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골프장의발견 26]
[한국골프장의발견] ‘시즌2’ 연재 - '파인비치골프링크스' 편입니다.
‘시즌1’에서 연재한 24개 골프장 탐사기가 [한국의골프장이야기] - 첫 권 책으로 발간되어 사랑받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좋은 골프장들의 ‘코스의 속삭임까지 받아 기록’하는, 깊고 꾸준한 탐사를 이어가겠습니다.
(신문연재 하면서 네이버 블로그를 저장소로 사용해 옵니다만, 브런치에도 올려 봅니다)
7년 전 이 골프장 15번 홀에서, 제 동반자 가운데 한명은 드라이버를, 저와 또 한 명은 우드를 잡았고 나머지 한 명은 아이언으로 티샷 했던 것을 기억합니다. 네 사람이 친 공은 모두 그린에 이르지 못하고 절벽에 맞았으며, 이내 바다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이 탐사기를 쓰다가 생각이 나서 오랜만에 연락을 해보니 저를 제외한 세 명 모두 자기가 친 티 샷이 온 그린 된 것으로 기억하고 있더군요.
“산은 백번을 돌고 물은 천 굽이 굽이치네”
고려의 어느 시인은 해남(海南)의 모습을 이렇게 읊었습니다. 많고 많은 섬과 길고 긴 해안선이 끝없이 이어진 리아스식 해안(rias coast)의 반도 지역입니다.
그 굽이치는 해남 땅, 꽃의 본고장이라는 ‘화원(花源)’면의 바닷가 언덕에 이 골프장이 있습니다.
해남은 한반도의 남쪽 끝 땅이지만 ‘화원’은 남도의 서쪽 땅 끝이기도 합니다. 바다 건너 장산도, 안좌도, 하의도, 비금도 등 천여 개의 섬 사이로 해가 지는 모습을 보는 자리입니다. 새벽녘에 섬 쪽으로 빠져나갔던 바닷물이 오후의 햇살을 받으며 다시 밀려오면서, 옥색과 에메랄드 색을 거쳐 진감색 빛으로 변합니다. 그 빛을 가르며 크고 작은 배가 지나다닙니다. 이 앞 바다는 옛날 제주로 귀양 가던 이들의 서글픈 뱃길이기도 했습니다.
한국 최초의 진정한 시사이드 코스
‘파인비치골프링크스’라고 이름 붙은 골프장이지만 ‘링크스’라는 이름은 낯설게 느껴집니다. 링크스(Links)라 하면 거친 바닷가 바람 부는 모래언덕에 거칠게 물결치는 듯한 모양의 황무지를 떠올리게 되는데 이곳의 땅과 바다는 포근하고 평화롭습니다. 바닷바람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연 평균 기온이 20도 정도이니, 태풍 같은 천재지변 날씨일 때 말고는 땅과 사람을 어루만지고 지나가는 느낌이지요.
예로부터 해남 땅은 논밭이 너르고 바다가 너그러워 먹을거리가 넉넉했던 까닭으로, 사람의 성품이 순하고 인심이 두텁다 했습니다. 그래서 이웃 지방에서는 이 곳 사람들을 ‘해남 물감자’라는 말로 빗대기도 했습니다.
바다와 직접 닿는 자리에 골프장이 들어선 것은 나라 안에서 이곳이 처음이었다 합니다. 이 땅은 골프장이 생길 수 없던 자리였습니다. 골프코스는 해안에서 일정 거리 이상 떨어진 곳에만 지을 수 있도록 연안관리법 등의 법 조항이 가로막고 있었는데, ‘국토의 균형발전’ 필요성을 깨닫게 되던 시기에 전남 지방의 관광자원을 개발하기 위하여 ‘한국관광공사’가 ‘화원관광단지’를 조성하게 되었고, 이 자리에 골프장이 들어설 수 있게 된 것입니다. 2006년에 공사를 시작하여 2010년 9월에 문을 열었습니다.
“내가 설계한 코스 중 최고”
이 골프코스 설계의 루트플랜은 미국 설계가 개리 로저 베어드(Gary Roger Baird)가 했으며 조형설계는 데이비드 데일(David M. Dale)이 맡았습니다. 개리 로저 베어드는 우리나라에서 이스트밸리CC와 포천의 아도니스CC를 설계했고, 데이비드 데일은 제주의 클럽나인브릿지 코스 조형설계와 여주 해슬리나인브릿지 코스를 설계해서 우리나라 골퍼들에게 친숙한 분입니다.
