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순7 시뮬레이션 이론과 현실 사이의 괴리가 좁혀지고 있다.
닉 보스트롬의 글을 읽고, 나는 이 세계가 시뮬레이션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나는 그의 주장에 대한 반박을 찾지 못했고, 그 철학자가 생각하는 게 가장 합리적이라고 느꼈다. 나는 그의 생각에 전염되었다. [^1] [^2]
내 세계관의 역사는 신호처리를 본격적으로 공부하기 전과 후로 나뉘는 것 같다. 이 이전에 내가 어떤 사고관과 가치관을 가졌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너무 단순했고, 피상적이었고, 주관이 없었고, 그렇기에 다수가 따르는 것을 답이며 마땅히 따라가야 할 가치들이라고 상정하고 그것들에 나를 끼워맞추려 노력했다. [^3] 그러면서도 그 파열음에 괴로워하면서 내 세계관을 하나씩 구축해나갔던 것 같다. 단세포생물과 같던 시기에는 독서모임을 했다. 가능한 많은 관점들을 나와 충돌함에도 불구하고 그런 마찰들이 당연한 것이라 여기며 받아들이려 노력했다. 맞지 않는 옷에 나를 욱여넣는 시기였으며, 그런 사이사이에 나에게 꼭 맞는다고 느낀, 그러나 '이렇게 입으면 남들이 이상하게 보겠지?'라는 생각도 동시에 드는 그런 옷들을 몇개 정도 발견한 시기였다.
그러다가 큰 도약이 이뤄진 것이 신호처리에 대한 공부와, 일기나 감정노폐물이 아닌 세계관을 이루는 모듈로서의 글쓰기와, 재미나 숙제나 타임킬링을 위해서가 아닌, 모듈을 완성하는 재료를 모으는 목적을 가진 독서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시기였다.
닉 보스트롬의 글을 발견한 것은 그런 시기가 시작된 지 몇 년 지나서였다. 나는 그 글을 발견하기 전까지도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해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던 것 같다.
[[입출력이론, 의식은 없다]]
여기에 일종의 화룡점정으로, 닉 보스트롬의 시뮬레이션 이론을 받아들인[^1] 뒤로는 세상을 바라보거나 내 삶을 대하는 시각이 좀 더 진한 색깔의 관조적 관점이 되었다. 그 안에는 이상한 자유로움과 허무감, 안도감이 섞여있었다. 내가 뭘 어떻게 하든 그리 크게 잘못되는 일은 없을거라는.. 왜냐면 어차피 시뮬레이션이 아닌가.
[[시뮬레이션 소재에 대한 마트료시카 제약 고찰]]
그러나 이런 것들은 어디까지나 말장난에 불과한 차원을 벗어나지 못했다. 시뮬레이션 이론의 친척과 같은 초끈이론과 마찬가지로, 입증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것을 입증하려면 우리 우주보다 더 큰 규모의 계산 능력(에너지)을 확보해야 하기 때문에 이를 입증하는 것은 모순이다. #모순
하지만 엔비디아 CEO의 키노트를 보면서 그 모순의 정도가 점점 작아질거라는 생각이 스쳤다.
내가 닉 보스트롬의 이론을 이해한 바에 따르면 시뮬레이션을 만들 정도로 기술이 발달한 문명은, 시뮬레이션을 만들지 않고서는 못배기게 되어있다. 만약 만들지 않는다면 그것은 강력한 규제로 그걸 불법으로 규정해서일 것이지, 결코 자연스러운 행동은 아닐 것이다. 이때 그가 들었던 '만들지 않고는 못배길 이유'는 다소 빈약하다고 느꼈는데, 비로소 젠슨황의 키노트를 보면서 이 말의 의미를 이해하게 되었다.
