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는 어떻게 받을수있을까? 나를 이해해주는 사람은 왜 이렇게 없을까?
이 질문을 하는 사람, 그러니까 이해를 어떻게 받을수있는지 알고싶은 사람은 지금까지 이해를 받아온 사람, 그래서 이해받는 데에 익숙한 사람인데 이제 막 안전 울타리를 벗어난 사람일 것이다. 혹은 불행하게도 마땅히 온전히 이해받아야 할 유년기에 그런 경험을 얻지 못한 사람일지도 모른다.
이것은 질문 자체가 잘못되었다. 왜냐면 이 질문은 해야 하는 질문이 아니라, 잊어야 하는, 또는 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런 의문은 앞으로 더 성숙해지기 전, 그 단계로 가기 전에 거치게 되는 질문이라고 생각한다.
유년기, 청소년기, 성인기를 거치면서 역할이 바뀐다. 받는 것에서 주는 것으로 바뀐다. 자라나는 아이는 받아야만 클 수 있었고, 다 큰 어른은 줘야만 자손을 만들고 남길 수 있었다.
여기서 이해를 받는 것 또한 '받는 것'의 일종이다. "어떻게 이해를 받을 수 있을까?"라는 말은 다시 말해서 어떻게 하면 어린 상태로 남아있을 수 있는가, 어떻게 하면 미숙한 상태로 남아있을 수 있는가 하는 질문과 동일하다.
'아무도 나를 이해못해'라고 말하는 것은 마음 한편으로난 날 온전히 이해해주는 사람을 만나고싶은 욕망을 조금이라도 포함한다. 그렇지 않다면 이런 말을하면서 하소연, 불평할 필요조차 없다. 남이 나를 이해해주건 말건 그것이 나에게 어떤 손해나 스트레스도 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발상 자체가 의식의 영역에 올라오지조차 않는다.
그러니까 내가 하고싶은 말은 이 질문을 하는 것 자체가 아직 그 다음 단계로 갈 준비가 안된 상태라는 증거라는 것이다. 따뜻한 이불 속에서 단잠에 든 상태를 빠져나와 차가운 공기 속으로 몸을 드러내고 '일'이라는 걸 하고싶지 않은, 아늑한 상태에 머물고싶은 욕망의 표현이기도 하다. - 여기에서의 '일' 역시 나를 위해서라면 절대 하지 않을, 내가 나를 위해 쓸 수 있는 매개체인 돈을 보상으로 주니까 하는거지, 그렇지 않다면 결코 하지 않을 것을 말한다. [^1]앞서 제시한 '받고싶음'의 욕망이 클수록 '일'을 하고싶지 않은 욕망이 커지는 것으로 반비례 관계가 나타난다.
어떻게 이해를 받을 수 있는가? 꼭 그 차원에서 대답을 받고싶다면, 꼭 그 묻는 말에 직접적으로 대답을 받고싶다면 내가 거기에 답할 수 있는 건 '결코 이해를 받을 수 없다.'이다. 세상에서 나를 완벽하게 이해해 줄 수 있는 사람은 한 가지 예외(사랑) 빼고는 없다. 사실 이 대답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언어의 벽에 갇혀서 본질을 제대로 표현할수가 없기 때문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나와 일치하는 정도가 99.999...%까지는 존재할 수 있겠지만 100% 는 결코 없다는 말을 하고싶은 것이다. [^2]
'그러면 나를 거의 완벽하게 이해해줄 수 있는 사람이 존재하긴 한다는거 아닌가?'
역시나, 아까와 같이 Yes, No 로만 듣고싶은 말만 듣는다면 Yes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백분위 수가 높아질수록 그런 사람을 만날 확률은 기하급수적으로 낮아진다는 말도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이를테면, 아주 거칠게 표현한다면 이렇게나마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나와 일치하는 정도가 1%인 사람은 세상 사람 99%중에 존재한다고 해도 무리가 아닐 것이며, 일치하는 정도가 50%인 사람은 세상 사람 50%, 그리고 나와 일치하는 정도가 99%인 사람은 세상 사람의 1%도 되지 않을 거라는 정도의 느낌이다.
