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골프장의발견 28]
[한국골프장의발견] ‘시즌2’ 연재 - '가평베네스트 골프클럽' 편 초안입니다.
그 너머엔 하늘뿐입니다.
“이 자리에 서면, 가슴이 아직 살아있는 걸 느껴”
먼 산맥의 흐린 겹능선에서 불어온 바람을 맞으며 선배가 말했습니다.
명민한 머리로 꽤 큰 사업을 키워 온 사람입니다.
피나는 노력으로 골프를 몸에 익혀 ‘언더파’까지 쳤었다 합니다.
“골프도 일처럼 머리 쓰고 몸 쓰는 걸로 알았지...”
저는 알아듣지 못해서 입을 다물었습니다.
그는 혼잣말했습니다.
“몇 년 전에 이 홀에서 느꼈어...... 가슴을 움직이는 게임이라고.”
가평베네스트는 '몇 타 쳤다'는 기억만 남기기엔 아까운 골프장입니다.
이곳에서 공만 좇다 왔다는 사람도 있는가 하면, 이 골프장 어느 한 홀의 나무 한그루까지 가슴에 담은 사람, 심지어 이 골프장에서 인생의 깨달음을 얻었다 하는 이까지 저는 보았습니다.
파인코스 7번 홀 그린에서 내려다보면 이 골프장이 처음 개발될 때 ‘독수리 둥지(Eagles Nest)’라는 이름이 붙었던 까닭을 짐작하게 됩니다.
1988년 설립된 ‘무진개발’이라는 회사가 1990년 골프장 사업계획을 승인받고 ‘이글스네스트’라는 이름으로 개발하기 시작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히틀러의 별장 이름도 독수리둥지(Kehlsteinhaus = Eagles Nest)였지요. 골프장 개발 초기에 왜 이런 이름을 지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이곳에 서면 독수리 등 위에서 내려 보는듯한 영웅심이 드는 것 같기도 합니다.
무진개발이 개발에 어려움을 겪자 1995년 삼성그룹이 인수하였으며, 2000년 ‘가평베네스트’로 이름을 바꾸고 2000년 9월 파인-메이플코스를 완공하여 임시 개장합니다. 2001년에는 삼성에버랜드가 무진개발을 흡수 합병했고 2004년 3월 클럽하우스를 완공하였으며, 같은 해 9월 버치코스를 열면서 회원제 27홀 골프장으로 정식 개장했습니다.
'베네스트'라는 이름을 짓다
삼성그룹은 골프장 이름에서 ‘독수리(Eagles)’를 날려 보내고 ‘둥지’라는 뜻의 ‘Nest’ 앞에 ‘최고’ 또는 ‘가장 행복한’이라는 뜻의 ‘Best’를 붙여 ‘베네스트(Benest)’라 개명했습니다.
그리고 이 이름을 삼성그룹 소유 회원제 골프장에 함께 적용합니다. 가평베네스트, 안양베네스트, 동래베네스트, 안성베네스트 라는 이름이 붙게 된 것인데 2013년에 ‘안양’은 원래 이름이던 ‘안양컨트리클럽’으로 되돌아갔고 가평, 동래, 안성 3개 골프장만 베네스트 브랜드를 달고 있습니다.
가평베네스트GC(이하 ‘가평베네스트’)는 회원권 거래 가격이 한때 18억 원을 넘겨서 ‘황제 회원권 골프장’이라 불리기도 했습니다. 지금도 이곳은 한국에서 회원권 가치가 가장 높은 골프장으로 손꼽힙니다.
서울에서 가깝지 않은 가평 깊은 산중에 있음에도 이런 가치를 지켜오는 까닭은 복합적입니다. 회원 수가 적다는 희소성, 삼성그룹이 주는 믿음, ‘삼성 서비스’의 수준과 품격, 가평베네스트 정회원에게 안양CC 주중 이용자격을 부여하는 점 등을 들 수 있겠습니다만, 무엇보다 코스 자체의 완성도가 빚어내는 강한 매력이 그런 장점들을 뒷받침합니다.
이 골프장은 잭니클라우스가 손수 설계한 것입니다.
