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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석무 Jan 02. 2022

용평 골프장 - 한국 골프장 역사의 ‘레전드’

[한국의골프장이야기] 제 3권 탐사 기록

이 포스팅은 [한국의골프장이야기] 제3권 집필을 위한 탐사 기록입니다.

용평리조트 진입로 옆의 호수와 용평나인 퍼블릭 골프장 9번 홀


용평리조트에 가면 누구나, 진입로 왼편 호수 너머에 섬처럼 떠 있는 골프코스 페어웨이를 보게 된다. ‘용평나인’ 퍼블릭 골프장 9번 홀이다. 

나는 이 홀에 홀려 골프채를 처음 잡았다. 호수 건너 자작나무 숲을 배경으로 곱게 깔린 진녹색 페어웨이는, 골프를 전혀 모르는 이도 당장 건너가 공을 쳐보고 싶은 모습이었다. 젊은 여인들이 이 홀 페어웨이에서 골프채를 들고 사뿐사뿐 걷는 광경을 호수 건너편 콘도미니엄에서 지켜 보고난 얼마 뒤, 나는 골프를 배우기 시작했다

비슷한 경험을 했다는 사람들을 나중에 여럿 만났다. 1980년대 중반 이후 한국 골퍼들(용평 방문객들)이 가장 많이 기억하는 홀이 이곳일 것이라 생각한다.      


용이 꿈틀대는 땅

용평이라는 이름은 이곳을 처음 개발한 쌍용그룹의 상징이 용(龍)이었기에 붙었을 것이라고 막연히 여겨왔다. 그런데 그보다는 지명과 지형에서 나온 이름이라고 한다. 

이곳의 행정구역 명은 용산리(龍山里)다. 산이 용을 닮은 모양의 지명이며, 평창군 대관령면에 속한다. 우리나라에서 열두 번째 높은 발왕산(1459m)의 북쪽 사면이 대관령의 광활한 ‘고위평탄면’ 목장 터와 이어진 자리다. 

용평은 ‘용처럼 꿈틀거리는 산 속의 넓은 평원’이라는 뜻인 셈이다.     



용평을 품은 산 이름은 본디 팔왕산(八王山)이었다. 여덟 명의 임금이 나올 기운을 가진 산이라고도 하고, 여덟 왕의 묏자리가 들어설 산이라고도 전해진다. 하지만 ‘왕의 전설’은 일제 강점기에 지워져 '왕성할 왕(旺)' 자 발왕산(發旺山)으로 기록되었다고 한다. 2002년에 이르러 다시 임금 왕(王) 자를 이름에 모셔 ‘발왕산(發王山)’으로 바꾸었다.      


처음부터 세계 일류를 꿈 꾼 사계절 종합 리조트

1962년에 스키협회가 발왕산에 스키장 계획을 처음 세웠으며, 1970년대 초에 쌍용 그룹이 맡아 대규모 종합리조트를 추진했다. 한국 재계 6위이던 ‘쌍용양회’를 29세에 이어받은 김석원 회장은, 당시 세계 으뜸 급 환경 개발 디자인 다국적 회사인 ‘이도(EDAW Inc.)'에 ’세계 일류 수준의 사계절 종합 리조트‘ 계획을 주문했다.       

이도의 마스터플랜에 따라, 1975년 발왕산 정상에서 해발 700미터 지점까지 케이블카를 연결하여 (한국 최초의)스키장이 열렸고. 1982년에는 용평 콘도미니엄 여덟 동이 처음 문 열었다. 1985년에는 9홀 퍼블릭 골프장을, 1989년에 회원제 18홀 용평골프클럽을 문 열었다. 이와 함께 여러 종류의 대규모 종합 레포츠·숙박 시설을 차례로 갖추었다.      


이곳에서 수많은 국제 행사가 열렸다. 동계 아시안게임(1999), 평창동계올림픽(2018) 등은 용평리조트가 없었다면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다. 처음부터 국제 행사를 치를 수 있도록 계획했기에 디자인과 시공, 세세한 집기 시설에 이르는 모든 사항을 당대 세계 최상급 스포츠 레저 단지 수준으로 갖추었다고 한다.      