골프장 설계에서 코스의 루트를 내는 라우팅(Routing) 작업과 조형 설계 모두 중요한 작업이겠습니다만 그 중 라우팅이 우선한다고 합니다. 이 코스 루트 설계자 개리 로저 베어드는 1960년대와 70년대에 로버트 트렌트 존스 디자인 회사에서 수석디자이너로 경력을 쌓은 후 독립하여 많은 유명 코스를 설계한 원로급 설계가인데, 자신이 수십 년 동안 설계한 코스 중 파인비치골프링크스를 대표작의 하나로 꼽고 있습니다.
그는 “내가 설계한 코스 중에서 최고의 절경은 파인비치다”라고 말합니다.
순위 평가를 넘어선 독특한 가치
파인비치골프링크스는 문을 열자마자 나라 안에서 가장 주목받는 골프코스로 떠올랐습니다. ‘코스 랭킹’을 평가하는 기관들은 모두 이 골프장을 높은 순위에 올려놓습니다. 골프매거진의 대한민국 10대 코스를 비롯해서 골프다이제스트의 평가에서도 줄곧 상위 순위에 오르내립니다. 2017년 퍼블릭코스로 전환한 뒤로는 ‘대한민국 10대 퍼블릭 코스’ 선정 목록에서 가장 윗자리를 다투어 옵니다. 회원제와 퍼블릭을 망라한 전체 골프장 평가로 보면, 2019년 골프매거진의 평가에서 국내 랭킹 4위, 같은 해 골프다이제스트 평가에서는 17위에 선정되었습니다.
그런 한편 이런 순위 평가들은 때로는 자신들이 내세운 평가 지표로 설명하지 못하는 결과를 내기도 합니다. 저는 파인비치골프링크스가 이런 평가들에서 나온 순위를 넘어선 독특한 가치를 갖고 있다고 봅니다.
이 골프장은 처음 문을 열 때부터 미국 캘리포니아 몬테레이 반도의 ‘페블비치골프링크스’와 비교되어 “한국의 페블비치”라고 불리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2013년 경남 남해에 ‘사우스케이프’가 문을 연 뒤로는 파인비치와 사우스케이프 가운데 어느 것이 더 멋진 바닷가 코스인가를 따져 비교하는 이들도 적지 않습니다.
"하늘이 내린 지형"
수억 년 전 중생대의 조산활동으로 산맥이 형성된 위로 몇 번의 빙하기가 찾아온 뒤 2만여 년 전 마지막 빙하기가 끝납니다. 지구를 뒤덮었던 두꺼운 얼음이 녹아 해수면이 상승하면서, 낮은 지역의 골짜기들은 바다가 되고 중간 높이의 산이었던 곳은 육지와 섬들로 남게 됩니다. 한반도 서남해안의 구불구불한 해안선과 다도해는 그런 과정에서 나온 세계적으로 희귀한 리아스식 해안(Rias Coast)이라 합니다.
이 골프장은 그 구불구불한 해안선 모양을 따라 조성되었습니다. 해안 언덕은 바다를 향해 튀어나왔다가 다시 움푹 들어갔다가 하면서 바다와 육지가 만나는 면을 길고 깊게 늘여 놓습니다. 바닷가 골프장은 세계에 많지만 이렇듯 만(灣Bay)과 곶(串Cape)을 들락이며 바다와 만날 수 있는 코스는 드뭅니다. 골프코스가 자리 잡을 만한 규모의 반도 지형은 흔하지 않고, 설령 있다 해도 그곳에 골프 코스를 앉히려면 여러 경제 문화와 법적 여건이 두루 맞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자연의 모습 그대로
이런 해안선에 ‘시사이드 코스’를 만들 수 있었던 것은 이 골프장 주인인 보성건설 뿐 아니라 설계자인 로저 베어드와 데이비드 데일에게도 하늘이 내린 행운이었을 것입니다.
1928년 전설적인 골프코스 설계가 알리스터 맥킨지 박사가 미국 캘리포니아 몬테레이 반도의 바닷가 언덕에 설계해 만든 사이프러스 포인트 골프클럽은 “신이 빚은 절경에 인간이 가장 적게 손을 대어 올려놓은 걸작”으로 칭송받아 옵니다. 그 뒤로 수많은 골프장 설계자들은 이렇듯 해안선이 구불구불한 반도 지형의 바닷가 땅을 동경하여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세계의 유명 설계가들은 "자연 지형을 그대로 보존하며 개발한다"는 것을 설계 철학의 제일 원칙인 듯 금과옥조로 모시고 있지요.