잭 니클라우스는 미국 PGA투어에서 73회 우승(메이저 18승 포함)을 비롯해서 세계 규모 골프대회에서 생애 117회 우승한 ‘살아있는 골프 전설’이지요. 흔히 아놀드 파머, 게리 플레이어, 잭 니클라우스를 동시대를 주름잡은 전설적 ‘3총사 골퍼’라 부르는데, 인기는 아놀드 파머가 더 많았을지 모르나 골프 선수로서 이룬 업적으로는 잭 니클라우스가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골퍼’로 꼽힙니다. 그는 선수 생활 은퇴 후에는 골프 코스 설계에서 뚜렷한 업적을 남기고 있습니다. 골프선수로서 수많은 명코스를 섭렵한 경험을 살려, 그는 자기만의 철학과 취향이 분명한 골프코스를 설계해 옵니다. 지금까지 45개 나라에서 420개 넘는 코스를 설계하거나 재설계하였습니다.
니클라우스 이름을 단 골프코스에는 ‘니클라우스 디자인 팀’이 설계한 것이 있고 잭 니클라우스의 아들이 설계한 코스가 있으며, 잭 니클라우스와 그의 아들이 함께 설계에 관여한 코스, 그리고 잭 니클라우스가 직접 설계하고 서명한 ‘시그니처 코스’가 있습니다.
잭니클라우스 브랜드를 단 골프장이 우리나라에도 여럿 있는데, 잭 니클라우스가 손수 설계한 ‘시그니처 코스’는 이 가평베네스트와 인천의 <잭니클라우스GC>, <베어즈베스트청라GC>, 평창의 <휘닉스CC>의 네 곳입니다.
잭 니클라우스가 손수 설계한 것이 니클라우스 디자인팀이 설계한 것보다 반드시 좋은 코스라 말할 수는 없지만, 이곳은 잭 니클라우스의 설계 철학과 의도가 더 속속들이 반영된 곳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한국의 산중 지형을 니클라우스 식으로 해석
골프가 스코틀랜드의 거친 바닷가의 버려진 땅에서 시작된 이래, 골프장은 되도록이면 쓸모없는 황무지에 만들어져 왔습니다. 가용할 땅이 좁고 산이 많은 한국과 일본에서는 골프장이 주로 산기슭에 조성되어 왔는데, 국토가 일본보다 더 좁은 우리나라는 골프장 들일만한 땅이 훨씬 귀한 형편이라서 골프장 설계가들은 산중 지형을 어떻게 활용해서 코스를 앉힐 것인가를 더 많이 고민해왔지요.
1980년대까지만 해도 산허리를 뭉텅뭉텅 잘라내 계단식으로 평평한 코스를 내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졌으나, 1988년 로버트 트렌트존스 주니어가 설계한 용평CC가 개장하고 1993년 우정힐스CC(페리 오 다이 설계)가 문을 열면서 서구적인 코스 설계가 도입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잭니클라우스는 평창의 '휘닉스CC'와 이 '가평베네스트GC'을 연이어 설계하면서, 한국 산중지형 자연 흐름을 살리면서도 훌륭한 코스가 만들어질 수 있음을 웅변하듯 보여줍니다.
이 골프장을 제대로 즐기며 라운드하려면 골프코스 자체의 섬세한 기술적 변별성도 이해해야 하지만, 이 지역 자연 지형을 잘 살려낸 풍광과 조형의 아름다움도 살펴볼 수 있어야 합니다.
개주산(675m)의 완만한 산기슭에, 파인코스가 가장 높게 자리하고(370m~430m) 메이플코스가 중간 높이(350m~380m), 버치코스가 가장 낮은 곳(290m~360m)에 앉았습니다. 산자락에 낸 코스이면서도 3개 코스 대부분의 홀에서, 티샷이 떨어질 자리는 드넓고 시야는 거칠 것 없이 트여있습니다.
