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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석무 Dec 21. 2021

엘리시안제주 - 한국의골프장이야기 탐사기록

이 포스팅은 [한국의골프장이야기] 제3권 집필을 위한 탐사 기록입니다



한라산은 ‘은하수를 끌어안은 산’을 이른다. ‘한(漢)’은 은하수를, ‘라(拏)’는 끌어당긴다는 뜻을 품는다. 조선 효종 때(1653년) 제주목사 이원진은 ‘탐라지’에서 “한라라 운(云)함은 운한(雲漢:은하수)을 라인(拏引)할만한 웅자(雄姿)를 형용”한다고 썼다.

‘탐라(耽羅)’는 제주에서 수천 년 이어온 고대 왕국이었다고 전해진다. 그 이름 뜻을 ‘멀고(眈) 깊은 바다의 섬나라’로 풀기도 한다. ‘제주’의 글 뜻은 건너(濟) 고을(州)이니, 제주도는 멀고 깊은 바다를 건너 은하수를 끌어안은 섬나라다.     


제주와 서귀포 중간의 중산간 들판

엘리시안 리조트는 새별오름 하늘의 은하수를 끌어안는 한라산 중산간에 있다. 백록담 위 정상(1,950m)에서 영실 오백나한의 기암 병풍(1,600m)으로 내려온 급경사가 몇 개의 오름을 거치다가 완만한 비탈이 되어 한림 바다로 이어지는 서쪽 사면(해발 530m)이다.



제주와 서귀포를 중산간 지름길로 잇는 평화로(1135번 지방도)의 중간쯤이다. 공항에서 차로 이십여 분이면 도착하는 길목이며 서귀포에서도 이십여 분에 닿는다. 이 길 주변 한라산 서·남쪽에는 열 개 넘는 골프장들이 있는데, 그 중에서는 엘리시안 리조트가 공항과 가장 가깝다.   


이 부근에는 예로부터 목장으로 쓰이던 땅들이 많았다. 고려가 몽골에 복속했던 시절, 탐라 왕국은 원나라의 지배 아래 말 사육기지 역할을 맡았다. 쿠빌라이 칸이 파견한 몽골인 목호들은 한라산 중산간을 불태워 목초지로 만들었으며, 원나라 멸망 뒤에도 제주에 정착해 목축을 이어간 이들이 많았다. 엘리시안 리조트가 들어선 중산간 들판은 주로 목장이었으며, 주변에 아직도 억새밭과 초지가 드넓은 목장 터가 남아있다.     



신화 속의 이상향 

GS그룹이 이 터에 2004년 36홀 골프장과 리조트를 짓고 ‘엘리시안(Elysian)’이라 불렀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축복의 땅 ‘엘리시온(Elysion)’을 따온 이름이다. ’오디세이아‘에서 호메로스는, 대지(가이아)를 둘러싼 오케아노스(바다)의 서쪽에 지혜로운 왕 라다만티스가 다스리는 섬이 엘리시온이라고 적었다. 신에게 선택받은 이들이 죽음을 넘어 행복하게 산다는 이상향이라 했다, 누구나 음악과 운동 등의 취미생활을 하며 행복을 누리는 평원이며. 일 년 내내 제피로스(서풍)만 산들산들 불고 꽃이 만발하는 곳이다. 

(골프의 발상지인 스코틀랜드 세인트앤드류스 올드코스의 14번과 5번에 걸친 평화로운 페어웨이를 엘리시안 필드라고 부르기도 한다. 잉글랜드 켄트의 로열 세인트 조지스 골프클럽 등에도 엘리시안 필드라 부르는 페어웨이가 있다.)


엘리시안이라는 이름을 처음 들었을 때 나는 저으기 서먹했었다. 탐라의 수천 년 역사 속에 만 팔천 여개의 신화, 전설, 민담이 떠도는 제주 땅에 고대 희랍 신화의 이상향이 들어서는 서사에 내 상상력은 닿지 않았다. 그 이름을 따라 그리스 신전을 본뜬 거대한 건축물들이 들어서지 않을까 염려했다. 

한국 전승 서사무가를 연구하여 대학 교수 일을 하는 친구에게 물었다.     


“제주 신화에는 그럴듯한 이상향이 없어?”      


이런 답이 돌아왔다.     


“제주 신화 전설들은 슬퍼.”        


