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아,『아버지의 해방일지』리뷰와 에피소드
사람이 오죽하면 글것냐. 아버지 십팔번이다.
그 말 받아들이고 보니 세상이 이리 아름답다.
(정지아,『아버지의 해방일지』, 창비, 2022)
주인공이 기억하는 아버지의 인감 됨을 가장 잘 표현해 주는 문장인 동시에 작품 속 모든 에피소드에서 드러난 아버지의 오지랖을 옹호하는 문장이기도 하다.매일 소주 한 병. 에쎄 한 갑을 밥처럼 드시다 전봇대에 머리를 박고 죽는 코미디 같은 아버지의 죽음. 하지만, 핍진한 삶을 살다 돌아가신 그분의 장례식을 찾아온 수상한 손님들의 사연은 잔치를 벌여도 모자랐다. 그들의 이야기보따리 속에서 나온 아버지가 과연 동일 인물이었을까? 딸이 아는 아버지는 자신이 열렬한 사회주의자인 줄 아는 어머니나 일갈할 줄 알고, 과거의 회한을 못 잊어 소주잔이나 기울이는 인생의 낙오자였다.
하지만, 장례식장을 찾은 그들이 만난 아버지는 다 늙어 이빨 빠지고 이미 상실된 사회주의나 안고 사는 노인이 아니었다. 늘 부자 같은 마음으로 내 곳간을 내어주는 것은 기본, 누군가에게는 청년 같은 기백으로 말을 섞어 용기를 볻돋아 주었고, 위로가 필요한 이들에게는 남녀노소를 가지리 않고 친구가 되어준 참 사람이었다. 가족에게는 별반 보여준 적 없던 그의 내면에는 산타클로스 뺨칠만한 이타심과 인간을 향한 따뜻한 연민이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영원한 사회주의자임을 자처하고 살았건만, 그의 마음 씀은 이미 이런 노선을 벗어난 선한 의지의 최고봉을 달리고 있었으니 주의 따위가 무에 명함을 내밀 것인가?
인생의 말미에 가진 것 하나 없이, 소주 일병, 에쎄 한 갑으로 하루를 영위하였다 하여 그를 인생에서 낙오한 사람이라고 볼 수 없는 것은 분명하다. 어떤 낙오자가 나라님도 구제 못하는 타인의 형편을 돕고, 마음에 깨달음과 위로를 주며, 스승질을 하는 이들도 못하는 용기를 끌어내고 위인 같은 존경심을 받을 수 있을까? 이미 그는 인간으로서 스스로 해방을 넘어 해탈의 도를 걷고 있지 않았을까?
한 달포 전쯤인가 국가보훈처로부터 아버지를 국가유공자로 선정하였다는 서신을 받았다. 필력이 좋은 분이라 행복에 관한 자신의 소신을 적은 책 한 권을 집필하고는 평생 빨갱이로 몰려 사회적으로 손발이 다 묶이셨던 분이다. 당시 최고 학력으로 학부 과정을 마쳤고, 6.25 전쟁에서 용맹하게 싸워 수훈을 올렸으며 한때는 고급 공무원으로 국가에 헌신하셨다. 하지만, 어느 한순간의 계기만 주어지면 빨갱이로 몰리기에 참 좋은 시절이었다.
말년에는 번역 일감을 받아 생활비를 벌었고, 비루한 벌이는 온전히 그의 소주 한 병, 청자 한 갑을 구입하는데 탕진되었다. 88 올림픽 개최를 앞두고 온 국민이 들뜬 어느 오후 그날따라 늦게 기상하신 아버지는 손녀뻘인 어린딸에게 물 한 잔을 요구하셨다. 그리고 그 물을 참 달게 드시고 한번 앓으시는 척도 없이 돌아가셨다.
인생은 아이러니라더니 이런 유머가 따로 없다. 돌아가시고 수십년이 흘렀건만, 그때는 빨갱이였고, 이제는 국가 유공자란다. 저녁식사로 수육을 삶던 중 국가보훈처의 우편 서류를 받아 든 나는 수육에 부으려던 소주 한 잔을 그대로 한 모금 들이켰다. 아버지, 쓰고 달고 한 소주 한 모금, 이런 기분이셨겠구나!
아버지의 술 한 잔에 담긴 인생이 느껴지는 묘한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