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스완을 죽이는 이이적 인간 가설의 해로움

모순 10, 나의 모순.

by 로지

[[모순 9, 비용, 편익, 가격의 왜곡 0.3]]


모순 10, 나의 모순. 블랙스완을 죽이는 이이적 인간 가설의 해로움

내가 세상을 바라볼 때, 그리고 내가 타자를 상대할 때 미리 정해놓는 가정은 '사람은 일반적으로 이기적이다'라는 것이다. 나는 이 표현으로 만족스럽지 않다. 좀 더 정확히 말해서 '이이적'이라고 하고싶다. 사람이 자신을 위주로 사고하는 이유는, '자신이 이득을 얻기 위함'이라고 생각한다. 이기적이라는 말에서 '기'는 몸을 뜻한다. 모든 사람이 자신의 몸을 우선하지는 않는다. 어떤 사람들은 남을 위해 자신의 몸을 바치기도 한다. 그러나 '이이적'이라고 하면 이 모든 경우를 다 포괄할 수 있다. 자신의 몸을 바쳐 남을 위하는 사람들은 그 행위에서 이득을 얻는다. 그들이 행복해하고, 고통에서 벗어나고, 더 나아지는 걸 보면서 뿌듯함, 보람, 자기효능감같은 쾌의 감정을 느낀다. 또는 그런 불의나 안타까운 처지를 그냥 지나치는 건 너무 괴롭고 고통스러운 불쾌의 감정을 느낀다. 쾌의 감정을 얻기 위해 또는 불쾌의 감정을 해소하는 것은 모두 양의 방향이라는 한 방향을 향한다. 전자는 긍정적인 감정을 얻기 위해, 그러니까 중립적인 현재 상태 0에서 +1로 가는 것이고, 후자는 부정적인 감정을 해소하기 위해, 그러니까 -1에서 0으로 가는 것이다. 모두 양의 방향으로 이동하려는 동기가 내재되어있다. '이이적'이라고 할 때 두 번째 '이'는 바로 이 '양의 방향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경향'을 가리킨다.


성취감, 뿌듯함, 보람과 같은 쾌의 감정은 일종의 신호 내지는 효과음이다. 이득을 얻었다는 효과음.

그리고 안도감 역시 효과음이다. 손해를 피했다는(그러므로 이득을 얻었다는) 효과음.[^1]


[^1]: _ 이 구절을 쓰면서 나는 언어의 한계를 느낀다. 중립의 상태에서 쾌의 감정으로 바뀔 때를 묘사하는 말들은 아주 많은데, 왜 불쾌의 감정이 쾌의 감정으로 바뀔 때 묘사하는 말들은 이렇게 적을까?


지나친 일반화인지 모른다. 하지만 최소한 이것은 나에게는 해당되는 이야기이다. 나는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이며, 그렇지 않아보이는 순간이라 할지라도 근본적으로 이득을 추구하는 이이적 인간이다. 내가 자발적으로 손해를 보는 행동을 한다면 나중에 되돌아보았을 때, 그렇게 보는 손해보다 더 큰 이득을 얻기를 기대한 것이었음이 드러나는 경우가 많다.

[[모순 9, 비용, 편익, 가격의 왜곡 0.3]]

[[이이적 인간, 부의 창출, 벌어들일 수 있는 돈의 상한선]]

[[자연 선택의 충돌하는 양면, 개인 선택과 집단 선택]]

[[2차연계사고, 요청과 제안, 부]]


솔직해져야 한다. 나는 깨끗하지않다는 것을 인정해야 그 다음이 있다. 투명해지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의 혼탁함을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자신이 얼마나 혼탁한지를 가늠할 수 있어야 하며, 어느 지점에서 먼지와 오염물들이 뿜어져나오는지 그 원천을 알아내야 한다. 그래야 그것을 막던지, 승화시키던지, 중화시키던지 하는 선택을 할 수가 있다.