개주산은 알을 품듯 이 골프장을 보듬어 안고 동쪽으로 열려있습니다. 버치코스가 있는 동쪽의 전망이 시원하게 트여 있어서, 남쪽 서리산의 웅장한 등줄기를 우백호 삼아 먼 동쪽 청우산, 대금산으로 이어지는 산맥의 겹능선을 보는 풍광이 장쾌합니다. 이 방향으로는 지형적으로 안개가 자주 끼는데 안개는 이 골프코스까지 올라오지 못하고 산 아래에 짙은 구름으로 깔리니 골프코스는 운해 위에 떠 있게 됩니다.
그 장엄한 구름바다 아래가 현리 읍내입니다.
이 골프코스에는 광활함과 정교함이 공존합니다.
3개 코스 가운데 파인코스와 메이플코스가 먼저 문을 열었습니다. 이 두 개 코스의 연결이 가평 산간의 남성적 기운을 뿜어내는 완결성을 갖고 있었는데, 나중에 여성적인 관능미가 넘치는 버치코스가 덧들어서면서 신화적 상상력과 음양 조화가 빚어내는 현묘함이 꿈틀거리게 됩니다.
멀리 칼봉산(909.5m)에서 대금산(705.8m)과 청우산(617.7m)으로 이어지는 동쪽의 장려한 산맥을 바라보며 내닫기 시작하다가 북쪽의 운악산(934.7m) 봉우리들을 바라보고 돌아서서, 남쪽 서리산(832m)의 공룡 같은 움직임을 왼편에서 느끼며 서쪽 먼 곳의 주금산 쪽으로 날아오르며 마무리됩니다.
이렇듯 가깝고 먼 산들이 만들어내는 남성적 풍광의 중간 어림에 여성미 넘치는 호수를 커다랗게 만들어 하늘까지 담아놓았습니다.
그러니 눈은 호사를 누리는 반면 홀을 공략하기는 까다롭습니다. 3개 코스 중에서 일반 골퍼들에게 가장 어렵게 플레이되는 코스이지요.(코스레이팅 자료를 보면 ‘이븐 파’를 치는 수준의 골퍼들에게도 그런 편입니다)
버치코스는 파4 홀 3개, 파3 홀 3개, 파5 홀 3개로 이루어진 파36 구성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이런 3, 3, 3 구조는 흔치 않은데 파인코스와 메이플코스가 각각 일반적인 구성(파4 홀 4개, 파3 홀 2개, 파5 홀 2개)의 파36으로 조성되었기에 번외 코스로서 특색을 주어 시도한 것으로 보입니다.
파인코스에서는 무언가 신령한 기운이 느껴집니다.
가장 높은 산중턱에 있으며 이곳 산중 지형으로 빚어낼 수 있는 거의 모든 조형 경관을 차례로 보여줍니다. 남쪽 건너편 서리산 전체가 다가오는 듯한 풍광, 바람 부는 언덕에서 먼 산맥과 운해를 바라보는 장관, 하늘로 오르는 계단을 딛듯 그린을 향해 걸어 오르는 느낌, 그리고 웅장한 바위와 기묘한 나무숲을 보는 것 들이지요.
저는 이 파인코스에서 우리나라 산중코스에서 드물게 발현되는 현묘함을 느낍니다. 5번 홀 벼락 맞은 소나무는 동티 맞은 장승을 닮았고 6번 홀 그린은 하늘을 향한 제단을 떠올리게 합니다.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8번 홀 그린 뒤 숲에 숨어서 지켜보는 왕버들나무는 산신령 같은 느낌을 주며, 9번 홀 그린을 향할 때 마주보이는 서리산은 가까이 갈수록 살아 움직이는 듯합니다.
메이플코스, 중용의 아름다움
비교적 짧은 파 5홀로 시작하여 완만한 산기슭을 타넘으며 넓고 평화롭게 펼쳐지는 한편, 진행 방향이 동서남북으로 종횡무진한 가운데 의도적으로 절벽의 끝자락까지 배치한 홀들을 하나하나 공략하다 보면, 이 골프장을 둘러싼 모든 주변 풍광을 눈에 담게 됩니다.
스코어가 잘 나오기도 하니 이 코스를 좋아하는 골퍼들이 많다고 합니다. 버치코스와 파인코스의 개성이 뚜렷한 반면, 메이플코스에서는 그 두 코스의 특징을 어우른 중용의 미덕이 느껴집니다.