나는 ‘우리 것이 최고’라거나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이라는 생각을 경계한다. 다만 어느 곳이라도, 저절로 빚어진 모습과 쌓인 그대로의 이야기들을 오롯이 살피고 들어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들판의 차가운 돌멩이 하나가 세계적인 값어치를 가질 수는 없겠지만, 그 돌멩이들이 세월 속에 품어온 사연들이 세상 사람들에게 따뜻하게 퍼져나갈 수는 있다. 빛나는 이야기를 품은 돌멩이들은 금강석보다 귀하게 떠받들리기도 한다.    

 


세계 유명 아티스트들이 가꾼 작품

터가 품은 고유한 가치가 이방인들의 눈에 먼저 발견되는 경우도 많다. 골프장을 예로 들더라도, 우리나라 지형이 골프코스 터로 지닌 도전성을 찾아내고 그 결을 따라 코스를 만들기 시작한 것은 외국인 설계가들이었다. 국내 전문가들보다 많은 경험을 통해 전문적 통찰력을 갖추었거나, 편견 없이 꿰뚫어 보는 안목을 지닌 예술가들이 그 터의 깊은 맥동을 직관하곤 한다. 

GS그룹은 이 리조트가 희랍 신화의 엘리시온을 닮은 이상향의 모습이 되기를 바라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이 터에 숨 쉬는 고유 가치를 발견하고 살려내 줄 세계적 예술가들에게 조성 작업을 맡겼던 듯하다.    

 

그리스 신전 같은 건축물을 짓지 않을까 했던 내 염려는 기우였다. 엘리시안 리조트는 한라산 중산간의 여러 개 오름들 품에서 생태 공원처럼 조심스럽게 안겨 있다. 나지막한 골프장 클럽하우스와 리조트 건축물은 자연의 선과 면을 거스르지 않으며 어울린다.  



리조트는 숙박을 위한 건축물을 짓기보다는 엘리시안이라는 주제의 자연 공간 조성에 중점을 둔 듯하다. 호수를 중심으로 섬세한 조형의 자연 정원을 중심에 조성하고 클럽하우스와 이층 구조의 리조트 건물들을 자연의 일부분인 것처럼 앉혔다. 빌 벤슬리(Bill Bensley, 정원), 요시다 코시키요 (Yosida Tosikiyo, 건축설계), 베르떼 앤 뽀쉬(Berthet & Pochy, 인테리어 디자인) 등 세계 유명 아티스트들이 이 작업을 맡았다.     

 

골프코스 설계가 송호

골프코스 설계는 한국인 설계가 송호 씨가 맡았다. 송호 씨는 엘리시안 제주 골프코스에 대하여 “골프장 터의 자연 특성을 이해하고, GS가 원하는 컨셉을 바탕으로, 내 생각을 담아 설계했다.”고 했다.      

송호는 우리나라에서 골프코스를 가장 많이 설계했다. 그는 한양대학교에서 토목학을 전공하고 공군 장교로 복무하다가, 비행장 설계와 부속 골프장 조성에 참여한 것을 계기로 골프코스와 인연을 맺었다고 한다. 공군에서 상관으로 모시던 김명길이 설립한 골프코스 설계회사(필드컨설탄트)에 입사해서 송추CC를 설계(1991년 개장)한 것이 첫 작업이었다. 1990년대 말에 독립하여 ‘송호골프디자인그룹’을 운영해오고 있으며, 더스타휴, 드비치, 세인트포, 웰링턴, 킹스데일 등 국내외 70여 개 코스를 설계했다.      


나는 [한국의골프장이야기] 1권과 2권에서 송호가 설계한 골프장들을 몇 번 다루었다. 그때마다 그의 이야기를 듣고 그가 여러 매체에서 밝힌 인터뷰 내용들도 두루 찾아보았다. 그가 설계한 코스 중 ‘대표작’들은 대부분 라운드 해보았다. 하지만 그의 설계 성향을 간명하게 단정하기는 어렵다. 그가 골프코스를 만들어온 40년 넘는 세월 동안 세월동안 우리나라 골프장 조성 환경은 격동적인 변화를 겪었다. 그는 코스의 용도에 따라, 시대의 흐름에 따라 다른 결과를 내왔다. 그가 설계한 코스들은 우리나라 골퍼들이 겪어온 시대의 앨범처럼 다이내믹하고 다양하게 변천해 온다.       


