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류석무 Feb 13. 2020

“캐디 버릇이요?”

[도화도주의 골프남녀]

노랗게 물든 느티나무 숲 아래 누릇누릇 불긋불긋하게 물들어가는 금잔디 페어웨이를 아이언으로 가리키며 A가 말했다.

  “언니 저런 걸 잔디단풍 든다고 하는 거야. 알어?” 
  “네.”
  나이 든 캐디가 짧게 대답했다.
  “작은 언니는 알어?”
  “몰랐습니다. 배우겠습니다.”
  어린 수습 캐디가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라운드를 시작할 때 담당 캐디가 수습캐디를 데리고 와서 인사시켰다. 캐디 실습이니 양해를 구한다고 했다. 스무 살 정도 되었을까. 젖살이 미처 빠지지 않은 듯 통통한 볼에 사슴처럼 여린 눈빛의 수습 캐디는 긴장한 표정으로 ‘배꼽 인사’를 했다. 골프 카트에 탄 채로 인사를 받는 동반자들의 표정이 급히 환해졌다. 선임 캐디는 나이가 삼십 대 중반을 넘은 듯 완숙한 분위기에 키가 크고 얼굴 윤곽이 또렷한 서구풍의 용모였다. 다 함께 탄 카트가 출발하자 마자 B가 말했다. 
  “언니는 전지현 같고, 작은 언니는 송혜교 같네.”
  “감사합니다.” 
  선임 캐디가 짧게 대답했다. 
   
  경기도 광주시에 있는 이름난 골프장이었다. 먼 산에는 파스텔화처럼 단풍이 만발하고 페어웨이 잔디 위로 노란 은행잎이 쌓여 뒹구는 가운데 높고 푸른 하늘이 뭉게구름을 띄우고 있었다. 
  은행잎의 영롱한 빛을 닮은 황금색 드라이버로 티샷을 한 C가 채 타령을 했다.
  “500만 원짜리 드라이번데 잘 안 맞네~”
  여배우 닮은 캐디를 두 명이나 받아들인 중년 남자 팀의 분위기는 단풍 숲처럼 알록달록했다. B는 기회가 날 때마다 ‘아재 개그’를 풀어 놓느라 농인지 희롱인지 말의 들고 남과 옅고 짙음이 어지러웠고, A는 자신의 해박함을 드러내는 골프 지식으로 캐디의 자세와 나아갈 길을 설파하는 교육에 열을 올렸다. C는 장비 자랑에 집착했다.  
  “이거 봐라. 언니가 150미터라고 불러줬는데 내가 이걸로 재 보니 143미터 밖에 안돼요. 이게 세계에서 제일 비싸고 정확한 거거든.”
  캐디에게 홀까지의 거리를 기껏 물어보고서는 거리 측정기를 들여다 보며 C가 찡얼댔다. 
  “옛날에 이거 남OO 골프장 캐디언니가 직접 손으로 떠서 준거야.” 
  B가 우드커버를 꺼내 들어 보이면서 십 수년 전 명문 골프장 캐디들과 몰래 사귄 적 있었노라고 집요하게 자랑했다. 동반자들에게 한 말인지 캐디들에게 건넨 얘기인지 구분하기 어려웠다.
  A는 이름이 좀 알려진 골프 전문가, B는 유명 대학 교수, C는 대기업 계열사 대표였다.
   
  어여쁜 캐디들의 등장으로 경쾌했던 분위기는 두번 째 홀에서 ‘전문가’ A의 제안으로 스트로크 내기 게임이 시작된 뒤 ‘교수’ B가 낸 두 번의 오비와 ‘대기업 대표’ C의 연이은 벙커 탈출 실수로 엄숙하게 변하더니, 파3홀 명백한 미스 샷이 언덕을 맞고 우연히 홀 바로 옆에 붙어 버디를 한 ‘전문가’가 마치 진정한 실력의 결과였던 양 시치미를 떼고 캐디에게 자랑을 하면서 비열한 기운으로 흐르기 시작했다. 

  골프가 ‘신사의 스포츠’라고 하지만, 내 경험에서는 ‘신사를 만나기 힘든 운동’ 또는 ‘나와 동반자가 서로 신사가 아님을 알아채게 되는 게임’일 경우가 적지 않았다. 
  샷 하기 전 빈 스윙을 두 번 반씩 하는 ‘교수’의 습관을  보며 “두 번 반이네” 하며 슬쩍 들리게 말하는 ‘전문가’에게, ‘교수’가 “남의 루틴에 대해 뭐라 하는 것은 매너가 아녜요” 라고 짐짓 미소 지으며 말하자 ‘전문가’는 “죄송합니다. 아픈 데를 건드렸군요” 라고 말하며 싱글싱글 웃었다.

