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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나은 Jul 08. 2023

이렇게 된 이상 오늘은 파티다

내 생에 가장 기쁜 불합격

Declined.

이상하게 영어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시선을 옮겨보니 빨갛게도 적어둔 ‘불합격’이라는 단어도 눈에 들어왔다.


나는 결국 지원한 대학원에서 불합격 통지를 받았다.

붙어도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이라고 이야기하고 다녔지만 막상 불합격은 슬프고 아쉬운 기분이었다.


나이 서른을 먹어도, 남편이 생겨도 이런 순간 생각나는 사람은 역시 엄마다.

울적한 기운을 가득 담아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 나 떨어졌어.”


“우리 딸 너무 축하해.”


나에게 어딘가 이상한 사람의 아우라가 조금이라도 있다면 그건 필히 우리 엄마로부터 온 유전자 덕분이다.


엄마의 논리는 이렇다.

사회적으로 명망 있는 학교이다 보니 만약 합격했더라면 등록을 할 것인지 말 것인지를 두고 고민을 했을 테고,

 만약 내가 등록을 하게 되었더라면 나의 삼십 대를 오롯이 대학원에서 보내야 했을 텐데 독이 든 성배가 아닐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제는 그런 고민을 할 필요도 없고 후회할 선택을 할 일도 없어졌으니 축하를 받아야 마땅한 일이라는 기적의 논리였다.


듣고 보니 엄마의 말이 타당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생에 있어 선택의 보기를 늘리는 일보다 보기를 지우는 일이 훨씬 힘들다는 것을 나는 경험적으로 알고 있었다.

‘명문대’라는 보기를 지우지 못해 얼마나 오랜 기간 사회적 기준에 나를 맞추기 위하여 질질 끌려다녔던가.



이번 불합격으로 나는 무려 삼십 년 동안 묵혀두었던 ‘명문대’라는 타이틀을 내 선택지에서 지울 수 있게 되었다. 내가 원하는 전공이 있는 학교 중 ‘명문대’라고 부를 수 있는 학교는 이곳 하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 지원의 결과로 이 학교를 지울 수 있게 되었으니 사실상 나로서는 ‘명문대’라는 보기 자체를 지울 수 있게 된 것이다. 정말로 이 학교를 너무나 원한다면 다음 학기에 다시 지원하는 방법도 있겠지만, 그간의 깨달음으로 삶의 지향점과 생각이 완전히 바뀌어 버린 지금 그런 선택을 할 가능성은 없다.


“오, 그러고 보니 정말 축하받을 일이잖아?”

나는 진심으로 나의 불합격을 축하해주고 싶어졌다.

누군가는 정신승리라고 비웃을지 몰라도 그러거나 말거나 이제 그런 것은 나의 관심사가 아니다.


생각과 마음의 방향을 정하니 그제야 남편이 생각났다.

이번에는 남편에게 전화를 걸어 통보하듯 오늘의 계획을 읊어주었다.


“남편, 나 떨어졌어. 그래서 우리 오늘 파티할 거야.”


우리는 오랜만에 근사한 곳에서 외식을 하고 내가 좋아하는 디저트를 잔뜩 사서 집에 돌아왔다.

두둑이 배를 채우고 나니 마음도 한층 넉넉해진 것이 느껴졌다.

나를 떨어뜨린 담당자에게도 감사한 마음을 마저 들었다.

할 수만 있다면 전화를 걸어 당신의 판단이 옳았노라고 이야기해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예정에 없던 파티에 모든 체력을 소진하고 먼저 골아떨어진 남편을 뒤로하고 홀로 거실에 나와 소파에 앉았다. 고요한 적막 속에 그 간의 시간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처음 대학원에 가도 되겠냐고 남편에게 은근슬쩍 이야기를 꺼냈던 밤, 영어 성적을 만들기 위해 출근 전 졸린 눈을 비벼가며 공부했던 아침들, 얼마만인지도 모를 스터디카페 방문, 주말 내내 허리가 끊어지도록 앉아서 썼던 학업계획서 등등.. 불합격이라는 결과를 받아 들고도 내가 스스로를 축하할 수 있는 이유는 다시 돌아가도 그 보다 더 노력할 수 없을 정도로 최선을 다했기 때문이다.


노력으로 빚어낸 도전의 흔적은 정직하고 명백했다.

나는 더 이상 도전이 두려워 안전지대에 밖으로는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으려 스스로를 제한하는 사람이 아니다. 이제 나는 실패의 유익을 아는, 그래서 도전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누군가의 평가로 좌지우지될 수 없는 성과다.


이제야 내가 내 삶의 운전석에 앉게 되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동안 나는 주변 사람들의 인정, 사회적 지위 등에게 마땅히 내가 있어야 할 운전석의 자리를 내어주며 살아왔다. ‘사람들의 시선’이라는 실체 없는 기준에 부합하기 위해 노력하다 보니 끊임없이 스스로를 부족하다 생각하며 채찍질했던 시간이었다.


나를 가두고 있는 생각의 틀을 발견하고 인정하고 벗어나려 시도하는 과정은 아직도 현재 진행형이다. 나는 아직도 시시때때로 스스로의 생각을 제한하고 내가 진정 원하는 것은 무엇인지에 대해 확신하지 못한다. 중요한 것은 두 걸음 뒤로 가더라도, 다시 세 걸음을 앞으로 갈 수 있으리라는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 생겼다는 것이다. 평가의 잣대를 다른 사람에게 빼앗기지 않는다면, 내가 나라는 사람의 관찰자이자 평가자가 된다면 삶은 계속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어디가 앞인지를 정하는 것도, 그 방향으로 걸음을 옮기는 사람도 결국엔 내가 될 테니 말이다.


나는 이제 내 삶의 운전석에서 조금 더디더라도 가장 나다운 방향을 잃지 않기로 선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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