코스 설계자 송호


송호의 설계 작품 세계

골프코스(설계)에 대하여 그는 이렇게 말한다.     


“골프는 자연을 상대로 에티켓과 룰, 매너를 지키는 게임을 하는 가운데 인간 본연의 가치를 되찾는 스포츠입니다. 좋은 골프장은 첫째 아름다워야 하고 둘째 재미있게 플레이할 수 있어야 하며 셋째 변별력이 있어야 합니다, 넷째 자연과 어우러지는 가운데 18개 홀이 저마다 다른 감동을 주어야 합니다.”      


“골프는 힘이나 비거리로만 하는 게 아니라 두뇌를 주로 사용하는 운동입니다.”      


“골프장은 후대에 물려줄 문화유산입니다. 한번 만들어놓으면 수백 년 뒤의 후손들도 자랑스러워하며 플레이하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골프코스는 신과 함께 만드는 겁니다.”      


말들에서 지사적 도덕관과 장인적 예술관, 작가적 시대정신이 들린다. 그가 설계한 코스들을 내가 실제 라운드하면서 느끼고 발견한 몇 가지 (장점)특징들을 적어둔다.      


첫째, 

그는 한국의 산중 지형에서 코스 루트를 찾아내는 데 두드러진 능력을 입증해왔다. 예를 들어 양평 ‘더스타휴’에서는 다른 설계가들이 모두 포기한 지형에서 길을 찾아내 이른바 ‘상위 랭킹 코스’로 빚어냈다. 춘천의 ‘더플레이어스’에서는 가파른 악산(嶽山)에서 평활하고 유장한 27홀 코스를 끌어내는 능력을 보인다. 토목학을 전공한 강점이 우리나라 지형에서 발현되어온 것이라고 생각한다.     


둘째,

그는 이븐파를 칠 수 있는 수준의 스크래치 플레이어로서, 플레이어의 다양한 상황을 스스로 체험하며 코스의 변별력을 안배하는 장점을 보여 왔다. (세계적 설계가들 중에는 골프를 잘 하지 못하는 이들도 적지 않지만) 그는 여러 등급의 골퍼들이 자기 수준에 맞게 공략하는 다양한 루트와 방어 장치를 경험을 통해 빚어냄으로써, 플레이어빌리티(playability)와 게임의 재미를 높이는 기교를 발휘해 왔다. ‘킹스데일’, ‘세인트포’ 등에서 그런 특징이 잘 보인다.     


셋째,

그는 시대적 흐름과 상황의 특성에 따라 다양한 시도를 해온다. 산중에 듄스(Dunes) 코스를 구현한 춘천의 ‘라비에벨 듄스’, 샌드 벙커 없는 코스를 시도한 ‘설해원 레전드코스’ 등은 매우 실험적이다. 그런 한편 ‘남춘천CC’ 등에서는 난도와 샷밸류를 높이려 노력하고, ‘곤지암GC’ 리모델링에서는 비즈니스코스의 특성에 맞게 미디엄 샛밸류로 조절하는 절제 등을 보여준다, 이러한 다양한 모습들은 아티스트로서의 시도이기도 하고, 의뢰인이 추구하는 골프장 용도에 부응하는 유연함이기도 하겠다.    


넷째.

그가 설계한 코스 중 매우 어려워 보이는 것은 보기보다 어렵지 않고, 편안해 보이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그가 한동안 난도 높은 코스를 설계하던 시절이 있었는데, 어느 순간부터인가 편안하게 즐기는 가운데 도전을 선택할 수 있는 코스로 지향점을 옮긴 듯하다. 티샷은 마음껏 치되 그린으로 갈수록 조여 온다든가. 위협적으로 보이는 곳에서도 초중급자가 우회하거나 실수를 만회할 수 있는 공간을 배려해 두는 안배가 완숙해 보인다. 그가 설계한 코스에서는 그린 주변 벙커가 한쪽에만 (위협적으로)위치한다. 장해물이 있는 방향의 공략은 매우 까다롭되 성공하면 충분한 보상이 따르고, 그 반대편으로 우회하면 어프로치샷 실수 위험에서는 자유로운 반면에, 그린 플레이의 상상력이 필요하게 되는 등의 전략적 다양성이 선명하다.      