그러니 이 골프장이 천혜의 비경을 그대로 유지한 모습으로 개발된 것은 당연하고 옳은 선택이었습니다. 골프장 조성 이전의 사진과 현재 사진을 비교해 보면, 이 파인비치골프링크스만큼 자연지형을 거의 그대로 살린 곳은 드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만큼 원래의 자연 지형과 풍광이 절대적으로 아름답고 골프장 설계가들이 찾아 헤매던 이상적 장소였다는 것이겠습니다.
바다 절벽 위에 있으면서도 가장 높은 곳과 낮은 곳의 표고 차이가 25미터에 불과할 정도로 평활한 지형이기도 합니다.
이 코스의 조형 설계를 맡은 데이비드 데일(David M. Dale)은 “파인비치는 자연이 디자인한 걸작이다”라고 말합니다.
바다를 만지다가 떠다니다가...
파인비치는 파인코스 9홀 파 36, 비치코스 9홀 파 36으로 총 18홀 파72, 6,720미터(7,349야드)로 조성되었습니다. 코스의 진행 순서는 정해져 있지 않으나 이곳에서 정규 프로 토너먼트가 열릴 때면 파인코스를 전반(Front 9), 비치코스를 후반(Back 9)으로 진행합니다. 승부의 변수가 많은 홀들이 비치코스 후반에 더 많아서 토너먼트의 드라마틱한 마무리에 적합하기도 하고, 바다 풍경이 더 많이 보이는 비치코스가 텔레비전 중계에서 시청률이 높은 경기 후반에 더 어울리기 때문이기도 할 것입니다.
토너먼트가 아니더라도 전반의 파인 코스에서는 해남의 푸근한 구릉과 들녘을 느끼면서 곧 눈앞에 펼쳐질 바다를 예감하며 걷고, 후반의 비치코스에서는 바다를 만지며 바다를 떠다니는 느낌으로 라운드하는 순서가 이 코스가 가진 운율에 잘 맞습니다. 음악으로 치면 크레센도(crescendo)라 할까요.
‘차원 이동’을 경험하는 전개
전체로 보면 바다를 보면서 치는 홀이 10개, 꽃을 보며 치는 홀이 8개라 하겠습니다.
파인코스 1번 홀부터 6번 홀까지는 수려한 내륙 코스의 느낌으로 전개됩니다. 7번 홀부터 바다가 보이기 시작해서 8번 홀에서는 불현듯 우주의 다른 차원으로 이동한 듯 푸른 바다와 마주치게 되지요.
이 8번 홀 그린에 다가서며 보는 바다는 마치 아이맥스 입체 영화관에서 관람하는 듯한 느낌을 줍니다. 옥빛에서 코발트빛으로 짙어지며 이르는 수평선에서 섬들이 아스라이 사라졌다가 문득 떠올라 다가오는 다도해입니다. 그 바다를 향해서 티샷하는 파3 홀입니다. 이 홀의 그린은 아일랜드 형이 아닌데도 바다 위에 떠 있는 것 같습니다.
이 홀에서 바다를 마주하는 순간 1번 홀부터 6번 홀까지 경험했던 짜임새 있는 홀들과, 수국, 동백, 배롱나무꽃, 나비바늘꽃, 억새들의 속삭임 같은 것들은 까맣게 잊어버리게 되기 쉽습니다.
또한 이 홀 그린 너머에는 바다를 향해 선 솟대들이 무리지어 서 있지요. 이곳에서는 대개들 사진을 찍습니다. 자신을 찍고 홀 전체 풍경을 찍고 그린과 솟대 너머의 바다를 찍습니다. 그린 플레이를 마치고 나서 솟대를 닮은 모습으로 바다를 바라보다가 아쉽게 다음 홀로 넘어갑니다.
그 다음 9번 홀, 왼편 언덕 아래 넘실대는 바다를 보면서 클럽하우스로 돌아오는 풍광 또한 영화의 한 장면 속을 걸어가는 듯한 경험을 제공합니다.
