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이다.

by 로지


운이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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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은 인간이 통제 할 수 없는 영역에 있다. 그러나 운은 인간의 인생을 통제(좌우)한다. 통제할 수 없기 때문에, 운에 속절없이 당한다.



어젯밤 할머니는 넘어지셨다. 화장실에서 나오다가 발을 헛디디면서 의자의 등받이에 이마를 크게 부딪히고 넘어지셨다.



운이다. 부딪힌 곳이 조금만 더 아래였다면 눈이나, 코나, 입이나 턱을 다쳤을 것이다. 그렇지 않았던 것은 운이 좋았기 때문이다.



운이다. 시간이 몇시간만 더 뒤였다면, 그래서 내가 퇴근하고 엄마도 잠든 시간이었다면, 아니면 내가 자느라 출근하지 않은 상태이고 엄마는 일찍 출근한 상황이었다면.. 할머니는 그렇게 엎드려 넘어진 채로, 일어나지도 못하고 더 심한 부상으로 이어졌을 것이다. 그렇지 않았던 것은 운이 좋았기 때문이다. [2]



운이다. 냉동실에 얼음찜질용 팩이 있었던 것, 그리고 이런 상황에 얼마간의 얼음찜질을 하고 얼마간의 휴식을 하는게 좋은지 부지불식간에 물어볼 수 있는 AI를 사용할 수 있는 시대에 살며 그 혜택을 누리고있다는 것은 운이 좋았기 때문이다.



운이다. 화장실에 설치한 손잡이를 매번 잡는 습관이 드신 할머니가, 어제 딱 한번, 손잡이를 잡지 않은 것은 재수가 좋지 않아서다. [3] 그리고 그렇게 손잡이를 안잡았을때, 발을 헛디디는 사건이 겹친 것 역시 운이다. 재수가 좋지 않아서이다.



운이다. 이마가 터져서 꿰맬 일이 없었던 것은 운이 좋았기 때문이다.



운이다. 두개골 내부에서 뇌혈관이 터져서 내부에 출혈이 있지 않았던 것은 운이 좋았기 때문이다.



내가, 혹은 할머니가 통제할 수 없는 너무나 많은 요소들이 운이다. 그리고 그런 운이 전반적으로, 지금까지 우리 편이었기 때문에 우리는 생명을 유지하고있는 것이다.



운이다. 할머니가 넘어지던 시기에, 좌우 회전이 가능해서 가끔 엉뚱한곳을 보느라 녹화가 안되던 CCTV가 마침 그 앵글을 잡고있었던 것은, 그래서 할머니가 어떤 식으로 넘어졌는지 리플레이해보고 위험할만한 요소를 보강할 수 있었던 것은 운이 좋았기 때문이다.



2



운은 인간이 통제 할 수 없는 영역에 있다. 그러나 운은 인간의 인생을 통제(좌우)한다. 통제할 수 없기 때문에, 운에 의해 과할 정도로 크게 성공하는 일도 생긴다. - JYP 박진영 '모든게 운빨이다' 인터뷰.







내가 이걸 어떻게 했지?


너무 과한 거예요. 제 역량에 비해서


결과가 너무 크다는 생각이 처음 들었어요.


나한테 지독한 운이 따랐구나.


이 지독한 운은 왜 따랐을까?


그리고 나서 이때까지 내가 하지 않고


운 좋게 따랐던 일들을 쓰기 시작했어요.


엄마가 억지로 어렸을 때 피아노를 치게 한 거.


7살 때 미국에 가서 2년 반을 억지로 살게 된 거.


그때 마이클 잭슨을 만난 거.


2년 반 동안 영어를 배우게 된 거.


아날로그랑 디지털 경계에 태어난 거.


아날로그의 감성을 가지고 커서 디지털 방법을 이용해서 표현할 수 있어요.


형석이 형을 만난 거.


그 다음에 방시혁이라고 있거든요.


시혁이가 아니었으면 저는 회사를 못 세웠어요.


각종 사고와 질병으로부터 아직까지 안 죽은 거.


다 운인 거예요. 다 운인 거예요.


제가 말씀드린 거 중에 한 개만 없었어도


이게 이 결과가 안 나왔어요.


근데 제가 어디를 감히 내가 뭘 잘했다고 떠들었지


이 생각이 밀려오는 거예요.


그러니까 갑자기 "감사해요"가 시작된 거죠.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밥 한술까지도 "감사합니다."


넘어질 뻔하다가 안 넘어지면 "감사합니다."







3



운이 좋아서 나는 살아있는 것이고, 상대적으로 어느 선상에 있건 인생 속에서 많은 경험과 체험을 할 수 있는 '티켓'을 갖고있는 것이고, 운이 좋아서 할머니는 지금까지 살아계신 것이고, 운이 좋아서 지금 나는 이렇게 글쓰기라는 사치를 누릴 수 있는 것이다.



4



지독할 정도로, 인간은 운에 지배당하며 산다. 하지만 인간은 지독할 정도로, 맹인보다 더할 정도로 운을 보지도, 느끼지도 못하며 산다. 자유의지로 삶을 개척하는 것이 참된 의미라고 생각하지만, 그 목적을 달성한다면 그것은 보이지않는 운이 따라주었기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





1_ 나심 탈레브는 행운에 속지말라고 하며 운의 존재를 무시하지말라고 했으나, 나는 운의 존재를 너무 실감하기에 그 불확실성에 무력감을 느낀다.



2_ 이건 정말 그렇다. 할머니는 수시로 깨어서 몇시간마다 화장실을 가시는데, 딱 모두가 깨어있고 한달음에 달려올 수 있는 상태에 있을 떄 그 일이 벌어진 것은.



3_ 넘어짐이라는 사건이 결코 의외의 상황에서 발생한 게 아니라는 것이다. 일상적으로 하던 루틴에서도 사고가 발생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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