다섯째

그는 플레이 요소 이외의 인위적인 조경을 절제한다. 바위나 호수, 둔덕 등 자연을 코스에 끌어들여 플레이어와 만나게 하거나, 벙커에 기능적 형태미를 부여하는 등의 기법을 주로 구사한다. 꽃을 심는 게 아니라 꽃이 피는 야생의 언덕을 만나게 한다고 할까. 조형과 조경은 거의 모두 플레이에 직·간접으로 영향을 주는 요소들로 구성한다. 굳이 예쁜 공간을 만들기보다는 골프코스의 자연적 생명감을 추구하는, 선 굵은 터치를 보여준다.       


분명한 사실은, 그가 스펙트럼이 넓은 기술 전문인이며 시대정신에 민감한 아티스트라는 것이다. 그의 설계 ‘세계관’에 대해서는 앞으로 다른 골프장 편에서 살펴볼 기회가 있으리라 생각한다.    

       


코스에 대하여     


자연에 슬쩍 얹은 코스

엘리시안 제주 골프코스는 한라산 서쪽 중산간 기슭의 자연을 ‘슴슴한 맛’ 그대로 살렸다.

아마도 GS그룹에서 ‘엘리시안’이라는 이름에 맞는 평화로운 필드와 ‘제주의 자연 그대로’ 간직한 모습을 원했고, 코스 설계가도 자연을 변형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라고 생각한다.     



평지처럼 느릿한 사면의 동쪽 오르막에는 한라산 정상과 영실 오백나한이 굽어보고 있다. 서쪽으로는 눈이 시린 한림 바다에 비양도가 떠간다. 파란 하늘 아래 흰 메밀밭이 끝없다. 완만한 곡선의 오름들에 안긴 초지에 드문드문 억새밭이 일렁인다. 먼 태평양에서 바람에 묻어온 야생화들이 아무렇게나 피고 진다.

골프코스는 이 자연의 시공간을 조심스럽게 지나가고 있다.     


회원제 코스 18대중제 코스 18

송호는 엘리시안 제주 골프코스 36홀을 이천년 대 초반에 설계해서 2004년에 완성했고, 그중 회원제 18홀을 2021년에 부분 수정 설계하여 리모델링했다. 4개 코스 36홀 중에서 클럽하우스 앞의 중심에 위치한 레이크-파인 코스 18홀이 회원제로 운영된다.      



처음 문을 열 때는 36홀 모두 편안한 휴양형 코스로 조성했는데, 2017년부터 회원제 코스에서 한국여자프로골프투어(KLPGA Tour) '에스오일챔피언십' 대회를 치르며 변별력을 높일 필요가 생겼다. 이에 2021년에 파인-레이크 코스의 벙커 등을 리모델링하여 샷밸류와 난도를 높였다. 50개이던 벙커를 41개로 병합 재배치하여 숫자는 줄었으나 규모와 존재감은 커졌다. 벙커 위치를 조정하고 형태에 생동감을 주어 방어력을 높이고, 샷 기술 능력 변별성을 업그레이드했다. 또한 벙커의 모양과 마감 디테일에 세계적인 코스 조성 트렌드를 도입하기도 했다.     


(한라산 방향의) 캄포코스 9홀과 (바다 방향의) 오션코스 9홀의 18홀은 대중제 코스로 운영된다. 회원제와 대중제 코스 간에 수준 차이는 거의 없으며 관리 품질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레이크코스 - 7개 홀에서 호수를     


레이크코스(파 36·3628야드)는 4개의 커다란 호수를 7개 홀에서 만난다. 원시림 사이로 평활한 홀들이 전개되고, 호수가 페어웨이를 따라가다가 그린 앞을 가로막기도 한다. 전체적으로 온화해 보이지만 호수와 돌무더기 등의 전략적 요소들을 배치하여 ‘생각하는 플레이’를 주문하고 있다. 호수를 조성하다 보니 4개 코스 가운데 인공미가 가장 많이 드러나는 코스다. 원래의 광활한 자연에 큼직큼직한 인공요소들이 뚜렷한 윤곽으로 스며들면서 자연으로 동화되어 가는 모습이다.      


