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리어

감정 뒤에 남은 것들

by 슬쩍계획형

여행을 앞두고 캐리어를 하나 샀다.


사이즈도 딱 좋았고

색도 무난했다.


손잡이를 몇 번 올렸다 내렸고,

방 안을 한 바퀴 굴려봤다.


부드럽게 굴러가는 바퀴가

마음에 들었다.


여행 초반까지는 별문제 없었다.

공항 바닥에서도,

교토의 거리에서도,

캐리어는 조용했다.




교토에서 고베로 이동한 날,

그 조용함이 깨졌다.


비밀번호를 맞추던 순간

숫자는 돌아갔지만

잠금이 풀리지 않았다.


다시 맞췄고,

한 자리씩 천천히 돌려봤다.

그래도 열리지 않았다.


한참을 붙잡고 있다가

손에 힘을 줘 잠금장치를 밀었다.

딱딱한 소리와 함께

걸려 있던 부분이 겨우 풀렸다.


열리긴 했지만

그제야 구조가 떠올랐다.

이 캐리어에는

지퍼가 없었다.




그날 이후로

캐리어를 잠그지 않은 채 쓰기 시작했다.


짐을 꺼냈다 넣을 때도

그대로 열어두었다.


처음엔 보지 못했던 부분들이
하나씩 눈에 들어왔다.


캐리어 내부의 재질,
누락된 열쇠,
어긋난 단차.


잘 샀다고 생각했던 마음은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그제야,

캐리어는 제 모습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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