이 코스에서는 특히 계절 마다 변화하는 자연의 아름다움이 두드러집니다.
3번 홀 티잉 구역 주변 꽃사과나무, 철쭉, 단풍나무, 5번 홀 분홍 꽃이 피는 모과나무...... 봄에는 새순과 꽃잎이 웅성거리고 가을에는 형형색색의 단풍이 물들어 연두, 연노랑, 분홍, 빨강 등의 스펙트럼으로 펼쳐지는 조화가 눈을 홀립니다.
자연림에 보완 식재한 교목과 관목의 배치가 안양CC와는 또 다른 느낌의 자연을 빚어내는 조경이니 가히 ‘삼성 골프장’ 답다 할까요.
티잉 구역에서 보이는 페어웨이는 드넓어 호방하게 티샷 할 수 있지만, 아이언을 잡고 그린을 향해야 할 자리에서는 깊이 생각하고 상상력을 끌어올려야 합니다. 페어웨이가 넓고 평탄하여 티샷의 변별력이 낮은 홀들이 더러 있다는 평가도 있으나 벙커와 해저드가 정교한 시각 비율로 도발적인 위치에 있어서 플레이에 관여합니다.
또한 그린으로 갈수록 변화가 증폭되면서 난도가 높아집니다. 그린은 작고 변화가 많지요. 그런 한편 그린콤플렉스가 크고 다채로운 변화를 품고 있어서 그린 주변에서 다양하고 창조적인 플레이를 펼치는 맛이 있습니다.
홀마다 전체적으로 완만하고 평평한 가운데 오르막과 내리막이 고루 안배되어 있고 왼쪽과 오른쪽으로 휘는 홀들 비율이 비슷하게 균형을 이룹니다.
잭니클라우스는 선수 생활을 하던 당시에는 장타자에 들었지만 코스 설계에 있어서는 장타보다는 정교한 샷을 하는 이에게 유리하게 만드는 것을 선호한 편이라 합니다. 그가 디자인한 코스는 전략 없이 플레이는 어떻게든 벌을 주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지요. 자기 실력을 넘어 만용을 부리는 골퍼에게는 더블파에 가까운 응징을, 겸손한 보기 플레이이어에게는 보기를 선물하는 한편, 훌륭한 샷에는 반드시 보상을 주는 것입니다.
그는 이 골프장 정식 개장을 앞둔 2003년 ‘잭니클로스 골프코리아’를 통해서 자신의 코스 디자인 원칙을 밝힌 바 있습니다. 그것을 인용하여 적어둡니다.
첫째, 레이아웃은 힘을 시험하기 위해 플레이하는 골퍼들보다는 현명하게 플레이하는 골퍼들을 위한 것이다. 골프는 힘보다는 정확도를 가늠하는 게임이기 때문이다.
국내에서 골프장 랭킹 선정이 처음 시작되던 이천 년대 중반부터 가평베네스트는 꾸준히 상위권 순위에 이름을 올려왔습니다. 2007년 골프다이제스트 코리아 선정 ‘대한민국베스트코스 15’에서는 대략 6~7위권인 은메달코스에 선정되었고, 2009년 서울경제골프매거진이 선정한 ‘한국 10대코스’에서는 4위에 올랐었지요. 최근에 발표된 ‘골프다이제스트 2019~2020 대한민국50대코스’에서는 27위에 선정되었습니다.
가평베네스트가 이런 평가들에서 상위권 순위에 드는 것은 오랫동안 당연한 것으로 여겨져 왔습니다. 그런데 요즘 매겨진 순위를 보면 오히려 순위 평가 행사에 대한 마케팅 활동을 덜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어쨌든 이들 순위에 관계없이 가평베네스트가 한국을 대표할 만큼 아름다운 산중코스이자 최고급 명문 골프장이라는데 동의하지 않은 이는 거의 없습니다.
이곳만큼 골프코스의 가치와 자연의 아름다움이 어우러진 곳을 찾기 어려운 것입니다.
버치코스 1번 홀을 아침에 플레이 하면 그린 너머 탁 트인 전망 아래 펼쳐진 운해를 만나게 될 수 있습니다.