4번 파홀 - ‘송호 표’ 방정식 

레이크코스 4번 파4 홀

4번 파4 홀은 호수가 플레이어와 적극적으로 대결한다. 호수가 페어웨이 및 그린과 상호작용을 통해 샷밸류를 높이는 설계 방정식을 잘 보여주는 구성이다. 티샷을 페어웨이 오른쪽 호수에 가깝고 길게 칠수록 그린에 가까워지며, 세컨샷에서 (되도록 짧은 아이언으로 쳐서)호수에 바투 붙은 그린에 공을 세워야 한다. 안전하게 우드 티샷을 할 경우 페어웨이 왼쪽에 공이 떨어지면 홀과 멀어지지만 욕심을 부리지 않으면 선택의 기회가 있다. 핀의 위치에 따라 공략법이 달라진다. (중간 난이도의 홀인데) 플레이어의 전략 선택에 따라 처음부터 끝까지 변수가 발생하는 ‘송호 표’ 호수 홀이다.     


6번 파5 - 자연과의 주사위 게임

레이크코스 6번 파5 홀

6번 파5 홀은 서울경제골프매거진에서 ‘한국에서 가장 인상적인 파5 홀’ 중 하나로 선정했었다고 한다. 길이는 짧은 편(블랙티 515야드, 화이트티 488야드, 레드티 417야드)이라 장타자는 투온이 가능하고 쓰리온을 선택하면 수월한 편이지만 세컨샷부터는 페어웨이를 가로지르는 실개천과 오른쪽 오르막의 비스듬한 숲(과 화산암 무더기들)을 감안해 전략적인 선택을 해야 한다. ‘골프는 자연과 대결하고 교감하는 게임’이라는 말을 실감할 수 있는 홀이다. 장타자들은 돌무더기를 넘겨 투온에 도전한다. (그러다 미스샷을 내면 쉬운 파5 홀에서 큰 실점을 하게 될 수 있다.) 제주의 자연미가 코스의 전략요소로 들어와 도전의 주사위를 던지라고 하는 홀이다.          


7번 파3 - 짧지만 정확한 기술샷을...

레이크코스 7번 파3 홀

7번 파3 홀은 정확한 거리와 샷 기술을 시험한다. 그린 앞에는 호수가 있고 그린 너머는 숲이다. 숲 너머 바다에서 바람이 불어오기에 클럽을 냉정하게 선택하고 샷 기술도 정확해야 한다. 파인코스 3번 파3 홀도 이 홀과 호수를 넘기는 모양이 비슷한데, 그 홀은 더 길기 때문에(블랙티 201야드, 화이트티 175야드) 그린 앞에 여유 공간이 있고, 이 홀은 짧기에(블랙티 170야드, 화이트티 135야드) 호수를 그린에 바투 붙여 놓았다. 핀이 오른쪽 끝에 꽂힐수록 기술샷(페이드)을 잘 구사하는 플레이어에게 유리하다. 2021년 리모델링에서 그린 오른쪽 벙커를 풍성하게 키워 게임의 전략성을 높였다.             


파인코스 토너먼트의 극적 승부     


파인 코스(파 36·3634야드)는 원시림 사이를 진행한다. 이 숲은 코스 주변 몇 개의 오름들에서 이어진 것이다. 팽나무, 때죽나무, 후박나무 등 제주의 자생 수목들이 숲을 이루어 부드러운 곡선으로 코스를 감싸고 있다. 파인코스에는 오비구역이 다소 많고 후반으로 갈수록 극적인 승부 요소들이 배치되어 있다. 토너먼트에서 흥미진진한 마무리 승부를 연출하는 구성이다.     


5번 파5 - 엘리시온 평원의 제피로스 길

파인코스 5번 파5 홀

파인코스 5번 파5 홀에서는 제주도 서쪽 풍광을 두루 즐긴다. 한라산 정상을 등지고 바다를 향해 티샷한 뒤 내리막으로 걸어가다 보면 새별오름 정상이 바다에 뜬 섬처럼 보인다. 페어웨이 바로 옆은 빽빽한 곶자왈 숲이다. 그린에서 돌아보면 한라산 정상이 굽어보고 있다. 

신화 속 엘리시온 평원에 부는 제피로스(서풍)의 바람 길을 상상하게 되는 곳이다. 548야드(화이트 498야드, 레드티 460야드)로 남자 장타자는 투온이 가능하지만 바람의 영향을 받기에 어프로치샷의 정교함이 필요한 홀이다.        