  

세계적 코스 디자이너가 설계한 한국 첫 골프장

용평 리조트에는 세 개의 골프장이 있다. 1985년 문을 연 용평퍼블릭(지금의 용평나인) 골프장, 1989년 개장한 18홀 ‘용평 골프클럽’, 2003년 문 연 18홀 ‘버치힐 골프클럽’이다. (이 중 버치힐은 [한국의골프장이야기] 제2권에서 이미 살펴보고 수록하였다.) 이 글에서는 용평 골프장(회원제 18홀과 퍼블릭 9홀)에 대해서만 살피려 한다.       



18홀 회원제 용평 골프클럽(이하 '용평GC‘)과 9홀 용평 퍼블릭코스(이하 ’용평나인‘)는 각각 우리나라 골프장 역사 흐름을 크게 바꾼 골프장들이다. 

1985년 ‘용평나인’이 문 열었을 때, 라운드 해본 골퍼들은 새로운 경험을 했고 매우 놀랐다. 

비록 짧은 9홀 대중제 골프장이었지만, 산중 지형을 거의 훼손하지 않으면서 낸 홀들은 다이내믹했고, 페어웨이에는 고운 양잔디가 깔려 있었으며, 매 홀 한 샷 한 샷마다 생각하며 쳐야 하는 난코스였다.   

이 코스를 설계한 사람은 미국인 골프코스 디자이너 로널드 프림(Ronald W. Fream)이었다. 서양 설계자가 한국 땅에 설계한 첫 골프코스이자, 서구 골프코스의 도전성과 전략성 개념을 한국에 선보인 골프장이었다.     

1989년 '용평GC'가 개장했을 때 한국 골퍼들은 더욱 놀라고 열광했다. 그때까지 라운드해온 골프장들과는 완연히 다른 개념의 코스와 운영 시스템을 경험하게 된 것이다. 

이 골프코스를 설계한 이는 로버트 트렌트 존스 2세(Robert Trent Jones Ⅱ)였다. 그가 이 코스를 설계함으로써, 한국 골프장은 세계 골프코스 흐름의 서구적 도전성과 전략성 유전자를 접종 받았다고도 할 수 있다.      


한국 골프장 최초의 다섯 가지

당시에 골프장 건설 실무를 총괄한 이상재 박사의 의견을 참고하여, 용평나인과 용평GC가 한국 골프장에 들여온 변화를 다섯 가지로 요약하여 적는다.

     

첫째, 

용평GC는 한국 최초의 ‘원그린 코스’다. 그 이전까지 한국의 모드 골프장은 투그린으로 운영되었다. 이것은 일본에서 영향 받은 것인데 일본과 우리나라를 제외한 세계 골프코스의 기준은 원그린이다.(용평나인은 투그린, 일부 홀 원그린) 용평GC는 세계 골프의 기준에 맞추어 원그린을 채택했다.       


둘째, 

한국 최초로 양잔디를 식재한 코스였다. 모래층을 20센티미터 두께로 포설한 위에 켄터키블루그래스 양잔디를 파종했다. 한국 골퍼들은 처음으로 푸른 양잔디 코스에서의 깨끗한 타구감을 경험하게 되었다. 그린도 두터운 천연 순수 모래(Pure Sand)층을 시공한 위에 파종했다.(그 이전의 그린 하부는 순수한 모래가 아니었다)      


셋째, 

한국에서 처음으로 산중지형을 그대로 살린 자연 친화적 코스로 설계했으며, 정확한 설계 도면을 바탕으로 골프코스 전문 조형사(Shaper)가 전략적 조형을 시공한 첫 골프코스다.     


넷째, 

한국에서 처음으로, 기본 설계부터 마지막 완공 감리까지 세계적인 골프코스 전문가들이 주도하고 완성한 골프코스였다. 샷밸류, 난이도, 다양성, 심미성 등의 골프코스 조성 개념이 전 과정에서 체계적으로 수행되었다.      

다섯째. 

남자 캐디도 처음, 노캐디도 처음, 골프 카트 운영도 국내 처음이었다. 플레이어가 캐디 동반 또는 노캐디 플레이를 선택할 수 있게 했으며 캐디의 전문성을 높이고, 골프카트를 수입하여 한국에서 처음으로 사용하는 등 선진 골프문화를 도입 운영했다.      


