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적의 등장

by 달팽이머리

“딸깍”

목욕탕 안이 갑자기 캄캄해진다. 아직 남아있는 샴푸거품에 눈이 따갑다. 더듬더듬 샤워기를 찾아 머리를 대충 헹구고 욕실밖으로 나왔다.

먼저 어머님을 찾아보았다. 거실에는 안 계신다. 어디 계시지?

어머님방으로 가본다. 꽉 닫힌 문 밖으로 트로트가락이 흘러나온다.

살짝 문을 열어보니, 침대에 걸터앉아 트로트 쇼를 열심히 보고 계신다.

“어머니~목욕탕 불 끄셨어요? 목욕탕에 사람 있을 때는 끄시면 안 돼요~~”

“내가 안 했어. 나 이거 티브이 보고 있었어.”

마치 아까부터 계속 이렇게 앉아 있었다는 표정으로 대답하신다.


우리 집 목욕탕은 잠금장치가 없다.

어머님이 들어가셨다가 당신도 모르게 문을 잠그고 못 나오실까 걱정되어서다.

덕분에 “으악! 엄마! 문 닫아요!! 나 지금 샤워 중이에요. 문 닫아요! 닫아!!”라는 남편의 비명이 흘러나올 때도 있다.

“나는 아무도 없는 줄 알았어…” 느릿느릿 문을 닫으시는 어머님의 얼굴에 미소가 가득하다. 뭐 재미있는 걸 보기라도 하신 걸까?

이렇게 확인하고 불을 끄기도 하시지만, 그렇지 않을 때도 꽤 많으시다.


다른 어르신들도 다 그렇겠지만, 어머님의 절약정신은 특히 더 대단하시다.

지금 입으신 옷도 족히 삼십 년은 된 듯하다. 옷장 안에는 더 오래된 옷들도 많다. 식사 중 사용한 휴지도 한번 쓰고 버리시는 법이 없다. 반으로 접어 보관하다가 나머지 반도 다 쓰고 버리신다.

이런 어머님께 전기로 작동되는 물건은 낭비의 상징과도 같다. 여기저기 다니시며 집안 모든 불을 끄고 에어컨은 당연히 못 틀게 하신다. 너무 더운 날이면 작은 방 에어컨을 몰래 틀어놓고 식구들이 돌아가며 쉬었다 나온다.


전기밥솥도 마찬가지다. 반찬을 다 만들어 놓고 밥을 푸려고 뚜껑을 열어보면 설익은 밥이 들어있을 때도 있다. 어머님이 중간에 코드를 뽑으신 것이다. 끄는 방법을 모르는 물건들은 무조건 코드를 뽑으신다.


가끔 단순한 요리 손질을 부탁드릴 때가 있다. 양파 같은 재료는 예시를 한 번 보여드리면, 무척이나 집중해서 잘라주신다. 꽤 즐거우신 것 같다.

경쾌한 칼질 소리에 맞춰 음악을 틀어드렸다. 이럴 때는 ‘하울의 움직이는 성’이 제법 어울린다.

“쿵 짝짝~ 쿵 짝짝~”

“또각또각” 칼질을 마친 어머님이 갑자기 바삐 움직이신다.


화장실 가시나? 그런데 음악소리가 나오는 쪽으로 가서 이리저리 살피신다. 그리곤 옆에 있는 코드를 다 뽑기 시작하신다.

그래도 음악이 멈추지 않자 한참을 노려보다가 나를 부르신다.

“이것 좀 꺼봐.”

핸드폰을 열어 음악을 껐다. 블루투스 스피커다.


스위치도 안 보이고 코드도 없는 ‘최대의 강적’이 어머님 앞에 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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