7번 파3 - ‘피비린내 나는 내기’ 

파인코스 7번 파3 홀

내기골프를 좋아하는 이들은 파인코스 7번 홀에서 ‘피비린내’를 맡을 것이다. 특히 왼쪽 위단에 핀이 꽂을 때는 혈향(血香)이 진동하고 탄식이 메아리치는 홀이 되기 십상이다. 토너먼트에서도 이 홀은 승부처의 시작이다. 그린 왼쪽 앞의 깊은 벙커와 이단 그린의 가파른 경사가 위협적이다. 티샷한 공이 그린 왼쪽으로 떨어지면 숏게임이 매우 어려우며, 그린에 올리더라도 핀까지 먼 거리가 남으면 쓰리펏 하기 십상이다.     


8번 파4 - ‘파 앤 슈어

파인코스 8번 파4 홀

파인 8번 파4 홀은 골프 기술의 기본이라 할 파 앤 슈어(Par & Sure, 길고 정확하게) 능력을 시험한다. 매우 긴 홀은 아니지만(블랙티 437야드, 화이트티 380야드, 레드티 316야드) 제원 상 수치보다 길게 느껴지는 변수가 많다. 티샷을 페어웨이 왼쪽으로 보낼수록 그린을 공략 각도가 열리는 장점이 있으나, 그쪽에 커다란 호수가 있어서 위험하다. 티샷에 힘이 들어가면 빠뜨리기 쉽다. 게다가 세컨샷 지점부터는 꽤 높은 오르막이며, 그린의 굴곡도 크기 때문에 티샷, 세컨샷, 그린 플레이를 모두 실수 없이 해야 한다. 

토너먼트에서 선수들도 파를 지키려 하는 홀이다. 평범한 골퍼는 이런 홀에서 또박또박 쳐야 유리하다.

7,8번 어려운 구간을 지나면 오르막 18번 파5 홀이다. 큰 어려움은 없으나 승부를 뒤집기 위한 모험이 변수를 빚어내도록 한 구성이다.                  


캄포코스 들판과 오름과 바다와     


캄포 코스(파 36·3454야드)는 네 개 코스 중 가장 짧지만 가장 광활한 느낌을 준다. 가을에는 코스 전체에 억새가 일렁인다. 또한 한라산의 정다운 오름들을 마주하는 코스다. 코스를 에워싼 여섯 개의 오름이 여덟 개 홀에서 플레이어를 맞는다. 7번 홀에서만 오름이 아닌 바다를 향하는데, 그 홀 그린에서 돌아보면 한라산 정상을 마주한다. 한라산 중산간의 향기를 진하게 맡는 코스다.      


여섯 개의 오름들

캄포코스 9번 홀, 큰바리메오름

이 코스에서 마주치는 오름들의 이름이 애틋하다. 괴오름, 북돌아진오름, 도래오름, 큰바리메오름, 검은들먹오름, 다래오름...... 제주 신화 속의 외로운 신들이 걸어 나올 듯하지 않은가. 제주에는 368개의 오름들이 있다고 하며, 오름 하나하나가 모두 화산체이다. 화산이 분화할 때 가스와 함께 방출된 쇄설물(화산송이)들이 분화구 주변에 쌓여 오름이 되었으며, 흘러나온 용암이 돌로 굳은 자리에 우거져 엉킨 숲이 곶자왈이라고 한다.      

8번 파3 - 장엄한 억새 홀

캄포코스 8번 파3 홀

8번 파3 홀은 캄포코스의 매력을 액자처럼 담아 보여준다. 243야드의 긴 파3홀(화이트 191야드, 레드티 132야드)을 억새밭이 온통 휘감고 있다. 억새가 바람의 몸통을 껴안고 교성을 지르며 일렁인다. 그린 뒤 억새 밭 너머에 ‘괴오름(653m)’과 ‘북돌아진오름(643m)’이 웅크리고 있다. (괴오름은 고양이 등을, 북돌아진오름은 북이 매달린 모양을 닮아 붙은 이름이라 한다) 

이 홀에서는 바람이 불어야 제맛이다. 보이지 않는 바람을 끌어안고 금빛 은빛으로 흐느끼는 억새들이 장렬하게 바람의 흐름을 알려준다.               

  

오션코스 바다를 느끼며 걷는다.     


