 ‘골퍼의 품위가 느껴지는 자율적 복장’으로 변하기도 했습니다. 노출이 심한 옷을 입은 여자골퍼는 플레이 할 수 없을만큼 보수적이었으나 요즘은 노출이 적은 골프웨어를 찾기 힘든 추세이니 어느 정도 융통성이 적용되는 것으로 보입니다 .
‘만인 중의 일인’ 이랄 만한 사람일수록 겉치레보다 내면을 중히 여길 터입니다. 드러나게 극진한 형식보다는 올바른 예절을 갖춘 서비스를 지향하는 것이라 생각해 봅니다.
클럽하우스는 2013년 새로 지은 것입니다.
이전보다 규모가 많이 커졌는데도 단아한 느낌을 지향하고 있는 것은 옛 클럽하우스의 소박함과 같은 맥락으로 보입니다.
우리나라 골프장 클럽하우스들 가운데는 기능적인 필요성을 과하게 넘어선 치장으로 부자 취향을 드러낸 건축물이 적지 않고 ‘사람의 공간’은 오히려 왜소해 보이는 것들도 눈에 많이 띄지요. 사람을 존중하여 받들지 않는 느낌을 주는 클럽하우스는 그 클럽 소유주가 존중 받을 만한 생각의 소유자가 아님을 드러내는 것 아닐까 싶습니다.
안양CC의 클럽하우스는 스스로 간소함을 따름으로써 귀해 보입니다.
저의 눈에는, 예전의 더 소박했던 클럽하우스가 더 사랑스러운 기억의 모습으로 남아있으나, 지금 것에서도 ‘딱 그만큼까지’라고 할 규모감과 절제미를 느끼게 됩니다.
꽃 이야기, 나무 이야기
안양CC는 우리나라에서 진귀한 나무들이 가장 많은 수목 정원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고, 정밀한 꽃의 천국이기도 하겠습니다. 나무들 가운데 귀하지 않은 것을 찾기 어렵습니다. 키 작은 반송 무리들이 이렇듯 풍성한 곡선의 대오로 무리 지은 모습은 이곳 10번 홀 티잉 구역에서 말고는 보기 어려울 것입니다. 클럽하우스 앞의 백매화 고목, 1번 홀의 검은 고목 살구나무, 연습그린 옆의 다박송들, 코스 곳곳의 낙락장송과 메타세콰이어, 은행나무, 단풍나무 등은 물질적으로나 심미적으로나 가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진귀해 보입니다.
어찌 보면 꽃과 나무들이 이곳의 주인인 것 같기도 합니다. 실제로 홀마다 나무와 꽃들의 이름이 붙어 있습니다. 1번 홀부터 아웃코스로 살구나무, 벚나무, 밤나무, 매실나무, 자두, 연꽃, 조팝나무, 모과나무, 잣나무 들이 각 홀을 대표하며, 10번 홀부터 인코스로는 명자나무, 낙락장송, 산딸나무, 장미, 목련, 메타세콰이어, 은행나무, 라일락, 단풍나무 들로 이름 지어져 있습니다.
이른 봄에 17번 홀 그린으로 가는 길목 꽃밭에 아네모네와 수선화, 4번 홀의 매화와 복사꽃, 1번 홀의 살구꽃이 피기 시작하여, 2번 홀의 벚꽃, 14번 홀의 목련, 10번 홀의 화해당이 화려하게 피었다가 허무하게 떨어지며, 13번 홀의 장미, 17번 홀의 배롱나무 꽃, 6번 홀의 연꽃 등이 피면서 능소화, 싸리꽃, 꽃범의꼬리 등 ‘풀꽃’, ‘나무 꽃’, ‘나무 기댄 꽃’들이 흐드러집니다. 나무와 꽃에 대한 감상은 글로 표현하기 어렵습니다.
어느 홀이 가장 아름다운가
모든 홀이 저마다 다른 모습으로 아름다움을 다툽니다. 꽃이 피고 나뭇잎이 물드는 시기가 다르니 철 따라 가장 아름다운 곳이 다를 수도 있겠습니다. 벚꽃 날리는 2번 홀이 아름다울 때가 있고 메타세콰이어 나뭇잎이 노랗게 물든 15번 홀이 아름다운 계절도 있습니다.