1
이렇게 숫자를 이용해서 표현한다면 좀 더 세밀하게 다루는 것이 가능해진다. 나를 완벽하게 이해해줄수 있는, 그러니까 100% 이해해줄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30% 정도, 20% 정도 이해해줄 수 있는 사람은 아주 많다. - '이해받고싶은 욕구'는 그걸 알아챈다고 해서 버릴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나마 최선은 현실적으로 그 기대값을 조정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떻게 100% 이해받을 수 있을까?'는 어려운 질문이지만, '어떻게 20% 이해받을 수 있을까?'는 훨씬 더 쉽고 실현가능한 질문이 된다. - 충분히 성숙하여 합리적으로 생각할 줄 알게 되면 으레 나를 99% 이해해줄 1%의 희박한 확률로 나타날 사람을 기다리거나, 상대가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실망하는 것보다, 나를 60% 정도만 이해해주더라도 그렇게 나타난 사람에게 감사함을 느끼게 된다. - 40%의 작은 확률을 뚫고 나타난 게 아닌가? 나를 1%밖에 이해하지못하는(관심조차 없는) 99%의 사람들 중에서.
2
나를 온전하고도 완벽하게 이해해줄 수 있는 단 한 가지 예외로 돌아가서, 그 예외라는 것은 사랑이다. 하지만 사랑은 많은 경우에 지속적이지 않고, 따라서 영원하지 않다. 내가 말하는 이 예외로서의 사랑을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많은 사랑의 종류 중에서도 콩깍지가 씌워진 사랑을 말한다. 사랑의 콩깍지가 씌인 기간은 길어야 2~3년 남짓이다. 콩깍지가 제대로 씌워진다면, 그 기간 동안에는 서로가 서로를 그동안 그토록 찾아 해매던 이상형이자, 하늘이 맺어준 인연이자, 모든게 잘 통하는 소울메이트이자 말하지 않아도 이해받고 이해되는 짝으로 여기게 된다.
-나는 '연애'라는 말 대신 '사랑'이라는 말을 썼다. 그냥 심심해서, 외로워서, 경험삼아, 싱글이 쪽팔려서, 조건이 좋아서 하는 연애는 사랑이 아니다. 사랑을 하는 사람은 자신이 사랑을 하고있다고 확신한다. 홀린듯한 상태를 느껴본다면 누구나 그것이 사랑임을 알 수 있다.
이 기간동안에는 웬만하면 상대가 이해된다. 상대의 행동, 말, 표현, 모든 게 이해된다. 잠시나마 짜증이 나고 화가 나도 상대가 아주 조금만 설명을 덧붙여주면 다 이해된다. 상대 역시 나를 그렇게 받아들여준다. 진화는 이런 마법같은 상태를 이용해서 모든 사람이 깊은 철학적 사색을 하며 '이해해줄 수 있는 사람'으로 거듭나지 않고서도 새 가정을 만들고 자녀를 가지기에 충분한 기간 동안 상대에게 너그럽고, 관대해질 수 있도록 해둔 것 같다.
'어떻게 이해 받을 수 있을까?' 정말 이해를 받고싶다면, 그 이해받는 상태를 영원히 지속하고싶다면, 단 한 틈의 빈칸도 없이 영원히 이해받고싶다면 그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사랑을 하면서 기간제의 '100% 이해받음'을 경험하고, 헤어지거나 권태기를 겪은 뒤 또 다른 기간제의 '100% 이해받음'을 경험하는 식으로 이어나가는 것은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이해받음'의 상태를 목적으로 사랑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전략은 머지않아 녹슬고 먹히지 않게 될 것이라고 어느정도 확신한다. 왜냐면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만날 수 있는 상대의 나이도 올라갈텐데, '나'는 여전히 유아적인 상태에 머물러있는 반면 상대는 지금 이야기하고있는 성장의 문제에 직면하며 조금씩 더 성숙해지고 합리적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몸은 다 컸는데, 심지어 노화가 시작되었는데 정신은 아기인 사람을 아래에 다룰 각종 고통을 감수하고서라도 기꺼이 돌봐줄 사람은 점점 더 적어질 것이다.