바람 부는 날 플레이 한다면 뒷바람이 더 멀리 공을 보내주기 쉽지요. 첫 홀을 기분 좋게 시작하는 넓은 페어웨이와 광활하게 트인 전망이 인상적입니다. 이곳 지형 경관의 장쾌한 특징을 첫 홀부터 강한 느낌으로 보여주면서, “여기가 바로 가평베네스트다!” 라고 말하는 듯합니다.
핸디캡 2번 411미터(레귤러티 364미터)의 쉽지 않은 홀인데, 페어웨이가 넓지만 그 오른 쪽 연못은 페어웨이보다 더 넓습니다. 꽤 긴 홀이기에 티샷에 힘이 들어가기 쉬운 만큼, 슬라이스 구질이 나와 연못으로 공을 빠뜨리기 십상이지요. 공이 빠질만한 자리에 길다란 세이빙 벙커를 만들어 놓았으며, 벙커가 끝나는 지점에 수려한 자태의 소나무 한 그루가 있습니다. 우아한 곡선으로 뻗은 가지를 연못 쪽으로 드리운 모습이 아름다운 여인이 머리를 감는 듯 교태롭다 하여 ‘황진이’라 이름 붙은 나무입니다.
이 홀은 그린 앞을 작은 가드 벙커가 막고 있으며 그린 모양도 쉽지 않아서 정교한 어프로치 샷이 필요합니다.
4번 홀은 이 연못을 끼고 오른 쪽으로 도는 짧은 파4 홀인데 티샷을 잘 보내면 짧은 어프로치가 남아 버디에 도전할 수 있습니다. 다만 그린 굴곡이 크고 입체적이므로 정확한 어프로치 샷이 필요합니다. 2017년 이수그룹 KLPGA챔피언십 마지막 라운드에서 뒤지고 있던 장수연 선수가 ‘원 온’ 한 후 이글에 성공하여 역전의 발판을 마련한 홀이기도 합니다.
6번 파4 홀은 운악산을 보는 핸디캡 1번 홀입니다.
운악산은 포천 베어크리크GC에서 가장 가깝게 보이는데, 이곳에서는 그 반대편 모습을 보게 되어 또 다른 느낌입니다. 페어웨이 왼편으로 백자작나무 숲이 소곤거리는 듯합니다. 운악산 원경과 자작나무 숲의 근경, 하늘을 담은 연못이 함께 자아내는 이야기들은 다 받아 적기 어렵습니다. 특히 단풍 들 때 6번과 7번 홀의 백자작나무는 이곳이 왜 ‘버치코스’인지 설명하고도 남습니다.
아름다운 반면 티샷과 어프로치 샷이 다 정확해야 하는 어려운 홀이라서 ‘악소리 나는 홀’로도 불립니다.
티샷의 능력과 전략에 운용에 따라 확연히 다른 결과가 빚어지는 '샷 밸류' 높은 홀들이지요.(샷밸류에 대해서는 한국의골프장이야기 책에서 여러번 설명되었으므로 설명 생략합니다)
덧붙여, 2번 홀 오른편 법면의 황화 코스모스를 온전히 완상할 수 있을 만 할 때, 골프의 새로운 맛을 느끼게 되기 시작할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4번 파4 홀은 436미터(레귤러티 388미터)로 길고 어렵지만 아름답습니다.
길기 때문에 어려운 것인데 페어웨이 왼편의 버치코스와 그 너머의 운해를 감상할 수도 있는 홀이죠. 운해 너머로는 먼 산맥의 겹능선이 유장하게 펼쳐집니다. 긴 홀을 걸어가며 아름다운 전망을 즐기라는 설계 의도인데, 아쉽게도 페어웨이 왼편 중간에 소나무들을 방풍림처럼 심어 놓아 그 장관을 가립니다.
원래 이 자리에 있던 나무인지 조경수로 보완식재한 것인지 모르겠으나 , 이 홀 소나무들은 다른 곳으로 옮겨 심으면 좋겠다 생각합니다.
파인코스는 높은 곳에 위치해 있고 페어웨이와 그린은 극단적으로 절벽의 끝자락까지 닿아있습니다.