산마루코스 3번 파4 홀 - 맞은편에 발왕산 정상이 보인다


용평이 이끈한국 골프장의 진화(進化

용평나인을 설계한 로널드 프림과 용평GC 설계자 로버트 트렌트 존스 2세(이하 'Rtj Ⅱ')는 일찍이 같은 회사에서 일했다고 한다. 미국의 전설적인 골프코스 디자이너 로버트 트렌트 존스('Rtj Ⅱ'의 아버지) 설계 회사에서 일하던 로널드 프림이 독립하여 회사를 세우면서 처음 맡은 작업이 ‘용평나인’이었다. (이 작업 이후 그는, 클럽나인브릿지, 아시아나CC, 버치힐GC 등 한국의 유명 코스들을 설계하게 된다.) 

우리나라에서 파인비치골프링크스, 이스트밸리, 아도니스CC 등을 설계한 개리 로저 베어드(Gary Roger Baird)도 로버트 트렌트 존스 회사에서 일하다 독립한 코스 디자이너다. 

이들이 우리나라에서 이룬 실적으로 보면, 1980년대 말에서 90년대 이후의 한국 골프장들은 로버트 트렌트 존스 가문의 영향을 적지 않게 받은 셈이다. 

이후 페리 오 다이, 잭 니클라우스 등 외국인 설계가들이 국내 골프코스들을 설계하게 된 데에도 용평GC의 영향이 컸다고 하겠다.     


용평GC 조성 과정에서 Rtj Ⅱ가 파견한 감리자이자 코스 조형을 맡았던 더글라스 니켈스(Douglas Nickels)는, 이 작업 이후, 태영CC(블루원 용인), 지산CC, 프리스틴밸리, 파인크리크CC 등 국내 코스들의 조형 작업을 하게 된다. 그는 미국 미시건 대학에서 도시계획과 조경학을 전공한 골프코스 디자이너이자 현장에서 직접 중장비를 타고 시공하는 조형사(Shaper)였다. 골프코스 전문가들은 “조형사가 결국 코스의 품질을 결정한다”고 흔히 말한다. 그의 활약은 서구의 많은 전문 조형사들이 우리나라 골프 코스 조성에 참여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고, 한국 골프 코스의 전반적인 수준이 높아지는데도 보탬이 되었다. 

     

이 골프장 건설에 직간접으로 참여한 국내 인력들의 경험이 한국 골프장 조성 노하우를 발전시키기도 했다. 당시 쌍용엔지니어링에서 용평나인과 용평GC 건설의 현장 실시설계 책임자였던 이재충은 뒷날 서원밸리CC, 티클라우드CC, 파인리즈CC 등의 코스를 설계하게 된다. 조성 현장 책임자였던 이상재와 실무자였던 이혜원은 곤지암GC, 태영CC, 스카이72 등의 작업에 관여하는 한편, 로널드 프림, 더글라스 니켈스 등 골프코스 전문가들과 함께 국내의 많은 골프장들 조성에 참여한다. 

또한 당시 이들과 협업한 ‘임골프(고 임상하)’, ‘필드콘설탄트(김명길)’, ‘오렌지엔지니어링’ 등 국내 골프코스 설계·시공 회사들은 서양 전문가들과 의견과 도움을 주고받으며 한국 골프코스의 새로운 모델을 모색한다. 송호, 권동영 등 한국 유명 설계가들이 약진하게 되는 바탕이 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코스에 대하여     


용평리조트와 용평GC 개장 당시에는 ‘용평 회원’이 ‘상류 특권층’의 대명사처럼 통하기도 했다(지금도 개장 때의 회원 자격을 유지하거나 상속받은 이들이 많다.) 그런 한편 이 골프장 개장 이후 우리나라 땅에는 해외 유명 코스 디자이너들이 설계한 골프코스들이 많이 생겨났다. 한국인이 설계한 코스들도 그들에 견줄만한 수준에 올랐으며, 이른바 세계적 ‘골프코스 랭킹’에 드는 곳들도 나왔다. 명문 골프장을 넘어 ‘명품코스’라 불리는 곳들도 적지 않게 되었다. 이런 흐름 속에서 용평 골프장의 명성은 과거와는 달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용평GC의 가치와 매력은 역사성보다는 코스 자체에 있다.   

