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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석무 Apr 13. 2020

"온라인 강의는 곧 사라진다"

오늘은 거친 글을 이해해 주세요.


온라인 강의는 어떻게 진화할까요?
온라인 강의는 거의 사라질 것입니다.

1970년대, 미국의 미래학자 앨빈토플러는 ‘매스미디어가 너무 발달한 나머지 매스미디어는 붕괴하게 된다’고 예측했습니다. 이후 40여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퍼스널 미디어 네트워크 세상에 살고 있지요.
그런 맥락의 역설적 변화가 (온라인)교육에도 일어날 것입니다.


지식 교육의 상당 부분이 온라인으로 가능하고 오프라인 교육은 부분적으로 필요하다는 인식이 사회적 표준이 되어갈 것임이 자명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온라인으로의 변화가 지속될수록 온라인 교육은 진화하여, “온라인 강의가 거의 필요 없는 네트워크 교육”으로 차원 이동해 나갈 것 또한 자명합니다.


요즘 용어로 말하면 ‘플랫폼 기반’의 교육으로 변해갈 것입니다.


이번 코로나 팬데믹을 겪으며, 의료 시스템이 IT 기술을 적용한 개인별 원격 의료 플랫폼 체제로 진화할 페달을 밟은 것과 같은 맥락이겠습니다.
그리고 단언컨대,
이 플랫폼 기반의 교육은 선생이 가르치고 학생이 배우는 ‘강의’의 형태가 아닙니다.

지금 교육 현장의 선생님들은, 온라인 강의 교안을 어렵사리 만들고 적응해 가면서도, 온라인 강의가 점점 헤아리기 어려운 숙제를 던져주고 있다는 사실을 절감할 것입니다.
과거와 같은 오프라인 강의 체제로 온전히 환원될 수 있을까 하는 불안감도 들 것이고, 만약에 온라인 강의가 부분적인 스탠다드로라도 적용된다면, 올해 만든 온라인 강의를 내년에 써도 통할 수 있을지 고민하게 될 것입니다.
강의 기법만 업그레이드 하면 될지, 또는 강의 내용도 업그레이드해서 매번 다르게 만들어야 할지, 그리고 그 다음에는 또 어떡해야 할지 생각해야 하는 초유의 상황을 맞게 되는 것이지요.


강의 내용의 폐쇄성은 유지될까요. 올해 한 강의를 내년에 반복하려 하니 수강생들이 “이미 그 정도는 다 들어 알고 있다”며 심드렁해 할 수도 있습니다.
요즘 초등학생 부모들이 아이와 함께 온라인 교육을 시청하며 선생님을 평가하는 것처럼, 대학의 강의를 학생 너머의 사람들이 보며 가늠하려 들 수도 있겠습니다.


온라인 강의를 한다는 것은 이미 강의실과 학교라는 공간 개념의 붕괴를 예고합니다.
(아무리 막으려 해도)온라인 강의는 개방성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개방성은 교류와 교배를 낳고 지식은 네트워크를 통해 융합되면서 빠르게 재정리되어 일반화됩니다. 과거에는 대학 도서관에서 찾던 수준의 지식을 지금은 키워드 검색만으로도 상당 부분 얻을 수 있게 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또한 온라인 강의는 선생, 학자들 간의 능력 차이를 단박에 드러내 줄뿐더러, 더 나아가 학교라는 지역 기반 오프라인 기관에 대한 존재 이유를 심각하게 묻게 됩니다.


미성년 교육을 맡는 고등학교 까지는 물리적인 존재 이유가 분명히 있지만 대학은 전혀 다른 환경에 놓일 수밖에 없겠지요. 대학이 이렇게 많이 있을 필요도 없고 (부동산 투자 목적이 아니라면) 넓은 면적을 차지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너무나 당연히 예측되는 상황이지만 우리 사회가 보지 않으려던 미래이지요. 교육 개혁 한다고 대학입시 전형 방법이나 만지작거리고 있는 우리 사회가 외면하는 그 미래 말입니다.


플랫폼 기반 교육이 ‘강의’ 형태가 아니라는 것은, 편의상 BBC 등의 교육 다큐 드라마 컨텐츠 유형을 참조하면 이해가 빠르겠습니다.
지금은 초보적인 교양 교육 수준에 머무는 이러한 컨텐츠들은 점점 더 단계별로, 전문적으로 분화, 심화 발전할 것입니다.

이를테면 제가 고등학생 때 ‘수학2의정석’을 풀며 이해하려 애썼던 적분(integral)의 개념을 ‘퍼스트맨’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달 탐사 드라마 형식의 영상 교재를 보며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되는 중등교육 교수법의 진화가 이루어지겠지요.
대학 이상 수준의 학문 영역에서는 이 드라마의 일부분을 심층적으로 파고든 고차원의 과제들을 입체적인 영상 시뮬레이션으로 실시간 공유하면서 지구 반대편의 학우들과 토론, 경연, 해결하는 탐구 형식의 교육으로 변모할 것입니다.


이런 변화를 누가 앞장서 만들어 가겠습니까.
우리나라 스스로는 못 만들까요. 구글이나 페이스북, 마이크로소프트에 의존하게 될까요.