계절에 관계없이 아름다운 조경미를 느낄 수 있는 곳으로 13번 홀을 꼽는 분들이 많습니다. 근경과 원경을 정밀하게 안배한 일본식 정원 조경 기법과 한국적인 자연미, 그리고 골프코스로의 도전적인 아름다움이 지극한 조화로 어울린 곳 아닐까 생각합니다. 산과 물, 나무와 꽃, 사람과 유혹...... 이런 여러 요소들이 은유적으로 응축된 것 같기도 합니다.
저만의 느낌으로는 이 홀 오른편 벙커 너머에 깃대가 꽂혔을 때, 가장 팽팽한 비장미가 완성된다고 봅니다.
11번 홀 노송 숲에 얽힌 야사(野史)
11번 홀은 가장 긴 파4홀로 유일하게 그린 주변에 벙커가 없습니다. 길이가 긴 홀이니 티샷에 힘이 들어가기 쉽고, 자칫하면 ‘슬라이스(공이 오른쪽으로 크게 휘어 나가는 경우)’가 나서 티샷 낙하지점 오른편 노송 숲에 빠지기 쉽습니다. 원래 이곳에는 노송들이 없었다고 합니다. 고 이병철 삼성 회장과 고 정주영 현대 회장이 생전에 함께 라운드 할 때 이 홀에 오면 정주영 회장 티샷 볼이 오른편으로 휘어 나가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때마다 공이 살아 있어서 고 이병철 회장이 이곳에 소나무를 심으라고 했다는 우스개가 있습니다. 물론 사실 여부는 확인되지 않는 이야기입니다.
"308동을 보고 친다"
5번 홀 내리막에서는 건너편 멀리 보이는 308동을 보고 치는 게 좋은 공략법이었는데, 2013년 부분 개선 공사를 하면서 페어웨이와 그린 사이에 정겨운 실개천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지금도 308동 쪽으로 정확하게 치면 최단거리를 남겨놓은 페어웨이에 떨어뜨릴 수 있으나, 물에 빠질 염려도 있어서 그보다 약간 왼쪽으로 치기를 권합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주변 아파트 건물이 보이는 것이 골프장의 경관에는 약간 아쉬움을 주는 점도 있겠으나 아파트 주민들의 입장에서 보면 조망이 참 좋을 것이니 이 또한 안양CC가 쌓는 공덕이겠습니다.
티하우스의 수박스테이크와 13번 홀 그늘집 흑맥주
전반을 끝내고 티하우스에서 간식으로, 계절 과일을 먹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여름에 나오는 ‘수박 스테이크’의 당도가 높기로 유명하고(두껍고 크게 썰어서 스테이크처럼 포크와 나이프로 먹음), 이것이 전국의 유명 명문 골프장으로 퍼져서 ‘수박스테이크’를 내는 곳이 많습니다. 수박이 얼마나 두껍고 자연 당도가 높은가에 따라 ‘명문의 등급’이 갈린다는 호사가들의 이야기도 들립니다. 플레이 중에 시간이 허락한다면 13번 홀 그늘집에서 내는 저온숙성발효 흑맥주도 맛이 깊으니 마셔볼 만합니다. 13번 홀 쯤에서 마시는 맥주야 어느 곳 어느 상표인들 맛이 없겠습니까마는......
안양CC는 우리나라 골프의 문화유적 같은 명문 골프장입니다.
이곳에는 어쩌면 우리나라 역사를 바꾸었을지도 모르는 수많은 사연들이 깃들어 있을 터입니다. 서양 명문 골프장 가운데는 자신들의 어제와 오늘을 자세히 기록해서 두꺼운 책으로 남기는 곳도 적지 않습니다. 어느 사회에서나 골프장은 한 사회를 이끄는 주역들의 문화 공간이기도 하기에, 골프장에 대한 기록은 한 나라의 역사와 문화의 흐름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이 기록은 저 스스로의 경험과 탐사로 적었으므로 겉핥기에 지나지 않을 수 있겠습니다만, 세상의 역사에서 한 시대를 이끄는 나라와 문화의 주인은 그 이전 세대의 꼼꼼한 기록을 물려받은 이들이라는 믿음으로, ‘한국의 골프장 이야기’들을 찾아내는 첫 머리에 안양CC를 살펴 적어내며 이 책을 시작합니다.
('한국의골프장이야기' 책에 나오는 24개 골프장 중 알파벳 순서 목차의 첫번째 골프장입니다)
글과 사진 / 류석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