‘좀 억울한’ 파인코스
파인코스의 플레이는, 쉽게 시작해서 점점 어려워졌다가 다시 살짝 풀어주고 바다로 이끌면서 적당한 난이도로 풍경과 게임을 함께 즐기며 마무리하는 탄탄한 리듬의 구성입니다. 도전하는 샷의 성공에 대한 보상이 있고 클럽을 다양하게 써야 하는 거리 구성 등 ‘샷밸류(Shot Value)도 짜임새 있게 안배된 코스이지요. 그런데 후반의 바다 풍경 홀들이 압도적인 느낌을 주어서 1번부터 6번까지 들녘 홀들이 제대로 기억되지 못하는 ‘좀 억울한 코스’이기도 합니다. 만약에 다른 골프장에 이 9홀이 그대로 들어간다면 훨씬 사랑받는 코스가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일랜드 형 그린이 있는 3번 파 3홀과 호수를 끼고 가는 4번 파4 홀에 좀 더 드라마틱한 컨텐츠를 부여하면 좀 더 특색이 살아나 전체 균형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비치코스 - ‘한국 최고, 최초’
비치코스는 그 아름다움이 ‘한국 으뜸’이라는 칭송을 받아옵니다. 진정한 시사이드 코스로는 ‘한국 최초’라 불리기도 합니다. 바다를 껴안고 돌다가 흠뻑 젖어서 나오는 듯한 서정성 때문에 코스의 기능적 가치가 오히려 덜 평가되는 코스일 수도 있습니다. 짧고 쉬운 홀로 시작해서 강, 중, 약의 리듬을 타다가 5번 홀부터 바다의 드라마가 시작되면서 아름다움과 난이도의 절정에 이르렀다가, 바다에 흠뻑 젖고 만지고 호흡하면서 귀환하는 모험의 드라마라 할까요.
이 가운데 특히 15번 홀(비치 6번) 파3 홀은 이 골프장의 진가를 함축해서 드러내는 ‘시그니처 홀’로 유명합니다.
<페블비치>와 <사이프러스포인트>의 ‘오마쥬’
앞서 이야기한 대로 이 골프장은 처음 문을 열 때부터 미국 캘리포니아 몬테레이 반도의 ‘페블비치골프링크스’와 비교되어 “한국의 페블비치”라고 홍보되기도 했습니다. 특히 이 15번 홀은 바다를 건너 치는 드라마틱한 풍광이 그 몬테레이 반도의 전설적인 코스인 ‘사이프러스포인트’ 골프장 16번 홀의 ‘오마쥬’라는 이야기를 듣곤 합니다. 그리고 국내에서는 남해 사우스케이프 16번 홀과 견주어지곤 합니다.
2019년에도 이 홀은 국내의 유력 골프잡지사로부터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파3 홀”로 선정되었습니다. 그만큼 아름다운 홀이 틀림없지만 이 홀을 그냥 ‘아름답다’고만 말하고 나면 무언가 아쉬움이 많이 남습니다.
반도의 반도의 반도의 반도......
해남(海南)군은 한반도의 맨 아래 달린 반도 형의 땅이며 이 해남에서 다시 머리 들고 나온 작은 반도가 화원(花源)면입니다. 그리고 이 골프장 비치코스는 화원반도에서 조심스레 벋어 나온 더 작은 반도 형 땅이며 다시 그 북쪽 끝 엄지손가락처럼 솟은 아기 반도 땅에 15번 홀 그린이 앉아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홀의 심미성은 혼자만의 모습에 기대지 않습니다. 반도에서 더 작은 반도로 돌아가는 이 홀 앞 뒤 길목의 풍광 흐름은 원래 아름다운 자연이 사람의 계획과 손길을 만나면 더 극적으로 아름답게 빚어질 수도 있음을 드물게 보여줍니다.이곳에서 뿌리내렸던 옛 사람들이 더 절대적인 자연미 속에서 살았을지, 지금 밟고 있는 땅이 고독한 선배 고산자 김정호 또한 밟았던 자리였는지 저는 궁금합니다. 이 홀 엄지모양 손톱 끝 땅을 그는 디뎌 보았을까요.
비현실적인 다도해 바다
앞서 적은대로, 이 골프장은 비치코스를 후반에 라운드 할 때 더 드라마틱하게 즐길 수 있습니다. 전반(파인코스) 8, 9번과 11번(비치 2번)에서 예고편처럼 옥색 얼굴을 보여주었다가 14번(비치 5번)홀부터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하는 다도해 바다는 신화의 배경처럼 비현실적입니다. 떠다니는 섬 사이 어디선가 수천 년 전 오딧세우스를 7년 동안 붙잡아 앉혔던 요정이 판소리 여운을 흘리며 솟아오를 지도 모른다는 공상은 저만의 것일까요.
14번 홀 그린 근처, 바다 방향으로 벙커를 둘러 쌓아놓은 잔디 둔덕은 하늘과 바다와 땅이 만나고 구름이 빚는 입체 그림을 시공간 속에 무심히 던져놓은 듯 전시합니다. 아마도 조형 설계가 데이비드 데일의 안목과 솜씨일 듯합니다.