  돈 내기나 경쟁이 있는 게임에서 상대의 심기를 불편하게 긁어대는 것은 본받을 일은 아닐지언정 실용적이다. 상대자가 그 실용성을 내심 경멸한 나머지, 보란 듯이 일부러 더 명예로운 행동을 하는 것은 스스로의 마음에는 영웅적일지라도 객관적으로는 참혹한 결과를 낳고 만다. 현실 세계에서 그렇듯 골프코스에도 정의는 드물게 임하는 것이라서, 비슷한 실력에서는 '실용적인' 이가 대개는 더 좋은 결과를 얻는다. 그러나 아무리 숭고한 내기 게임에서라도 한 사람이 구사하는 ‘실용적’ 언어가 일관되게 성과 지향적이라서 반복적인 집요함을 드러낼 때는 예측할 수 없는 부작용이 나오기도 한다.

  ‘전문가’가 구사하는 실용적 언어는 절묘하고 효과적이었다. 불행히도 디봇 자국에 공을 빠뜨린 ‘교수’가 “디봇 빠진 건 그대로 치나요?” 라고 묻자 ‘전문가’는 “네 빼놓고 치세요. 저는 안 빼놓고 칩니다만…”이라며 농담인지 진담인지 알 수 없는 말을 던지고 앞으로 걸어갔고, 고민 끝에 옮겨 놓고 친 ‘교수’는 강하게 뒤땅을 치며 연못에 공을 빠뜨렸다. 한 번은 드라이버가 빗맞은 내 티샷 공보다 50미터 이상 더 나가 있는 자기 공을 가리키며 ‘전문가’는 “비거리 차이가 워낙 많이 나네요” 라고 말하기도 했는데 그 말은 몇 홀 지나는 동안 계속 귀에서 맴돌았다. 

  동반자들도 비슷해져 갔다. ‘전문가’가 두 번째 샷에서 연못에 볼을 빠뜨리고 연못을 건너가서 4번째 샷을 하려고 하자 ‘교수’가 ‘전문가’에게 “칼 같은 매너를 늘 강조하시는 분이 그러시면 됩니까. 연못 건너기 전에서 쳐야죠. 골프가 신사의 스포츠라고 방송에서 말씀하시는 거 잘 봤습니다.” 라고 빈정댔다. 그때까지는 ‘전문가’ 혼자서 돈을 따고 ‘교수’가 가장 많이 잃고 있었는데 그 홀에서 ‘교수’가 버디를 하고 ‘전문가’가 ‘양파’를 하면서 분위기가 뒤집어졌다. ‘전문가’가 양파를 하자 동반자 세 명은 모두 박장대소하며 스스로 신사가 아님을 감추려 하지 않았다. 더 나아가 나는, ‘전문가’가 칼럼인지 방송인지 에서 들먹였다는 ‘골프는 신사의 스포츠다.’라는 말과 본디 서양 신사도의 기본 덕목이라고 알려져 있는 ‘관용과 봉사’가 ‘우리의 이 허접스러운 골프에서 도대체 어떻게 관계 되는가’를 ‘전문가’에게 대놓고 물어보는 비열한 이죽거림도 서슴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홀에서 ‘전문가’가 소리를 질렀다. 
  “이거 봐 언니! 6번 갖다 달랬는데 왜 9번을 줘! 이걸로 쳐서 많이 짧았잖아!”
  수습캐디가 얼굴이 잿빛이 되어 쩔쩔맸다. 아까부터 ‘전문가’는 선임캐디와는 말을 안하고 수습캐디를 거의 개인 전용으로 부리고 있었다. 그 홀에서 간신히 보기를 한 그는 꾸짖는 투로 캐디의 본분과 자세에 대하여 수습캐디에게 일장 훈시를 해 댔고, 옆에서 지켜보던 ‘교수’가 역성을 들었다.
  “아이구 우리 이쁜 혜교씨한테 왜 그러세요? 신입이니 잘 모를 수 밖에 없죠.”
  “그러니까 처음부터 제대로 가르쳐야 하는 거예요. 요새 캐디들이 버릇이 잘못 든 애들이 많아요. 그리고 아까부터 전지현, 송혜교 하는데 그거 듣는 사람 입장에선 성희롱이에요. 교수님이 이런 일 한다면 정우성, 현빈 같다고 실없는 소리 들으면 기분 좋을 거 같아요?”
  “이런 일? 이런 일이 어때서요? 전문가라는 분이 그런 말 하는 인식이 더 문제가 있는 거 같은데요?”
   