나는 어떤 사람들에게 더 많이 돕고싶은 마음이 들까? 정확히 나열하기는 어렵다. 나는 이 문제를 생각하면서 나 자신의 뒤통수를 보려고 시도하는 느낌을 받는다. 겨우 한 가지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들에게 줄 수 있는 내 도움이 촉매를 만난 화학반응제처럼 폭발적인 효과를 일으킬 여지가 있을 때 더욱 그러하리라는 것이다. 나는 이런 각이 나오면 끼어들고, 도와주고싶은 강한 충동을 느낀다. 그리고 이런 충동의 이면에는 반대급부로 주어지는 인정에 대한 갈증, 내가 여전히 쓸모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확인하고싶은 자기효능감에 대한 갈증, 이렇게라도 해서 누군가와 연결되고자 하는 갈증(아무 해프닝이 없었다면 아무런 교류도 없었을 것이고, 그러면 나는 고립되었을 것이므로)이 녹아있을 것이다. [^2]


[^2]: _ 나는 고립되고싶어하지만, 고립되는 것이 나를 망치는 길이라고 느낀다. 그러나 고립되지 않은 상태에서 나는 여전히 고립되고싶어하는 모순적인 면을 갖고있다.


더 희미한 뿌리까지 끌어내어본다면, 이런 것도 있을 것이다. 아무 역할이 없을 때 나는 어찌할바를 모르기 때문에 그것이 두려운 것이다. 나는 방향이 정해져있지 않은 상황에 매우 취약하다. 내가 맡은 역할이나 해야할 일이 없는, 그러니까 방향이 없는 상황에서 나는 그것이 없다는 것을 그 자체로 받아들이려고하지 못하고 어떻게 해서든 뭐라도 찾으려고 발버둥치느라 더 많은 에너지를 쓴다. 그래서 수영을 못하는 사람이 물속에서 발 디딜곳을 찾고, 붙잡을 곳을 찾듯이 나는 도움을 주는 역할이라도 하려고 갈망하는지도 모른다.


[[J, 모임에 나갈 때 떨리는 이유, 준칙성이 가질수밖에 없는 막연함에 대한 필연적 공포 가설]]


이유가 무엇이 되었든간에, 혹은 어떤 이유들의 혼합이든간에 모든 것은 '이이적'이라는 말 아래에 동족이 된다. 결국 나는 남을 돕는 순간일지라도 나 자신의 이득을 위해 움직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것을 모든 사람에게 적용할 때, 잘 맞는 비율이 상당히 높다고 생각한다. - 이 말은 100%가 아니라는 뜻을 포함한다. 그러면 언제나처럼 나의 관심사는 이게 적용되는 않는 예외이다. 그리고 나는 이 세계관을 갖는 것의 해로움에 관심이 있다.


예외에 대해. 나는 한없이 이타적인 사람에 대해 이해하지 못한다. '나라면 저기에서 한계에 달했을 것 같은데, 어떻게 저럴수가 있지?'라는 풀리지 않는 의문은 나를 그런 사람들과 근본적인 면에서 진정으로 가까워질 수 없게 만든다. 나의 세계에서는 누구나 자신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들이므로, 누구도 서로가 서로를 진심으로 위하지 않는다는 해석이 우세해지는 것이다.


더더욱 중요하게는, 이 세계관이 매우 해로우며, 내가 지향하고자 하는 안티프래질이라는 방향과, 블랙스완의 둥지를 마련하자는 방향에 정면으로 반하는 것이라는 점이다. 이 세계관은 상당히 많은 현상들을 설명하지만, 동시에 극도로 낮은 비율로 나타나는 예외는 무시한다. 희망을 꺼트린다는 말이다. 이런 세계관을 구축하면서 나는 세상에 진정으로 서로를 위해주는 사람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일종의 '블랙스완의 무시'를 하면서 자잘한 동전들을 줍고 있었던 것이다.


... 대부분의 거래자들은 “달려오는 증기기관차 앞에서 동전을 줍고 있었다. 그들은 엄청난 충격을 몰고 올 희귀한 사건 앞에 스스로를 노출시킨 채 까맣게 모르고 아이처럼 잠들어 있었다.


[[선악의 양면성, 자살테러리스트, 이타심의 극단적 대비]]


인간관계라는 것은 많으면서도 적은 것이다. 인맥이 양적으로 아무리 넓은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그 사람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는 비중의 차원에서 본다면 인맥의 20% 정도에게 전체의 80%의 영향을 받는다. 어쩌면 인맥의 1%에게 99%의 영향을 받을지도 모른다. 인생을 살면서 매우 많은 사람들과 인연을 맺고 끊지만, 그중에서 가장 큰 영향을 주는 사람은 몇없다. 부모님, 가족, 그리고 배우자, 자식, 사주같은 곳에 등장하는 '귀인' 들.