한국 대표 시그니처 파3 홀
15번 홀, 레귤러 티에서도 바다 건너 200미터 너머 그린에 공을 보내야 하는 플레이어의 두근거리는 심장 근처까지 바닷물은 밀려옵니다. 섬 같은 그린 너머에는 파인비치의 상징이라는 한 그루 소나무(Pine)가 바람 속에 손을 흔듭니다. 그 뒤로 언뜻언뜻 수평선과 섬들이 펼쳐집니다.
핀을 향해 똑바로 쳐서 170미터 이상 보내면 바다 건너 절벽 위로 안전하게 공을 넘길 수 있으니 이 홀은 ‘플랜B’가 눈에 잘 들어오지 않습니다. 잘 치는 고수나 잘못 치는 하수나 모두 직접 그린을 노리고픈 것이지요. 프로급 골퍼들은 그린 위의 어느 곳에 공을 떨구어야 할지를 선택하겠지만 대부분의 골퍼들에게는 절벽을 넘겨 그린에 도달하는 것이 과제인 홀입니다. 비교적 가까운 왼쪽 절벽 너머 안전한 페어웨이 공간을 향해 티샷해서 두번째 샷으로 온그린 할 수도 있지만 이 장엄한 홀에서 누가 그렇게 치고 싶겠습니까.
고민은 어떤 클럽으로 쳐야 할까 하는 것입니다. 이곳은 이 골프장에서 바람이 가장 많은 자리이니, 이 홀은 골퍼의 마음을 시험하고 샷을 변별합니다. 이 홀에 이르기 전에 플레이어는 이미 14개의 클럽을 거의 모두 사용했을 것입니다. 아마도 이 홀에서 마지막 하나의 클럽을 뽑아야 할 수도 있지요. 2010년 이곳에서 <한양수자인 파인비치오픈>대회가 열렸을 때 215미터로 세팅된 챔피언 티에서 선수들은 대부분 3번 우드를 잡았습니다. 장타자 김대현 선수도 맞바람 부는 날에는 아이언을 잡지 못하고 하이브리드 클럽을 사용했다가 온 그린 하지 못했습니다.
이곳에서 많이 플레이해본 골퍼들은 그린 왼쪽 끝을 겨냥하여 치는 것이 가장 안전하고 좋은 스코어를 얻을 확률이 높은 방법이라고 권합니다. 2019년 가을의 제 라운드 동반자는 드라이버를 선택해서 그린을 훌쩍 넘긴 뒤에 ‘칩인 버디’를 하고 겸손한 표정을 지었고, 저는 우드 티샷을 해서 그린 앞 에이프런에 놓인 공을 러닝 어프로치로 핀에 붙여 파를 한 뒤 의기양양했습니다. 이 바다를 건넌 그 공의 궤적을 평생 기억할 것입니다.
샷밸류, 난이도, 심미성, 기억성이 두드러진 구간
이 홀과 그 다음 16번 홀은 게임의 승부를 결정짓는 변곡점이기도 합니다. 16번 홀이 핸디캡 1번, 15번 홀이 핸디캡 2번으로 어려운 홀들인데, 바람이 불면 15번 홀에서 스코어의 변화가 많이 생기고 그 다음 홀에서 승부를 뒤집으려다가 더 큰 변수가 발생하기 쉬운 것이지요.
16번 홀 또한 바다를 건너는 티샷을 해야 하되, 오른 쪽 푸른 절벽 위의 페어웨이 벙커를 넘기면 짧은 아이언으로 어프로치 할 수 있으므로 도전에 따르는 보상이 안배된 433미터 길이의 파4 홀입니다. 이 홀에서 장타자 김대현 선수도 두번이나 바다에 공을 빠뜨리고 말았지요. 샷밸류가 높은 홀들이 이어지는 이 구간의 풍광이 아름답기까지 하니 기억에 오래 남을 수밖에 없습니다. 오후에 시작한 라운드라면 이 홀 즈음부터 노을 지는 바다를 보며 플레이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7년 전 함께 라운드 했던 이들에게 “파인비치에서 어느 홀이 가장 기억나느냐” 물으니 하나같이 15번 파3 홀 밖에 기억하지 못하더군요. 그것도 망령되이 자기 멋대로 말입니다......
제가 쓰는 이 글이 그들의 추억도 살뜰히 되살려 주길 바랍니다. 스케일이 좀 큰 우스개도 덧붙입니다. 이 골프장 관계자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파인비치는. 태평양 건너 페블비치골프링크스, 사이프러스포인트와 워터해저드를 함께 쓰고 있어요.”