오션 코스(파 36·3593야드)에는 먼 바다가 들락인다. 바다와 나란히 남북방향으로 진행하는 홀들이 많기에 페어웨이를 걸으며 제주 서쪽 바다를 느낄 수 있다. 대양 건너 어디에선가 바람에 날아와 정착했을 야생화들이 곳곳에 무리지어 핀다. 복수초, 노루귀, 바람꽃들이 피는 언덕에서 한림 바다에 흘러가는 비양도를 바라보는 맛이 슴슴하다.      



8번 파4 - 시(詩) 같구나!

8번 파4 홀에서 무덤덤한 이는 가엽거나 모진 사람이다. 봄에 이 홀에 왔을 때 한쪽 언덕 가득히 유채꽃이 피어 있었다. 함형수(1914~1946)의 ‘해바라기의 비명(碑銘)’ 시 구절이 문득 떠올랐다.     

    

나의 무덤 앞에는 그 차거운 비(碑)ㅅ돌을 세우지 말라

나의 무덤 주위에는 그 노오란 해바라기를 심어 달라     


오션코스 8번, 봄의 유채꽃


해바라기는 아니었지만 파란 하늘 아래 노오란 유채꽃이 절명시처럼 애틋해 보였던 것이다. 

가을에 다시 들르니 그 자리에 메밀꽃이 지천으로 피어 있었다. 봄에는 유채꽃, 가을에는 메밀꽃 피는 언덕으로 관리한다고 했다. 메밀밭 맞은편 바다에 노을이 들고 있었다.     


     

오션코스 8번, 가을의 메밀꽃


관리와 시설     


잔디와 나무들

이곳의 날씨는 한라산과 바다, 그리고 오름들의 영향을 받는다. 해안으로부터 30km 이상 떨어진 해발 530미터 중산간이라 습하지 않고 쾌적하며, 산에 부딪는 바람이 한여름에도 땅을 식혀주어 (추운 지방이 고향인) 양잔디가 잘 자란다. 코스가 오름 여섯 개에 둘러싸여 바람이 덜 분다는데 오름 사이를 지나는 바람이 변화무쌍하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켄터키블루그래스 양잔디를 제주에서 가장 일정하게 관리하는 골프장으로 꼽힌다. 가을이면 파란 평원의 고운 잔디와 금빛은빛으로 일렁이는 억새가 선명한 대비로 장관을 이룬다.       

     


클럽하우스 앞 스타트 광장의 팽나무는 200살이 넘었다고 한다. 이곳 말로 ‘폭낭’이라 부르는 팽나무는 제주의 억센 바람과 맞싸우며 가지를 뻗는 풍향목이다. 변화무쌍한 바람 반대방향으로 저항하여 굴절하며 가지를 뻗기에, 몸 전체가 구불구불하게 뒤틀린 부정형이다. 나무에게는 고통스러운 생존의 몸짓이지만 인위적으로 굴절시켜 만든 분재 따위와는 비교할 수 없는 생명력의 아름다움을 뿜어낸다. 

이 코스 곳곳에 있는 900여 주의 팽나무들은 원래 그 자리에 있었거나 코스를 내느라 자리를 조금 옮긴 것이다. 코스를 조성하면서 나무들을 살려내는 일에 지극한 염려와 정성을 쏟았다고 한다.      



벤슬리 가든

벤슬리 가든과 큰바리메오름

클럽하우스와 리조트의 중심에 있는 벤슬리 가든(Bensley Garden)은 제주 오름의 천연 연못을 재해석한 것으로 보인다. 미국 캘리포니아 출신의 조경 예술가 빌 벤슬리(Bill Bensley)의 작품이다. 그는 1984년 하버드 대학원을 졸업한 이후 150여개 공간 조경 작품을 남겨왔으며 세계적으로 주요한 상을 많이 받은 아티스트다. “지구의 신성함을 보존하는 지속 가능한 생태학적 실천”이라는 그의 설계 철학을 GS그룹이 받아들여 이 정원 공간을 함께 만들었다고 이해한다.     


클럽하우스와 시설들

클럽하우스

클럽하우스와 리조트 건물은 도큐 설계의 수석 디자이너 요시다 코시키요 (Yosida Tosikiyo), 인테리어 디자인은 베르떼 앤 뽀쉬(Berthet & Pochy)가 맡았다. 장루이 베르떼와 이븐 포쉬는 파리 시청, 에펠탑 우체국 등 세계 20여 개국에서 주목받는 작품을 남겨온 프랑스 유명 실내 건축가들이다. (이들이 작업한 엘리시안 리조트의 건축물들을 해석할 깜냥이 내겐 모자라기도 하고 이 책에서 다루기엔 별도의 깊고 큰 영역이기에 적지 않는다.)