   


< 용평GC - 발왕산의 서사시 >  


이 골프코스 터는 해발 710미터에서 780미터 사이의 산중 고원이다. 태백산맥의 장엄한 대자연에 용이 숨어 있는 듯한 용산리(龍山里)의 지형을 따라 자리 잡았다. 

깊은 산중 사계절 종합 리조트의 휴양지 코스이지만, Rtj.Ⅱ 설계 코스답게, 토너먼트도 치를 만한 격을 갖추고 있다. 개장할 때 모습을 거의 손상 없이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데, 요즘 (소위 ‘명품’)코스들에 견주어도 반듯한 ‘클래스’를 보여준다.      


좋은 골프코스일수록, 골퍼가 살아있는 자연과 싸우고 교감하게 한다. 용평GC 코스는 수백만 년 흘러온 송천(松川) 골짜기와 대왕자작나무, 구상나무, 전나무 등 원시림이 무성한 등성이를 모험해 나간다. 자연의 서사시 같은 전개를 좋아하는 로버트 트렌트 존스 주니어 특유의 구성법이 잘 드러난다. 그는 평생 동안 시인이라 자처했으며 시를 쓰듯이 코스를 디자인 한다고 여겼다. 그가 40대 장년기에 설계한 이 코스에서. 예민한 이들은 수천 년 전 숲의 솔향기를 느낄 수도 있겠다. 


(Rtj.Ⅱ의 설계 세계에 대해서는 뒤에 나오는 ‘롯데스카이힐 제주’ 편에서 적으려 한다.)     



산마루코스강나루코스

처음에는 아웃코스 인코스로 불렀는데, 주인이 바뀌며 산마루코스, 강나루코스가 되었다. 

이름이 시(詩)처럼 곱다. 강나루코스에는 개울(송천)을 지나는 홀들이 있고 산마루코스는 그보다 다소 높은 등성이를 타고 간다. 평범한 골퍼들에게는 산마루를 넘고 강을 건너는 모험길 같은 라운드일 것이며, 휴양 골프를 즐기는 이들에게는 숲과 호수를 노니는 소풍일 수도 있다. 

그런 한편 영웅적인 골퍼들은, 이곳 산맥에 숨어 웅크린 용과 마주하는 가운데 발왕산에 숨어 잠든 여덟 왕(八王)의 억년 침묵과 홀마다 싸워나가기도 할 터이다.        


설레는 시작과 장렬한 마무리

산마루 코스에서도 강나루코스에서도, 첫 홀은 미지의 세계로 여행을 떠나는 두근거림으로 시작하고 끝으로 갈수록 극적인 모험을 선택하게 한다. (각 코스 8번, 9번 홀들이 극적이다.) 초중급자가 욕심 내지 않고 편안히 칠 수 있는 코스 구성이지만 상급자일수록 도전하고 싶어지는 욕망을 부르는 홀들이 기승전결의 스토리로 이어진다. 몇 개 홀들을 살펴본다.     


강나루 1번 파홀 - ‘Soul & Jazz'

강나루코스 1번 파5 홀

티샷에서 내리막 페어웨이 오른쪽 숲을 넘기면 아름다운 호숫가 마을이 나올 것 같다. 티샷이 왼쪽으로 너무 멀리 나가면 호수에 빠진다. 장타자는 투온(On in Two)도 가능하니 모험하지 않겠느냐고 첫 홀부터 유혹하는 것이다. 장타자가 유리할 수 있지만 볼이 떨어지는 지점의 언듈레이션은 힘만 좋고 정확성이 없는 골퍼를 걸러낸다. 투온 하려면 호수를 넘겨 그린을 공략해야 한다.

강나루코스 1번 홀 세컨샷 지점

이런 홀에서는 골프코스가 마치 재즈 음악 같다는 생각이 든다. 멜로디만 정해져 있을 뿐 스스로 자기의 영혼(Soul)을 담은 연주를 즉흥적으로 해나가야 하는 재즈처럼, 골퍼마다 자기의 방법으로 연주하고 춤추듯 플레이하는 것이다. 많은 골퍼의 인생 추억을 다양한 길로 담아내는 아름다운 홀이다.      