지금 우리 사회 중추를 이루는 세대는 달구지가 다니던 신작로에서부터 세계 최고속도의 온라인 네트워크 길까지 숨가쁘게 걸어왔습니다. 누나, 언니, 이모들이 흐느끼며 '간호부'로 떠나고 형과 오빠, 삼촌들이 월남 전장에 팔려가던 시대를 관통하며 지금 세계에서 가장 본받을만한 선진국이라는 평가까지 듣는 나라에 살게 되었지요.


자부심과 ‘국뽕’에 잠시 취해도 좋을 만큼 뿌듯합니다만 이제부터는 아무도 가보지 않은 미래를 맨 먼저 개척해야 하는 ‘첨단 사회 모델’ 안에 우리는 이미 들어와 있습니다.
좋게 말하면 세계 역사의 전위에 선 것이고 나쁘게 말하면 인류 문명 전쟁의 선봉장, 심지어 ‘화살받이’가 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 사회 중추 세대가 신봉해온 성장 모델과 경제 이론은 이미 무효한 것일 가능성이 큽니다.


온라인 강의 이야기를 하다가 거창한 미래 이야기로 빠졌습니다만, 

저는 ‘지식 교육 플랫폼’을 구축하는 일에 우리나라와 사회의 미래가 크게 걸려있다고 봅니다.


과거의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150여 년 전 일본 메이지 유신 시기에 구미 제국문명을 두루 살피고 온 시찰단은 서양과 격차를 좁히기 위해 세상의 모든 책을 번역하는 일을 건의하여 추진합니다. 그런 과정에서 Philosophy는 철학(哲學)이 되고 Geometry는 기하학(幾何學), Democracy는 민주주의(民主主義)가 되었지요. 그리고 그 방대한 지식이 일본의 150년 영욕 시대를 만듭니다. 지금 일본의 쇠락은 그 유효 기간이 다한 위에 새로운 시대의 지식 동력을 충전해 넣지 못하고 있는 데서 가장 큰 이유를 찾을 수 있겠습니다.


당시 일본의 상황에 견주어 우리의 현재 토양은 매우 기름집니다.
흔히들 ‘단군 이래 최고 스펙’의 인재들이 우리 사회 젊은이들이라고 하지요.
우리나라 일부 대기업을 제외하고는 이 ‘고 사양 인재’들이 능력을 펼칠 만한 일자리는 드뭅니다. 이 인재들은 온라인 디지털 저작도구를 능숙하게 다루고, 언어 능력과 학습 능력을 기본적으로 갖추고 있으며 정보를 최적화 하는 데 익숙합니다.
또한 이미 세계적으로 검증된 영화, 드라마, 멀티미디어 등 첨단의 대중문화를 생활 속에 수용하고 있으며 그중 상당수는 제작 능력까지 갖추고 있습니다.

100년 전에 창안된 방식의 교육으로 이런 인재들을 키워내 온 것은 우리 사회 속 들끓는 욕망이 빚은 기적 아닐까 합니다.


그런 가운데 인재들은 취업난을 겪고 중소기업들은 구인난을 겪습니다. 우리 사회 기존 산업 구조에는 ‘오버 스펙’인 인재들이기 때문입니다. 요즘 젊은이들을 이해할 수 없다는 말을 많이 합니다만 그들에게 맞는 일들이 부족할 뿐입니다.

이토록 뜨거운 욕망이 넘치는 사회적 에너지와 영민한 인재들로 어떤 미래, 어떤 플랫폼인들 못 만들겠습니까. 한 번도 안 해본 것에 대한 두려움이 최대의 적(敵)일뿐이지요.


이미 세상의 지식은 구글과 페이스북, 애플, 아마존에 종속되어 가고 있습니다. 게다가 그들은 우리나라 국세청에 거의 돈을 내지 않고 수익을 거두어 갑니다.
교육은 백년대계라 하는데 우리가 스스로 지식 교육 플랫폼을 만들지 않으면 10년 뒤의 미래도 스스로의 힘으로는 꿈꿀 수 없을 것입니다.


이렇게 세상이 변하고 미래는 이미 와 있는데 ‘국뽕’에 오래 취하기는 상황이 급박합니다. 우리 세대가 만들어 놓은 번영이라고 자랑이나 할 시간은 없습니다. 교복입고 '빳다' 맞던 야만의 과거를 그리워하고 산업화와 민주화의 공을 다툴 때도 아닙니다. 그것은 이미 사라진 신기루입니다.
이제 싸움터가 바뀌었습니다. 전장을 잘 선택해서 스스로에게 유리한 홈 그라운드를 구축해서 싸워야 하는 것이 마케팅 기본 전략의 하나인데 그것은 국가와 사회의 경영에서도 마찬가지라 봅니다.
우리의 홈그라운드는 인재, 두뇌, 지식 아니겠습니까.


오늘, 국가는 미래를 위해 무엇을 준비하고 지식인들은 무엇을 위해 치열합니까.


어제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일이었습니다.
김구 선생은 그 고단한 임시정부 생활 속에 적은 글에서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라 하셨는데요. 지금에 되새겨도 신통력 넘치는 말씀입니다.


“나는 우리나라가 남의 것을 모방하는 나라가 되지 말고, 이러한 높고 새로운 문화의 근원 되고 목표가 되고 모범이 되길 원한다. 그래서 진정한 세계의 평화가 우리나라에서, 우리나라로 말미암아서 세계에 실현되기를 원한다.”



2020년 4월12일 단상.
(인용이나 참조할 때에는 출처를 밝혀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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