솟대를 닮은 해송들
육지의 소나무(陸松)들이 붉은 색을 띠는 적송(赤松)이라면 이곳의 소나무들은 소금기 어린 바닷바람을 맞아 검은 색을 띠는 해송(海松)입니다. 바다를 보는 홀에 이 소나무들이 방풍림 역할을 하고 있었는데 언제부터인가 가지치기 작업을 해서 솟대를 닮은 모양으로 다듬어 놓았더군요. 아마도 바다 풍경을 가리지 않으면서 8번 홀의 솟대들과 시각적인 연속성을 주려는 조경 의도인 듯합니다. 나무의 생명 건강에 해로운 것은 아니라 하더군요. 저는 흥미로운 시도라고 봅니다. 이 소나무와 솟대들 끝에 머나먼 바다 향하는 그리움이 걸려 있는 듯합니다.
수국과 배롱나무, 동백꽃, 산다화, 양귀비꽃......
비치코스 4번 파3 홀은 특별히 ‘수국(水菊)홀’이라고 불립니다. 이 홀 전체가 수국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여름 내내 꽃이 핍니다. 골프장 측에서는 “6~7월에 이 홀은 바다를 보는 홀보다 아름답다”고 자랑합니다.
수국 꽃은 이 홀 뿐 아니라 다른 홀에서도 많이 핍니다. 꽃이 피는 동안 이 골프장에서는 ‘수국축제’를 열기도 합니다. 수국 뿐 아니라 배롱나무 붉은 꽃, 개양귀비 꽃, 나비바늘꽃 같은 정겨운 꽃들이 코스 곳곳에 지천입니다. 꽃이 없다 싶은 자리엔 억새와 수크령이 일렁이고 그렇지 않으면 바다가 펼쳐지는 것이니, 어쩌면 지나치게 꽉 찬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꽃의 본고장’ 화원(花源)이라는 지명에 어울리게 이른 봄에 동백꽃, 매화 수선화가 피기 시작해서 철마다 다른 꽃향기가 넘쳐난다 합니다. ‘링크스’라는 황량한 느낌의 이름과는 다르게 고운 골프장이지요.
늘 푸른 양잔디
이 골프장의 ‘스루 더 그린(Through the Green)’ 잔디는 켄터키블루그래스입니다.
페어웨이나 러프라는 말은 본디 골프의 정식 용어가 아니라 합니다. 해저드를 제외한 티잉 구역과 그린 사이의 모든 공간은 ‘스루 더 그린’으로 정의됩니다. 골프가 처음 만들어질 때 링크스 지형에서 “양과 토끼가 풀을 뜯어 먹은 곳이 페어웨이가 되었다”고 하는데 양이나 토끼가 일정한 모양으로 풀을 뜯지는 않았을 것이므로 페어웨이와 러프의 구분은 없었다는 것이지요.
켄터키블루그래스 양잔디는 추운 지방이 고향이므로 우리나라의 고온다습한 여름을 견디기 힘들어 합니다. 그래서 이 양잔디를 심은 내륙지방 골프장들은 여름이면 ‘잔디 관리 초비상 상태’가 됩니다. 파인비치는 바닷가에 있기에 해풍이 열대야를 막아주어 켄터키블루그래스의 생육 환경이 비교적 나은 편에 듭니다. 그래도 한여름을 지나고 나면 약 한 달 정도 기간에는 군데군데 잔디가 상해 있는 것을 보게 되기 쉽습니다. 또한 그린에 식재한 벤트그래스가 페어웨이로 번져서 얼룩얼룩한 상태가 가끔 보이게 되기도 합니다.
손님을 상대적으로 많이 받는 우리나라 퍼블릭코스에서 양잔디의 상태가 늘 완벽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손님을 극히 적게 받는 우리나라 회원제 코스 중 다섯손가락 안에 드는 최고 회원제 코스의 양잔디 페어웨이가 2018년 여름 더위를 못이기도 녹아내려서 쉬쉬하며 복구한 사례도 골프장 관계자들 사이에서는 공공연한 비밀이라 합니다. 잔디에 대해서 쓰자니 “잔디 상태는 장담할 수 없고, 그저 공들여 관리하는 방법 밖에는 없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이 골프장의 페어웨이 잔디는 보통 때 15~18mm, 대회를 치를 때는 12mm 높이로 깎으며, 그린은 스팀프 미터 계측 기준으로 평소에 2.7미터, 대회 때는 3.2미터 스피드로 관리한다 합니다.