건축물들과 조경 건조물들은 자연의 일부분인 것처럼 겸손하고 조용한 느낌으로 편안하다.         

벤슬리가든을 중심으로 40평 50세대, 57평형 8세대로 구성된 엘스위트(ELSUITE) 골프텔이 있으며, 클럽하우스와 골프텔 사이의 골퍼스 플라자에는 300석 규모의 대연회장과 중소회의실, 휘트니스센터, 가라오케, 마사지룸과 편의점 등이 있다. 수영장과 바비큐 가든, 삼나무 숲 산책로도 있다.          


야외 웨딩 가든


덧붙임 엘리시안과 제주의 신화 


1983년 ‘뿌리깊은나무’가 펴낸 종합인문지리지 ‘한국의발견’ - 제주도 권에서 첫머리 글을 맡은 제주 시인 문충성(1938~)은 이렇게 첫 문장을 쓴다.     


“제주도를 어떤 이는 눈물과 한숨의 섬이라고 하고 어떤 이는 하늘의 축복을 받은 섬이라고도 한다.”......(중략)......“제주 바다는......(중략)...... 뭍에 대한 제주 사람의 그리움이, 그들의 외로움과 절망감이 ‘설문대할망’ 같은 신화를 낳은 바다요, 꿈과 사랑과 죽음의 섬인 ‘이어도’에 대한 애끓는 노랫가락과 전설을 만들게 한 바다이다.”     


그 책 중간쯤에는 이런 구절도 나온다. 제주 출신 작가 현길언(1940~2020)의 글이다.     


“제주의 신들은 잘 토라진다. 부락마다 당이 한두 개쯤은 있고 집안에도 곳곳에 신들이 있다고 믿었다. 사람들을 보호해 준다는 신이기도 하지만, 제주 사람들만큼이나 불쌍하고 배가 고프기 때문에 잘못 대접이라도 하면 곧 심술을 부린다고 한다. 그래서 늘 이들을 잘 대접하는 일에 마음을 써야 했다. 이 신들을 마치 외롭게 살며 피해를 자주 당한 사람이 마음의 상처를 잘 입어 쉽게 토라지거나 자주 화를 내는 것처럼 조금난 소홀하게 대접해도 재앙을 내린다는 것이다. 그 심성은 제주 사람들 자신일 수도 있다. 그런 뜻에서 제주 사람들에겐 차라리 신들이 없는 것이 더 나았을 지도 모른다.” 


..............     


앞에서 적었듯이, 십 수 년 전 엘리시안이 문 열었을 때 나는, 제주에 깃든 일만 팔천여 개의 신화 전설들과 희랍 신화의 이상향은 서로 서먹해 할 것이라 생각했었다. 넉넉하고 아름다운 그리스의 신들과 고단하고 투박한 제주의 신들을 함께 떠올리기 애처로웠다.

하지만 이제 제주를, 외롭고 슬픈 신들이 떠도는 눈물과 한숨의 섬이라고 여기는 이들은 드물게 되었다. 옛날에는 육지로 가는 길을 막았던 바다가, 곡식이 나지 않던 돌무더기 황무지가, 두려웠던 바람과 억센 숲들이...... 제주를 ‘환상의 섬’으로 떠올리게 하는 귀한 자산이 되었다.


제주의 자연에 숨죽여 깃든 신들도 언젠가 귀하게 살아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엘리시안에서 노니는 그리스의 신과 영웅들과는 다른 개성과 사연을 오연히 지키며, 언젠가는 빛나는 문화의 옷을 입고 세상에 떠오를 것이라 기대한다.     


GS그룹이 한라산 기슭의 자연을 조심스럽게 보듬고 보살피며 빚은 제주의 엘리시안이,

그런 날이 올 때쯤이면, 얼마나 더 무르익어 있을지...... 슴슴하게 상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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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포스팅은 [한국의골프장이야기] 제3권 수록을 위한 소통용 초안입니다.

좀더 상세하게 보완한 뒤 책에 싣고자 합니다.

글로 적힌 생각과 표현들은, 인용 표시된 것 말고는, 지은이의 고유한 저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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