강나루 4번 파3홀 - ‘도깨비’ 같은 흐름

강나루코스 4번 파3 홀

용평 리조트로 들어가는 입구의 다리(용산교)에서 보이는 홀이다. 언뜻 평범하게 보일 수 있지만 산과 계류가 만나면서 역동적인 기운이 흐르는 파3 홀이다. 코스 조성 당시 실무자로 일했던 이혜원 박사에게 들으니, 송천(松川)의 격류가 부딪는 돌무더기 윗자리에 그린을 만들었다고 한다. Rtj Ⅱ 의 설계 도면대로 시공하느라 고생했는데 막상 만들고 나니 매우 변화무쌍한 파3 홀이 되었다고 했다. 

강나루코스에는 2번과 4번에 파3 홀이 있어서 몸도 풀리기 전에 두 번의 파3 홀을 플레이해야 한다. 이 4번 홀을 주의 깊게 지나가야 한다. 2단 그린의 굴곡이 미묘하고 바람의 영향을 잘 계산해야 하는······ 가끔은 도깨비 같은 홀이다.        


강나루 9번 파홀 - ‘용머리 그린

강나루코스 9번 파5 홀 그린에서 돌아본 모습

용산리는 산등성이에 용이 숨어 있는 듯한 지형인데 강나루 9번 홀은 홀 스스로가 용을 닮았다. 특히 그린 주변은 용이 여의주를 물고 오르듯 역동하는 모습이다. 프로 선수 수준의 장타자는 두 번째 샷에서 용머리 그린으로 공을 보낼 수도 있지만, 그린과 페어웨이 사이는 협곡처럼 깊게 꺼져있고 벙커가 앞뒤로 지키는 그린은 거칠게 꿈틀거린다. 두 번째 샷을 자신 있는 어프로치 거리에 보내놓고 볼 회전을 조절한 웨지샷으로 핀에 붙여야 한다. 

게임의 승부를 극적으로 마감하는 홀이며, 시각적으로도 강한 인상으로 남는다(그린에서 뒤돌아볼 때 더 장렬하다.)     


산마루 8번 홀과 마무리 아름다운 추억

산마루코스 8번 파5 홀

용평GC에 대해 이야기할 때 가장 많은 골퍼들이 기억하는 곳이 산마루 8번 파5 홀인 듯하다.

클럽하우스 테라스에서 내려다보이는 홀이다. 이글과 버디의 추억이 가장 많이 쌓인 홀이기도 할 것이다. 높은 티잉 구역에서 내려다보면 커다란 호수를 끼고 넓은 페어웨이가 왼쪽으로 돌아간다. 장타자들에게는 긴 파4 홀처럼 플레이할 수도 있는 홀이지만 티샷에 힘이 들어가면 호수에 공이 빠지기 십상이다. 

이 홀 역시 공략 방법이 재즈 연주처럼 골퍼마다 다르다. 그린의 굴곡이 크고 비정형이라 핀 위치에 따라 창의적인 공략이 필요할 수 있다. 

나는 용평GC의 모든 홀은 처음 모습 그대로 보존해야 한다고 여기는데 이 홀의 호수는 조금만 수정하면 더 생동감 넘치는 이야기를 담을 수 있으리라는 생각도 한다. 그만큼 ‘틀이 좋은 홀’이다. 

이 홀을 지나면 용평GC에서 가장 어려운 오르막 파4 홀이다. 7번(그린 플레이가 예민한 파3 홀), 8번, 9번으로 이어지는 마무리 리듬이 짜릿하다.         

산마루코스 9번 파4 홀


(용평GC에는 산중 코스 샷 밸류의 고전처럼 인상적인 홀들이 많으나, 여타 골프장과의 지면 형평성 때문에 여기서 줄인다. 언젠가 보완할 날이 있으리라 생각한다.)         