  옳은 이와 그른 이, 맞는 말과 틀린 말들이 알 수 없이 뒤섞이다가 결국은 내기 골프에 그 말들의 감정이 흘러 들어가 ‘교수’가 배판을 부르고 ‘대표’가 ‘두 배판’을 부르고 다시 ‘전문가’가 ‘세 배판’을 부르기에 이르렀다. 내기가 커지면서 서로의 심기를 긁는 ‘실용적인 언어’는 서로 간에 점점 효율적으로 구사되고 발전되더니 입에서 나오는 말 뿐 아니라 퍼팅 라인에서의 사람 그림자와 장갑 벗는 소리로까지 공공연히 서로를 견제하는 지경이 되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16번 홀에서 ‘대표’가 티샷 오비를 내자 ‘전문가’가 즉시 ‘굿샷’을 외쳐댔고 ‘대표’는 그 자리에서 500만원짜리 황금빛 드라이버를 무릎으로 꺾어버리고는 “전지현 씨 내 빽 내려!”라고 단호히 명령했으며, 그때까지 돈을 가장 많이 잃은 ‘교수’는 “안돼, 끝까지 쳐!”라고 외쳤다.                                                  

                                                                              

수습 캐디는 얼굴이 파래져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선임 캐디는 어린 수습캐디의 등을 말없이 토닥토닥 두드려 주고 있었다. 그녀의 눈에서 노여움이 잠시 비치다 갈무리되는 것을 나는 보았다. 나는 알 수 없는 미안함에 선임 캐디의 등을 토닥여 주고 싶은 마음이 염치 없이 들기도 했다. 그런 가운데도 ‘교수’는 어느 틈엔가 특유의 성정을 되찾아 선임캐디의 등을 실제로 툭툭 치고 쓰다듬는 시늉을 하며 “괜찮아 내기 골프가 원래 그런 거니 놀라지 마요… 근데 집은 어디요?” 라는 말을 던지기도 했다. 그녀의 눈꼬리가 서늘하게 떨리는 것 같았다.

마지막 홀 ‘네 배 판’에서 극적으로 파를 해서 돈을 딴 ‘전문가’가 딴 돈으로 캐디 비용을 지불하고 저녁을 사겠다고 말했으나 모두 저녁 약속이 따로 있다고 했다.
‘대표'가 말했다.
“어이구, 오늘 세계에서 제일 비싼 골프채도 하나 부러뜨리고 참 신사적으로 비싸게 놀았네요. 골프가 항상 신사들끼리만 칠 수 있는 건 아닌데 오늘 모처럼 좋은 경험 했습니다. ”
‘교수’가 말했다.
“뽀찌도 없습니까?”
‘전문가’가 웃으며 말했다
“저희는 보통 ‘피눈물’ 룰로 칩니다.”

‘전문가’는 선임 캐디에게 후한 팁을 건네려 했으나 선임 캐디는 정색을 하며 사양했다. 수습 캐디에게 건네려 하자 앞을 막아서며 또박또박 말했다.
“캐디 버릇이요? 처음부터 제대로 가르치셔야죠. 요새 캐디 버릇 잘못 드시게 하면 안됩니다.”

골프채를 차에 실으러 카트에 타서 함께 이동하며 선임 캐디에게 내가 괜히 겸연쩍어하며 말했다. 
“여기는 명문 골프장이니 귀한 분들 많이 오시죠? 우리 같이 시끄러운 사람들 또 없죠?”
그녀는 낮은 목소리로, 어딘가 권태로워 보이게 웃으며 말했다.
“골프채 잡으시면 유명한 분들이나 높으신 분들이나 다 똑같아져요. 이런 표현 죄송하지만 다 애들처럼 변하세요.” 

2018년 11월 초 단풍 곱던 어느 날 골프의 기록이다.
                                                 

작가의 이전글 '골프웨어의 시작'과 기품에 대한 단상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