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시리게

by 달팽이머리

나의 시어머니는 소리를 내지 않는다. 발걸음 소리조차 내지 않고 집안 곳곳을 다니신다.

그러다가 보글보글 끓는 국 냄비 앞에 서 있는 나를 공격하기도 하신다.


"안녕하세요?"

등 뒤에 바짝 붙어 서서 느닷없이 말을 거는 기습 공격이다.

"아악! 깜짝이야! 아무 소리도 안 들려서 오신 줄도 몰랐어요, 어머니~휴우..." 놀란 가슴을 쓸어내린다.

조금 시간이 지난 후, 이번에는 등을 톡톡 두드리신다. 뒤돌아보면 "안녕하세요?"라고 다시 반복하신다. 놀라지 않게 나름 배려하시는 중이다.


시어머니는 치매에 걸리셨다. 조금씩 기억을 잃어가는 중이시다. 나는 매일 낯선 사람이 되어 시어머니의 인사 세례를 받는다.

그런데 참 이상하지 않은가? 기억을 못 하시는데 어떻게 다시 인사할 때는 등을 두드려서 나를 놀래지 않게 하실 수가 있을까?


육 남매 중 셋째 딸로 태어나신 시어머니는 키가 작은 편이시다. 형제들 중에서 가장 작다고 하셨다. 그런데 어릴 때부터 집안일은 항상 당신 차지라서 불만을 표출한 적이 있다고 하셨다. 조그맣고 힘도 약한데 왜 매번 자기만 일을 시키냐고 억울하다고 어머니께 항의를 하셨단다.

툇마루에 앉아 함께 콩을 빻던 어머니가 대답하시길, '이렇게 콩을 찧으려 불러봐도 다 도망가고 너만 오더라. 다른 형제들은 억지로 데려와서 절구질을 시켜봐도 절구 안보다 밖으로 튀어나가는 콩이 더 많은데, 너는 콩이 밖으로 튀지 않게 잘 찧기 때문이다.'라고 하셨단다.


시어머니는 어린 나이였지만, 혼자 일하는 엄마의 고달픈 마음이 먼저 헤아려지고 어떻게 일을 하면 엄마의 마음이 흡족 해질지를 알아서, 놀고 싶어도 참고, 빨리 대충 끝내고 싶어도 참으셨던 것이다. 그렇게 늘 남의 입장을 먼저 헤아리며 살아오셨던 것 같다.

머리로는 기억할 수 없지만, 가슴으로는 기억하는 남을 배려하는 그 마음 때문에 내가 놀라지 않게 등을 두드리신 거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생각해 보니 우리 시어머니는 며느리인 나한테도 딱히 뭐라고 하신 적이 없으셨다. 그런데 어머님의 이런 참아내는 마음들이 속으로 쌓여서 혹시 병이 된 건 아닐까?

그렇다면 지금이라도 좀 이기적으로 사시도록 해볼까?


하지만 어머님의 밥 위에서 내 밥 위로 자꾸 넘어오는 삼치구이를 보면서, 종이부채질을 연신 하시면서도 식구들을 향해 선풍기를 돌리는 어머님의 분주한 손놀림을 지켜보면서, 나는 깨달았다. 우리 어머님을 이기적으로 만들 방법은 없다는 것을...


가슴으로 기억한 것을 억지로 지울 방법은 없는 듯하다.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어머님의 새하얀 백발에 자꾸 눈이 시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