젠슨황이 이런 말을 직접 한 것은 아니지만, 나는 그의 말에서 지구를 살아가는 인간 문명은, 시뮬레이션을 만들지 않고는 못배기게 되었다는 사실이 너무나 명확해졌다는 메시지를 읽었다. 우리는 정말로 시뮬레이션을 더 많이, 더 정교하게 만들지 않고는 못배기게 되었다. 왜냐면 시뮬레이션은 돈이 되기 때문이다. 어떻게 돈이 되냐면, 강력한 AI를 만듦으로써 돈이 된다. 강력한 AI를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데이터가 필요하다. 그러나 현실세계에서 생성되는 데이터로는 부족하다. 현재 AI는 학습자료의 빈곤 현상에 시달리고 있다. 매년 지금까지 축적된 데이터 만큼의 새로운 데이터가 생성된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 말을 듣고 의아한 생각이 들수도 있다. 하지만 그 양적인 측면이 아니라, '패턴'의 측면에서 부족하다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더이상 AI가 새롭게 배울만한 패턴이 없다. 대부분의 자료들이 확대재생산에 지나지 않는다. 파스칼이 이야기한 것처럼 인의 거의 모든 접근가능한 지식을 학습한 AI에게는 리얼월드가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로 보이는 상태이다. AI는 더 똑똑해지기 위해 더 양질의 데이터를 먹어야 하지만, 더이상 '재미있게' 읽을 책들이 없어서 지적 갈증에 시달리고 있다.
여기에 자본주의 시장의 갈증이 만나 시너지가 일어난다. 자본주의 시장은 자전거 바퀴가 끊임없이 굴러가야만 넘어지지 않는 것처럼, 끊임없이 새로운 시장을 재료로 집어넣어야 굴러간다. 자본주의는 농산물 시장을 먹고 자랐고, 그 뒤엔 내연기관 시장을 먹었고, 그 뒤엔 컴퓨터시장을, 그 뒤엔 인터넷 시장을, 그 뒤엔 스마트폰 시장을, 그리고 지금은 AI 시장을 먹고 있으며 그 다음은 이와 연계된 시뮬레이션 시장, 로봇 시장이 될 것이다.
젠슨 황이 이야기하는 시뮬레이션은 완전히 지구문명과 관련이 없는 시뮬레이션이 아니라, 오히려 관련도가 아주 높은 디지털 트윈 시뮬레이션이다. 현실 세계를 그대로 복사한 이 가상의 평행우주에서 훨씬 더 희귀하고 이상하고 기발한 패턴이 조합된 데이터를 만들어내어서, AI가 그 정신과 시간의 방에 들어가 상상 가능한 모든 경우의 수와 패턴들과 그 패턴들이 조합되어 나오는 더 새로운 패턴들을 학습하도록 한다. 그럼으로써 AI에게 현실이 '너무도 쉬운' 세계가 되도록 만들기 위해서. 이 말은 다시 말해서, 자율주행차의 사고율이 0%에 수렴한다는 말이고, 언어모델이 현존하는 모든 문제를 풀 수 있게 된다는 말이고, 로봇OS가 사람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에 더해 로봇만이 할 수 있는 일까지 하게 된다는 말이다.
대부분의 시뮬레이션은 닉 보스트롬이 말한 것처럼 그저 너무 재미있어서가 아니라, 돈이 되기 때문에 만들어질 것임이 드러났다. 돈이 된다는 말은 너도나도 다 달라붙어서 할 것이라는 말이며, 한 푼이 아쉬운 누군가는 반드시 존재하기 때문에 브레이크 없이 계속 미친듯이 만들어질 추동력을 가졌다는 걸 의미한다. 이럼으로써 인간은 말 그대로 '시뮬레이션을 만들지 않고는 못배기게' 되었다. 디지털 트윈으로부터 생성해내는 합성데이터는 반찬이나 디저트같은 부차적인 지위를 넘어, 앞으로는 리얼월드에서 얻는 데이터를 압도하는 주류가 될 것이다.