내가 하고싶은 말은 이 이해받고자하는 욕구는 선행적이라는 것이다. 먼저 튀어나온다. 아기는 엄마가 자신을 이해해주기를 바라며 운다. 아기가 좀 더 큰 꼬마도 엄마가, 어른들이 자신을 이해해주기를 바라며 운다. 아이의 시점에서는, 자신이 태어난 이래로 모든 인생에 있어서 오로지 '이해받음'의 경험만 있다. 그러므로 '이해받음'은 먼저 튀어나올수밖에 없고, 그게 당연하다고 여겨질수밖에 없다. 이 인식을 역전시키는 것은 분명히 인생의 생애주기 중후반부 어딘가에 존재하지만 아주 힘겹고, 거북스럽고, 또한 그동안 갖고있었떤 '이해받음'에 대한 욕망보다 선행적이지도 않고 필수적이지도 않기 때문에 모든 이해받고싶어하는 사람들이 이 관문을 통과하지는 않게 된다.
'어떻게 이해받을 수 있을까'라는 질문은 이런 이유로 먼저 튀어나오게 되고, 항상 머릿속을 떠다니게 된다.
반면 '어떻게 이해해줄 수 있을까'라는 질문은 거의 출현하지 않으며, 만약 이 질문이 자연스럽게 출현한다면 그 때는 사랑을 하고있는 상태인 경우가 대다수일 것이다. 인위적으로 출현하는 경우는 지금처럼 사색을 하고, 뭔가 외부 채널을 통해 이런 개념을 접하는 경우일 것이다.
"어떻게 이해해줄 수 있을까?" 이것은 아주 어려운 질문이고, '어떻게 이해받을 수 있을까?'와 정반대의, 음의 부호를 갖는 감정들을 동반한다.
이해를 해준다는 것은 일단 첫번째로, 나와 상대가 다르다는 걸 전제로 한다. 그 다르다는 것은 때때로 나를 상처입힐수도 있으며 아프게 하고 괴롭게 하고 거슬리게 하고 그 사람을 더이상 상종하고싶지 않게 만들기도 하고 나를 숨막히게 하고 억울하게 하고 자존심 상하게 하고 서럽게 할수도 있는 가능성들의 싹을 잘라내지 않고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둘째로, 실제로 이런 감정들이 일어나도 나는 겉으로 티내지 않으며 상대가 원하는 반응을 기꺼이 해주겠다는 각오도 포함한다. (표정으로, 제스처로 티를 낸다는 것 자체가 나를 이해해달라는, 이해받고싶음이라는 욕망의 비언어적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어떻게 이해해줄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하고 그렇게 되고자 한다는 것은 본능에게 있어서 정말 이상한 질문이다. 기꺼이 고통을 감수하겠다는, 본능의 차원으로 보면 셀프로 자신을 해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내가 생각하는 진정으로 성숙한 사람은 상대를 사랑하지 않음에도 이해해줄 수 있는 사람이다. 상대를 사랑하지않고, 남으로 여기는데도, 그리고 그렇게 이해해줌으로써 내가 얻을 게 하나도 없는데도 위와 같은 모든 고통을 감수하고 상대를 이해해주고 품어주는 사람은 진정으로 성숙한 사람이다. 나 역시 이 정도는 못된다.
이런 '이해'의 영역에서 내가 갈 수 있는 가장 먼 곳은, 상대에 대한 콩깍지의 마법이 끝나서 이해해주고싶은 마음이 줄어듦에도 불구하고, 그 마법의 상태에 있었을 때만큼 상대를 이해해주는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내가 가보지못한 곳은, 사랑한 적도 없고, 사랑하는 모습이 상상조차 되지 않으며, 사랑하고싶지 않은 사람들에 대해서 (이득, 손해 관계가 걸려있기 때문에 참고 하는게 아니라 진정으로) 이해를 해주는 경지이다. 이런 면에서 나는 이기적이고 개인주의적이고 속 좁고 매정한 사람이다. 나는 내가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 대해서는 진정한 차원에서 관심을 갖지 않는다. (겉으로 어떻게 보이는가와는 별개의 문제이다. '척'이라는 걸 할 수 있기 때문에.)