5번 홀 그린사이드 벙커 주변의 소나무는 벼락을 맞아 부러진 단면이 뾰족이 드러난 채로 마치 피뢰침 모양으로 서 있습니다. 누군가의 죄업을 대속(代贖)한 것일까요. 드라마 속 한 장면처럼 인상적인 모습입니다.
이것을 촛대나무라고 부르던데 더 풍부한 이야기를 담은 이름이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207미터(레귤러티 163미터) 길이의 이 홀은 파3 중 가장 깁니다.
벼랑 끝에 위태롭게 서 있는 모습인데 안개 낀 날 운해가 깔릴 때는 그린 너머로 하늘 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린으로 걸어 올라갈 때는 하늘로 난 길을 걷는 듯하지요.
다만 이 홀 그린 주변에 조경 소나무를 몇 그루 심어 놓은 것이 제 눈에는 아쉽습니다. 이 홀에서는 아무 치장도 없는 것이 더 나았을 듯합니다. 자연과 막막하게 마주칠 수 있는 골프의 원시적인 느낌을 인공 조경이 분명해 보이는 소나무들이 가로막는 느낌인 거죠. 아름다운 조경수이기는 하지만 외로운 승부사가 퍼팅을 할 때 옆에서 잔소리를 늘어놓는 동반자 같습니다.
지난 가을 파인코스 8번 홀 페어웨이에서 홀을 향해 아이언샷을 하고 걸어갈 때 그린 너머 맞은편에 누군가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쳐다보니 아무도 없는 숲이었지요.
좀 더 느낌을 끌어올려 바라보니 숲 속에 나무 한 그루가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습니다. 왕버들 나무인 듯했습니다. 무성한 숲 가운데 기묘하게도 산신령 같은 느낌으로 서 있는 나무였는데 캐디에게 ‘저 나무가 무슨 나무예요’ 물으니 모른다더군요.
‘사년 동안 이 골프장에서 일했는데 그런 거 물어보는 사람은 처음’이라며 이상하다는 눈으로 봤습니다. 그러면서 ‘매년 이 곳 어림에서 제사를 지내기는 하는데 저 나무 아래에서 하는 것 같다’고 합니다.
알고 보니 파인코스 8번 홀 그린 자리가 이 골프장에서 가장 높은 곳이었습니다.
그날 아침 저는 어떤 이에게 어이없는 실수를 했었습니다. 그 나무에 실수를 털어놓아 위로받고 싶었습니다.
아마도 파인코스 8번 홀 그린 뒤의 왕버들나무는 제 기억에서 일생동안 기묘하게 신령스러울 것입니다.
페어웨이가 가장 넓으며, 546미터(레귤러티 483미터)로 가장 긴 파5 홀입니다.
길이가 긴데다 그린 앞에 가드벙커, 그린 왼편과 뒷면에 보이지 않는 벙커들이 있어서 그린 주변까지 어려운 핸디캡 1번 홀이죠. 남쪽 방향으로 진행하며 서리산 전체의 웅장한 모습을 한 눈에 마주보면서 플레이하게 됩니다. 파인코스 2번 파5 홀이 이글을 노려볼 수 있을 만큼 짧은데 비해 이 9번 홀은 세컨드온이 어렵게 설계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패턴은 잭니클라우스가 즐겨 구사하는 설계상의 배치입니다.
그린 쪽으로 걸어갈수록 맞은편 서리산의 모습이 살아 움직이는 공룡처럼 생동하며 다가옵니다. 절묘한 풍광 배치의 마지막 홀입니다.
코스 관리의 원칙
가평베네스트는 ‘물 관리’를 잘하는 골프장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심한 가뭄이 들었던 2017년, 이 골프장은 자체 저수지에 담아두었던 관리용수를 인근 지역 농민들에게 농업용수로 공급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비가 유난히 많이 내릴 때 치러졌던 2005년 KPGA ‘삼성베네스트오픈’ 대회에서 폭우가 쏟아진 직후에도 곧바로 그린이 마르는 배수 능력을 보여주어 선수와 갤러리들이 두루 찬탄한 바 있습니다.