‘시크릿 가든’을 찍은 명소
2010년 겨울 SBS 방송에서 방영되었던 인기 드라마 ‘시크릿 가든’의 촬영 흔적이 이 골프장에 남아 있습니다. 이른바 ‘골프장 키스 신’이 촬영된 8번 홀은 드라마 때문이 아니어도 워낙 아름다운 것으로 유명하지만, 네 명의 주인공이 함께 바비큐 파티를 하는 장면을 찍은 장소가 지금도 클럽하우스 앞에 보존되어 있습니다. 팽나무 그늘아래 석축 정원에서 낙조로 물드는 바다를 바라보는 ‘포토제닉’한 자리라서 이곳을 방문한 이들이 사진을 찍어 남기는 장소입니다.
얼마 전까지 이 자리에서 주말마다 ‘노을음악회’가 열렸다고 합니다. 저는 관람하지 못했는데 붉은 노을 가득한 바다를 배경으로 섹소폰을 연주하는 장면을 동영상으로 보고 감탄한 적이 있습니다. 이런 문화 컨텐츠는 다시 살려내면 좋겠습니다.
바다 품에 안긴 클럽하우스
클럽하우스는 규모가 꽤 큰데도 낮아 보이고 정겹습니다. 남해의 사우스케이프 클럽하우스가 바다를 내려다보는 정상에서 스스로의 존재감을 우아하게 드러내 보이며 먼 바다로 무한히 날아가려는 여신을 붙잡아놓은 듯한 모습이라면 이곳 클럽하우스는 아름다운 자연에 소박하게 안기고 동화되려는 느낌입니다. 자연을 지배하려 하지 않은 듯 조심스럽게 낸 동선이 겸손하게 느껴집니다.
클럽하우스와 함께 42실의 크고 작은 객실이 있습니다. 큰 객실은 좋은 호텔의 스위트룸 수준이고 작은 객실도 넉넉한 크기이며 실내의 소재와 디자인이 자연친화적인 느낌입니다. 그리고 객실에서 바다가 보입니다.
클럽하우스 식당에서는 해남의 바다와 땅에서 난 청정 재료로 만든 음식들을 내고 있으니 이곳에서 먹고 자며 골프를 즐기기에 부족함이 없겠습니다. 클럽하우스 음식은 당연히 값싸지는 않지만 골프장 내 식당인 것을 감안하면 적당한 가격이고 맛도 뛰어나다는 평가를 골프 전문 기자들이 여러 매체에 썼더군요.
낮의 둘레길과 밤의 산책로
이 골프장은 ‘오시아나관광단지’ 안에 있습니다. 한국관광공사가 제주 중문, 경주 보문에 이어 국내 3대 관광단지로 조성하는 관광지라고 합니다. 그래서 파인코스와 비치코스 옆에 붙은 전남개발공사 소유의 ‘오시아노 코스’ 9홀이 함께 운영됩니다.
관광단지인만큼 볼거리도 많다고 하는데 골프장에서 숙박하는 골퍼들을 위한 것으로는 '해안 둘레길'과 야간 산책로인 '천사의 길'이 있습니다. 해안 둘레길은 골프장 근처 바닷가를 걷는 2.5킬로미터 산책길이며, 백사장을 밟으며 해넘이를 볼 수 있습니다. 천사의 길은 골프장 안에 조성한 야간 산책로입니다. 클럽하우스 숙소에서 파인코스 9번 홀 해안 전망데크에 이르는 왕복 1,004미터 길에 조명이 설치되어 밤바다의 정취를 느끼며 걸을 수 있습니다.
"거북이 모양의 땅"
이 탐사기의 초고를 보여드렸더니, 경영컨설턴트 이기동 박사께서 이런 말씀을 주었습니다.
“파인비치가 거북이 형상의 지형에 위치하고 있고, 이런 차별화된 특성이 골프장의 독특한 스토리텔링으로 활용되지 않고 있다는 점이 아쉽습니다......(중략)...... 15번 홀 그린 형상을 엄지 모양 손톱끝이라고 표현하셨는데 골프장 전체를 놓고 보면 거북이 형상의 지형적 특성도 보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중략)...... 이런 풍수적 명당의 기를 받아서 그런지 이곳 골프텔에서 잔 사람들은 여러 체험(불면증이 있는 사람이 숙면을 했다는 등)을 말하고 있더라고요.”
제가 '한국의 골프장'에 대한 글을 쓰고 책으로 내고 있습니다만, 이 작업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는 기록하면서 거듭 깨달아갑니다.