우리의 기술이 계속 발전하면, 한정된 용도와 한정된 지역, 시기에 대한 디지털 트윈 시뮬레이션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살고있는 지구, 더 나아가서는 은하계와 같은 스케일의 시뮬레이션을 만들 수 있게 되고, 또 그걸 필요로 하게되지 않을까? [^5] 지금의 기하급수적인 발전속도로 본다면 우주나 은하계까지는 아니더라도, 지구에 한정해서는 필요로 하며 만들 능력을 갖추는 것은 충분히 가능하다고 느껴진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다시 내가 전염당했던 시뮬레이션 이론으로 돌아온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살고있는 리얼월드역시, 상위 차원의 젠슨 황이 주도하는 합성데이터 생성 사업의 일환으로 만들어진 시뮬레이션 세계가 아닐 이유가 무엇인가? 아닐 이유를 찾기가 더 힘들다. #영화 #13층 #매트릭스
나는 확증편향으로 보고싶은 것만 보는 것일지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글을 쓴다. 글을 씀으로써 내가 보고싶은것만 보았던, 어쨋던 그런 생각을 했던 순간들을 캡처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는 나의 사고과정을 빼도박도 못하게 만든다. 그래서 나중에 찾아낸 반박을 가지고 내 과거 주장을 깨부술 수 있는 여지를 남겨준다. #글쓰기의쓸모
나는 내 이론이 반박당하길 원한다. 모순에 대한 글들에서는 그러지 않기를 바라는 소망이 깃든 표현이었다면, 이번에는 그저 나의 욕망 때문이다. 이렇게 공들여 쌓은 지식과 세계관들이 하나하나 반박당한다면, 혹은 뿌리채 무너뜨리는, 더 납득할만한 이론을 만난다면 그때 느낄 지적인 쾌락은 아주 클 것 같기 때문이다.
---
#룬의아이들
이제는 읽은지 10년이 훌쩍 넘어가는 룬의아이들이라는 소설이 생각난다. 고대 왕국 가나폴리, 모든 병을 다 고칠 수 있다는 전설을 가진 곳. 그들이 사용한 방법은 모래사장으로 가서, 환자와 똑같은 모양의 누운 모습의 인형을 빚어내어 생명을 불어넣고, 환자의 고통을 인형에게 옮긴다음 다시 죽이는 마법이었다. (그 모래로 만든 인형은 잠시나마 숨을 쉬었고, 고통이 불어넣어지자 고통스러워한다. - 이건 사람일까 인형일까?)
---
[^1]: _ 여기서 받아들이다, 전염되었다 라는 말은 도저히 그 말을 반박하지 못했기때문에 가장 합당한 이론으로 채택한다는 뜻이다. 어떤 반박의 증거를 가져와도 보고싶은 것만 보면서 맹신하겠다는 것과는 다르다.
[^3]: _ 훗날 인공지능의 토큰 컨텍스트가 지금보다 100배 이상으로 길어진다면 이때 내가 썼던 글들을 모두 욱여넣고 나의 세계관을 요약해보라고 하고싶다. 지금은 그 두서없는 글들을 다시 읽어볼 엄두가 나지 않는다.
[^2]: _ 2025-02-10 오후 8:21 - 2025년 2월의 변화는, '나'를 좀 더 글에 드러내놓고 등장시키기 시작했다는 것 같다. 그만큼 나는 '나'라는 재료를 쓰지 않고서는 글을 쓸 수 없을 정도로 생각의 깊이가 얕아졌다는 것일지 모른다. 또는 그만큼 나는 외면하던 어떤 면을 보기 시작했다는 것일지 모른다.
[^4]: _ 이 명제 자체는 실현되고있으며 모순이 없다. 이 시뮬레이션 이론을 입증하는 문제가 모순이므로 모순이라는 테마에 끼워넣은 것일 뿐이다.
[^5]: _ 아닐지도 모른다. 창발이 일어나서, AI가 어느 지점을 통과하면 이제부터는 학습데이터에 없는 아주 전혀 새로운, 그러니까 지구문명의 물리법칙으로만 학습했어도 완전히 다른 행성계나 차원에서 적응하는 능력을 가질지도 모른다. 그러면 꼭 우주 전체를 시뮬레이션으로 만들, '돈이 되니까'정도의 강력한 필요성은 없어질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이런 의문은 지나친 비약일 수 있다. -이미 이런 현상은 일어나고 있기도 하다. 그러므로 '모든 경우의 수'를 학습할 필요는 전혀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