그린키퍼는 24명이며 식물 생리, 농약, 비료, 토양에 대한 지식과 실무 경력이 깊은 전문가들로 구성되었음을 자랑합니다. 그린 면적이 평균 600평방미터 정도로 좁은 편인데다가 언듈레이션 변화가 커서 핀을 꼽는 위치 선택 폭이 넓지 않습니다. 당연히 섬세하게 관리해야 하며 다른 골프장에 비해 1.5배 이상 정성이 들어간다 합니다.
페어웨이 잔디는 안양중지, 러프는 들잔디(야지)이며 그린은 크리핑 벤트그래스를 식재했습니다. 이 골프장이 자랑하는 코스 관리의 원칙은, 좋은 품질의 코스를 제공하는 것 뿐 아니라 골퍼가 플레이 하는 중 관리 작업 때문에 불편함이 없도록 플레이 중에 필수작업조차 최소화하면서도 최상의 코스 컨디션을 유지한다는 것입니다. 20여 년 동안 그 원칙을 이어옵니다.
(그러므로 이 정도 골프장에서 플레이하는 골퍼라면, 벙커샷을 한 뒤에, 반드시 직접 벙커 복구해야만 합니다.)
클럽하우스는 전체 코스의 중간 지점 해발 365미터에 위치하고 있으며 매 코스 1번 홀이 클럽하우스 주변에서 시작하고 9번 홀에서 클럽하우스로 돌아오도록 배치되었습니다. 일반 레크리에이션 골퍼들이 플레이하기에 흐름이 원활하고, 토너먼트를 치를 때도 시작과 끝을 구성하기 적합한 배치입니다.
클럽하우스는 붉은 색 점토 벽돌로 쌓고 검은 기와로 낮은 지붕을 올려 단아해 보입니다. 주변의 산세를 거스르지 않는 자연친화적인 느낌을 주는데 ‘자연 속의 건축’을 지향했던 미국의 전설적인 건축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Frank Lloyd Wright)의 건축 철학을 본받아 지은 것이라 합니다.
2015년 초가을, 이 골프장에서 열린 골프모임에 왔다가 클럽하우스에서 열린 저녁 연회에 참석한 적이 있습니다. 2층의 대형 ‘베네스트룸’ 연회장에서 재즈 아티스트들이 연주하고 있었고 저는 오르되브르가 마련된 테라스에서 동료들과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아래층 넓은 뜰에는 코스모스지천으로 피어있고 어디선가 솔향기 가득한 바람이 불어왔습니다. 서리산과 주금산 사이로 석양이 붉게 물드는데 동쪽 하늘엔 벌써 달이 떠올라 있었죠. 그때 흐르던 음악이 ‘플라이 미 투 더 문(Fly me to the moon)’이었습니다.
그 순간을 평생 잊지 못할 것입니다.
이 글 들머리에서 말한 제 선배는 “골프는 가슴으로 하는 게임이란 걸 이 골프장에서 처음 느꼈다”고 했습니다.
머리를 쓰고 몸을 쓴다는 건 이해하기 쉬워도 ‘가슴’은 허깨비 같아서 헤아리기 어렵지요. 골프가 인생과 같다느니 영혼이 있는 운동이니 하여 별나게 받드는 말도 있습니다만 어느 운동 종목이나 놀이에 인생과 영혼 따위가 없겠습니까. ‘인생’이나 ‘영혼’은 붙잡아 계량할 수 없으니, 그런 말을 할수록 골프는 한가하고 허허로운 놀이로 보일 뿐입니다.
그러나 그 선배의 가슴을 움직였다던 7번 홀에 서면, 그린에 맞닿은 하늘과 먼 산맥의 구름 능선을 바라보며 가슴 깊은 숨을 쉬어 보게 됩니다.
골프는 머리와 몸으로만 하는 게 아니라 가슴을 움직이는 게임이라는 그의 말을 어렴풋이나마 이해하려 해 봅니다.
그러면서 이 코스를 함께 라운드하는 동반자에게, 짐짓 이렇게 호언했던 것입니다.
“이 장엄한 골프장에서 영혼 없이 비겁하게 치는 이와는 후일을 기약하고 싶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