골프장은 본디 버려진 황무지에 만드는 것이라 하는데 우리나라 골프장들은 대부분 쓸모 있고 좋은 땅에 만들어졌습니다.
명당에 절이 있는 것은 땅이 스스로 높은 법력을 부른 것이라 하는데, 우리나라 대부분 골프장 땅들의 기운과 사연들도 범상치 않음을 알게 됩니다.
저는 이 골프장을 ‘관능적’이라 느낍니다.
흔히들 이곳을 남해의 사우스케이프와 견주기도 하는데 두 골프장을 간단히 비교하기는 어렵습니다.
굳이 표현하자면 사우스케이프는 어느 고독한 크리에이터가 남해 절해고도에 선라이즈와 선셋 사이의 시공간을 조성하고 시간을 가두어 놓은 결계(結界) 같은 느낌으로 저는 이해합니다. 천헤의 풍광 위에 인공의 작품으로서의 개성적인 명품 아우라를 입혀 놓은 ‘절대 공간’의 느낌이지요.
그와는 달리 파인비치는 사랑스러운 풍광에 마냥 안기려는 들어앉음입니다. 시설이 풍광을 지배하려는 욕망이 보이지 않습니다. 들판과 바다, 섬과 하늘, 지나는 나그네에게도 열려 있는 듯하지요. 꽃 옆에 있으면 그냥 웃고 있어도 함께 아름다워지는 것인데 서양 미녀를 데려와 꽃을 들고 서 있게 할 필요까지는 없다고 보지 않았겠는가 싶은 자연스러움입니다. 그 자연스러움이 마냥 품고 싶고 부비고 싶은 관능을 뿜어냅니다.
풍광과 골프코스를 떼어놓고 볼 수는 없겠지만, 바다를 낀 풍치의 심미성을 접어놓더라도 샷 밸류와 난이도를 비롯해서 플레이하는 코스의 조성 자체가 조화롭습니다. 아름답기만 한 코스가 아니니, 홀마다 개성이 다르고 공략법이 달라서 코스가 골퍼에게 던지는 질문이 입체적이고 향기롭다 할까요.
이곳을 다녀온 뒤의 메모에 제가 시 구절 비슷한 운문을 적어 놓았더군요. 감흥이 지나쳐 글의 품격은 덜 갖추었으되 이 골프장의 관능적 느낌을 산문으로만 담기는 어렵기에 일부분을 남겨둡니다.
‘파인비치’에서 무덤덤한 인간쯤 되어야
득도하는 것이다
8번 홀 바다 멀리 보이다 숨었다 하는
섬 따위는 눈에 품지 않고
나비바늘꽃 개양귀비 꽃무리의 간지러운
속삭임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
그리움에 목이 빠진 솟대들과, 그를 닮아가는
소나무들의 열망도 본체만체 하라
옥빛과 쪽빛이 햇빛아래 교미하는 바다와
진진분홍 배롱나무 꽃, 철쭉과 수국의
흐드러진 욕정도 물리쳐야 한다
15번 홀 심장까지 밀려오는 파도를 건너치고
16번 해안의 푸른 절벽을 넘겨 칠 때
눈 감고 공과 과녁에만 집중하라
천개의 섬이 떠다니는 바다와 동행할 때도
함께 떠다니지 말 것이다
바람의 몸내음도 맡지 마라. 쳇베이커가
뒷모습으로 부는 트럼펫 음률의 낙조
고산자 김정호의 지친 발바닥을 달래주었을
판소리 여운 같은 땅끝 울음도 듣지 마라
이곳에서는 모든 것이 다가와 표정 짓고
요정처럼 속삭인다. 칠 년 동안 속살을 나누고
섬들을 떠다니며 천년쯤 머무르자고
파인비치에서는 아무 것도 보지 말고
듣지 마라......(후략)
서사와 서정이 이렇듯 풍부한 골프장은 드물겠습니다.
다만, 너무도 풍성한 이야기들이 아직 10분의 1도 발견되지 못했으니, 골퍼가 좋은 스코어를 받아 쥐었다 해도 100분의 1도 느끼지 못하고 올 수도 있는 골프장입니다.
글 / 류석무
[한국의골프장이야기] 지은이입니다.
이 내용을 앞으로 보완하고 다듬어 [한국의골프장이야기] 둘째 권에 넣을 예정입니다.
사진은 파인비치골프링크스에서 제공한 것을 주로 사용하였으되, 일부 사진은 글쓴이가 직접 찍은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