클럽하우스 자연과의 동화

용평GC 클럽하우스를 나는 좋아한다. 골프를 하지 않고 2층 식당의 테라스에서 코스를 내려다보며 차를 마신 적도 여러 번 있었다. 그 풍광은 수십 년의 계절마다 다르게 고왔다. 이 클럽하우스는 최소한의 크기로 절제된 기능만 갖추어 자연 속의 일부처럼 지으려 했던 듯하다. 세월의 흔적이 묻어가면서 낡아진 부분도 있지만 자연에 더 동화되는 모습으로 보인다. 조성 당시 실무 책임자였던 이상재 박사에게 물으니, 클럽하우스의 여러 건축 설계안 가운데 가장 소박한 것을 김석원 회장이 선택했다고 한다.   

        

< 용평 나인 - ‘한국 산중 코스의 살아있는 문화유적’ >

       

내가 용평 골프장 이야기를 쓴다고 하니, “용평 퍼블릭도 꼭 살펴보라” 권한 ‘골프장 전문가’들이 있었다. 그들의 젊은 날 라운드 추억이 있는 곳인 까닭도 있으나, 무엇보다 ‘한국 산중 자연을 그대로 살려낸 코스 문화유적’ 같은 곳이라며 권했다.

글 들머리에 적었듯이 나는 이 퍼블릭코스 9번 홀을 건너다보면서 골프를 하기로 결심했었다. 이 ‘용평나인’을 돌다 보면 개인의 추억과 한국 골프(코스)가 흘러온 역사의 흔적을 함께 되새기는 느낌이 든다.    

 

용평 나인 5번 홀 그린


옛날식 코스라는 말이 아니라 산중 골프코스의 본질 가치와 매력을 느끼게 된다는 뜻이다.

개발 당시 이 코스 자리는 화전민들이 원시림 속에 일군 감자밭이었다고 한다. 숲은 그대로 보존하고 밭이 있던 자리의 지형을 살려서 길을 내고, 8번 9번 홀을 돋우어 용평리조트 전체를 상징하는 쇼케이스의 런웨이처럼 빚어냈다.        

용평나인은 한국에서 가장 청정한 발왕산 해발 700미터 산중의 숲속을 함께 걷는 길이며, 용평리조트의 평화로움을 만끽하는 휴양코스라 할 수 있겠다. 한국의 좋은 골프장을 순례하는 골퍼라면, 이 코스를 음미해볼 만하다.       



결코 쉽지 않고 18홀 같은 9

초기에는 “프로 대회 우승자도 언더 치기 어렵다”고 소문났던 코스였다.(골프장 홈페이지에는 "박세리 프로가 연습라운드 하러 와서 1오버파를 쳤다"고 소개하고 있는데, 새삼 확인하기는 어렵겠다) 5개의 원그린 홀과 4개의 투그린 홀로 구성되었으며, 페어웨이가 두 갈래인 홀들도 있다. 18홀 라운드 하면 9홀씩 그린(핀)을 다르게 사용하여 전 후반 다른 코스처럼 플레이할 수 있다. 길이가 짧은 코스이지만 지형에 기복이 있고 페어웨이와 그린의 굴곡도 까다로운 편이므로, 매 홀마다 전략을 세우고 정확한 샷으로 공략해야 한다. ‘생각하는 골프’가 필요한 코스다.      

   

5번 파홀 이국적 풍치의 자연미 

용평나인 5번 파4 홀

이 홀은 동화적인 건축양식의 버치힐 콘도가 늘어선 능선을 따라 진행한다. 자작나무와 잣나무, 단풍드는 활엽수 들이 무성한 숲과 리조트의 인공미가 어울려 이국적인 풍광을 빚는다.  이 홀 페어웨이에는 경사가 있으므로, 자신의 비거리 능력을 감안하여 세컨샷 하기 좋은 곳으로 티샷을 떨어뜨려야 한다. 용평나인 코스에서 가장 시야가 넓고 다이내믹하며, 난도가 높은 홀이다. (이 코스에서는 자연의 흐름과 굴곡이 장해물이다)


8번 파홀 한국 골프 최초의 아일랜드 홀

용평나인 8번 파3 홀(티잉 구역에서는 아일랜드 형태가 잘 안보인다)