이런 상태에서 나는 수많은 '이해받음'의 욕망을 갖고 아우성치는 '아기새'들을 본다. 아기새들과 할 수 있는 유일한 상호작용은 '내가 이해해줌', '내가 맞춰줌' 뿐이다. 보살핌받는 둥지를 떠난 개체에게, 둥지에서 머물 때와 같은 아늑함과 따뜻함이라는 '이해받음'의 감정은 사치이다. 이 감정은 더이상 당연히 주어지지 않지만 많은 경우 이 사실은 발견되지 못하고, 그런 이유로 점점 더 많은 건강하지못한 관계를 만들어내게 되는 것 같다.
[[온통 아기새둥지, 심리 보편성에 기반한 헤아리기]]
이 경지를 넘어서 '이해해줌'의 경지로 올라선 이들은 정말 정말 아주 드물 것이다.
개인의 차원에서 우리는 누구나 생존을 우선한다. 고통은 생존 가능성을 줄이는 것으로 느껴진다. 그리고 편안함은 생존 가능성을 높이는 것으로 느껴진다. 그 맥락에서 나에게 고통을 덜 주고 그 반대의 아늑한 느낌을 주는 것을 선호하는 개인 본능의 차원에서 볼 때, 그렇다면 '이해해주는 것'은 전혀 추구할 이유조차 없는 것이 된다. 고통만 주니까.
문명이 발전하고 풍요로워짐에 따라 육체적으로는 성숙하고 더 건강하고, 영양 상태가 좋아지는 사람들은 늘어가지만, 그와 반대로 문명이 발전하면 발전할수록 정신적으로 성숙한 사람들을 줄어든다.
[[지옥으로 가는 길은 선의로 포장되어있다. 무해함이 키우는 유해성, 유해함이 제거하는 무해성]]
이런 이유로 성숙한 사람들은 아주 적을수밖에 없고, 점점 줄어들수밖에 없는 것 같다.
그러나 여기에 모순이 있다. 리얼월드를 작동시키는 문법이 이런 상태에서, 모두가 자신들의 본능을 따르며 '어떻게 이해 받을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상태는 사회를 점점 병들게 하고 서로를 믿지 못하게 하고 분열되고 죽게 만들지만,
점덤 더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이해해줄 수 있을까?'를 고민하고 서로가 서로를 (불편하고 고통스럽고 억울하고 괴롭고 서럽고 한숨나오게 함에도 불구하고) 이해해주려고 노력할 때 사회가 더 풍족해지게 된다. '편안함'을 어떻게 받을 것인지만 생각하는 개개인들이 넘쳐나는 사회보다, 내가 희생하는 한이 있더라도 '편안함'을 어떻게 줄 수 있을것인지 고민하는 개개인들이 많을 때, 각자가 받는 '편안함'의 총량이 더 커지는 것이다.- 내가 받은 '편안함'에 대해, 이 편안함이 어떻게 해서 나오게 된 것인지, 그것이 얼마나 (당연한 게 아니라) 감사하고 소중한 일인지 느낄 수 있다면 그 편안함을 되갚아주기 위해 더 큰 편안함을 상대에게 선물해주고자 할 것이다.
어떤 가치들은 그저 삶이 살아지는대로 몸을 맡기기만 해서는 저절로 얻어지지 않는다. 특히 부모님의 그늘에서 벗어난 뒤에 겪게 되는 인생에서 얻는 가치들은 더더욱 그렇다. 광물학자가 돋보기를 들고 주변의 돌멩이들을 조심스럽게 들어 이리저리 살펴야만 겨우 그 돌멩이의 가치를 알 수 있게 되듯이, 스스로 수집하고 성찰하고 가치를 매겨야만 한다. 글쓰기가 좋은 도구라고 생각한다.
[^1]: _ 대부분의 경우를 말하는 것이다. 물론 내일이 너무 기다려지고 하고싶은 걸 하면서 보상까지도 받는 정말 운이 좋고 감사한 케이스도 존재할 것이다. -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케이스에 있을 때 이 글에서 다루고 있는 '어떻게 이해해줄 수 있을까?'에 대한 답을 찾거나, 그걸 실행하기가 더 쉬워지는 것 같다.
[^2]: _ 일치하는 정도가 높을수록 내가 상대에게 이해받을 수 있는 영역이 커질 것이고, 이해받는 정도도 커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