내가 초점을 맞추고싶은 부분은 이런 소수지만 막대한 영향을 주는 인간관계들이 일종의 블랙스완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만들고 믿어온 바로 이 세계관이, 블랙스완이 날아올 둥지를 파괴한다는 것이다. 모두가 자신의 이득만을 위해 움직인다는 사고관은 세상을 건조하게 바라보게 만들고, 사람에 대해 기대를 하지 않게 만들고, 배드엔딩을 맞이할 때 '그래, 네가 그렇지'라며 이 해로운 사고관을 더 강화하게 만들고, 따라서 이런 블랙스완적 인맥들이 출현할 가능성을 무시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리고 블랙스완의 무시는 그동안 주운 자잘한 동전을 다 합치고 몇배를 곱해도 모자랄 정도의 큰 손해를 불러온다.


나는 나의 모순에 대해 탐색하는 글을 쓰면서 이 점을 깨닫는다. 나는 내가 옳다고 믿고, 지향하고, 적용하려고 애쓰던 가치에 대해 말로만 동의했을 뿐, 마음(몸)으로는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어디부터 잘못되었던 것일까? 모든 것을 제1원칙에서부터 쌓아올려왔는데, 어디에서부터 잘못된 방향으로 생각의 덩쿨이 자라난 것일까. 나는 블랙스완을 찾아헤매면서 블랙스완이 날아오지 못하게 하는 온갖 가시들을 세우고 있었던 것이다.


어떻게 해야하는지에 대해서 은빛 탄환, 마술과 같은 특별한 방법은 없다. 이미 그 책에 적혀있다. 출혈 전략. 상처입고 피흘리는 것을 감수하는 것이다. 고통을 감수하는 것이다. 등에 칼이 꽂혀도 또 사람을 믿고, 뒤통수를 맞아도 또 사람을 믿는 것이다. 내가 이해하지못한 바로 그 예외적인 사람이 되는 것이다. 여전히 그런 사람을 이해하지 못하고, 또 그런 사람들과 동일해지지는 못하겠지만, 그래도 여력이 되는 한[^3]흉내라도 내는 것이다. 출혈 전략의 끝에 단 한번만 블랙스완을 만나면 된다. 그러면 그동안 상처받고 피흘리며 보았던 모든 손해를 다 상쇄하고도 남을 정도의 거대한 이익을 얻게 된다. 그러나 출혈전략을 지속하는 것은 끝없는 모순적인 마찰을 견뎌내야 하는 일이다. 뇌의 선형적 사고방식은 블랙스완이 추가된 확률밀도함수를 느끼지도, 보지도 못하고 끊임없이 이야기할 것이다. '역시 이번에도 꽝이네', '내가 그렇지 뭐. 앞으로도 그럴거야'. '한 걸음만 더 가면 낭떠러지로 굴러떨어질거야. 진짜 걸어가?' 이런 점들이 알면서도 출혈전략을 금방 그만두게 만들며 보물을 모순의 사막 속에 감춘다.


이 생각 전개를 통해 얻은 교훈은 최소한 하나는 분명하다. 내가 생각하고 마음가는대로 형성했던 그 사고관은 내가 지향하는 방향과 완전히 반대된다는 것이다. 나는 세상의 모순을 이렇다 저렇다 할 시간에 내 모순부터 들여다봤어야 했다. 나부터가 모순적이었고, 고통을 감수해야한다고 생각하고 쓰고 말하면서도 나는 이런 세계관으로 세상을 바라봄으로써 고통을 회피하고있었다. 나는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았던 것이다.


문제를 인식했다는 것만으로 매우 가치있다. 이제 문제를 인지했으니, 그것을 해결할 수 있게 되었다. 초기 증상을 스스로 진단해낸 것은 다행스럽고 유의미한 성과이다. 나는 내가 두려워하는 모습에서 멀어질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내가 두려운 것은 비판적 사고능력만 극대화된 부정적 회의론자가 되는 것이다]]


[^3]: _ 내가 이해하지못하는 포인트가 바로 이 부분이다. 이들은 여력이 안되는데도, 한 걸음만 더 내딛으면 떨어지는데도 걸음을 옮기는 사람들이다. [^4]


[^4]: _ 내가 이해할 수 있는 범위로 억지로 생각해본다면, 생존자 편향이 작용하는것일지도 모른다. 낭떠러지라고 생각되는 곳 앞에서 한걸음 더 내딛은 사람들 중, 운이 좋게 굴러떨어지지 않은 사람들이 증거로서 남아있고 생존하지 못한 사람들은 패자의 무덤에 묻혀 아무 소리도 내지못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나는 정말 무엇이 정답인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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