내가 듣고 조사하여 알기로는, 우리나라 최초의 아일랜드 홀이다. 반도 모양이긴 하지만 아일랜드 홀의 특징과 격을 갖추고 있다. 높은 데서 내려치는 파3 홀인데, 티잉 구역과 그린 사이를 가린 둔덕과 나무들 때문에 아일랜드 홀 느낌이 덜 난다. 나무들을 일부라도 옮겨 심거나 억제할 수 있다면 그린의 섬 모양이 살아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9번 파홀 용평의 런웨이

용평나인 9번 파4 홀

9번 홀은 용평리조트 전체의 상징 정원 같다. 발왕산에서 흘러내려오는 실개천을 가두어 호수를 만들고 그 위에 페어웨이를 띄워놓았다. 아일랜드 페어웨이가 아닌데도 건너편에서 보면 는 호수 위에 떠있는 홀 같다. 짧고 평평한 파4 마지막 홀이라 장타를 치고 싶은 마음이 들지만 호수에 공을 빠뜨리기 쉬우므로 정확하게 쳐야 한다. 페어웨이를 걷다 보면 용평 단지 전체를 끌어안고 나아가는 기분이 드는 홀이다. 언제나 젊은 여자들이 페어웨이를 패션 쇼의 런웨이처럼 사뿐사뿐 걷고 있을 것 같은 홀이기도 하고······           

 


용평에서 모나파크     


내가 아는 용평은 골프장과 스키장, 호텔과 콘도들이 거의 전부였다. 용평리조트가 있는 발왕산의 본디 이름이 팔왕산(八王山)이었다 하건대, 나는 겨우 일왕(一王)이나 이왕(二王) 남짓의 면모만을 엿보았을 뿐이다. 골프와 스키 종목의 성격으로 보면 용평 땅의 ‘용솟음치는’ 한쪽 면과 주로 교감해온 셈이다.     


발왕산 독일가문비나무 숲


발왕산에서는 지금도 자연의 신비로운 형상과 현상들이 끊임없이 새로 발견된다고 한다. 천년을 살아온 주목들의 군락지와 마유목들이 발견되어 정상 부근은 순례지가 되었으며 스카이워크라는 전망대가 생기기도 했다. 수년 전에는 해발 900미터 동쪽 사면에서, 1만여 평 넓이의 독일가문비나무 숲이 발견되었다. 오십여 년 전 쌍용그룹 김석원 회장 지시로 심었던 묘목들이 까마득히 잊힌 채, 깊은 산 속에서 장엄한 숲이 되어 있었다고 한다. 이 가문비나무 숲에는 명상의 공간이 조성되고 있다.      


발왕산 정상의 주목 (왼쪽), 드라마 겨울연가 촬영지 표식(오른쪽)


최근 들어 용평은 ‘모나파크(MONA Park)’라는 이름을 쓰고 있다. “어머니(Mother)인 자연(Nature)”이라는  말에서 따온 브랜드라고 한다. 동적(動的)인 스포츠 뿐 아니라 휴양과 치유, 숲길 순례와 치유 등 대자연에 귀의하는 정적(靜的) 문화 터전으로 영역을 넓히고 있는 듯하다.

‘모나파크’ 이름으로 발왕산의 본디 이름(팔왕산)이 안배한 여덟 왕의 면모와 왕좌를 온전히 품게 되길 바란다.      


용평은 한국 스포츠 레저 문화 역사의 ‘성지’라 불릴만한 곳이다. 한국 골프장의 역사도 용평 골프장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할 수 있다. 자연과 공존하는 한편 도전하는, 골프와 골프장의 본질 단면을 우리나라 땅에 실현해 선보인 것이 용평나인과 용평GC였다. 당시의 척박한 문화 환경에서, 이 깊은 산중에 골프장을 들이려한 도전을 존경한다. 

모나파크가 품은 용평 골프장이, 스스로 지닌 귀한 본질 가치를 더욱 선명하게 가꾸어 나가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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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포스팅은 [한국의골프장이야기] 제3권 수록을 위한 소통용 초안입니다.

좀더 상세하게 보완한 뒤 책에 싣고자 합니다.

글로 적힌 생각과 표현들은, 인용 표시된 것 말고는, 지은이의 고유한 저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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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골프장 이야기 세트(양장본 HardCover)(전2권) | 류석무 | 구름서재 - 교보문고 (kyoboboo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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