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몽 살구 클럽』 때늦은 후회

한로로, 『자몽 살구 클럽』리뷰와 에피소드

by 서은

『자몽 살구 클럽』


연수원에서 밥을 먹던 중 걸려온 친구의 부고. 밥공기에 담긴 하얀 쌀밥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앉았는데, 누군가 빨리 가보라 채근하는 소리가 들린다. 연수원 버스를 타고 내려오던 길에 올려본 하늘에는 한창 만개한 하얗고 분홍의 벚꽃 무리가 하늘 위 구름 다발과 맞닿아 하늘에 핀 것인지 땅에 핀 것인지 ... 가물가물 현실 같지 않았다. 강렬한 봄 햇살과 어우러져 반짝거리는 벚꽃 무리는 마치 윤슬 같아 그 아름다움에 눈을 감았다. 참 고운 날이었다. 하지만, 소소한 바람에도 벚꽃은 하염없이 꽃잎을 뿌려댔다. 약하게 흔드는 바람에도 벚꽃은 허망하게 지는구나 생각하던 중, 제법 진한 벚꽃 잔향에 정신이 함께 아득해졌다. 나는 그날 이후로 벚꽃이 그다지 아름답지 않았다. 내게 벚꽃은 만개하지 못한 친구였고, 만개한 슬픔이 되었다.


은영은 대학 동기이자 서클 친구이다. 졸업 후에도 동급생 모임에서 가끔씩 보았으나 서로 속 깊은 이야기를 하는 사이는 아니었다. 직장 생활로 친구들과 만날 기회가 줄어들자, 자연스레 사는 동네도 회사도 가까운 그녀와 가끔씩 만나게 되었다. 서로가 가끔은 편안한 점심밥을 먹고 싶었던 직장인이라 업무의 연속선상 같은 점심 식사시간을 자주 이탈하여 점심을 먹었다. 우리는 이런저런 대화를 하면서 잠시나마 퍽퍽한 직장일과 일상의 스트레스를 잊을 수 있어서 좋았다. 동네 친구이기도 했던 터라 퇴근 후 카페에서 끝없는 수다를 떨거나 쇼핑을 함께 즐기기도 하였다.


은영이 사랑하는 남자가 생겨 바빠지고 나도 승진 시험 준비로 바빠 한동안 서로 소원할 때였다. 두 달 만인가 집 앞으로 찾아온 그녀를 위해 카페로 가면서, 이렇게 늦은 시각에 찾아온 그녀가 조금 의아하였다. 그리고 연수원에 입소할 짐을 꾸리던 터라 사실 조금 부담스러웠다. 카페에 도착했을 때 나는 하마터면 그녀를 못 보고 지나칠 뻔하였다. 은영은 두 달여 만에 말라도 너무 말라있었다. 검정 나시티 위에 굵게 직조한 흰 망사 티 위로 쇄골이 깊게 드러났고, 앉아있으니 짧은 미니스커트가 허벅지 위까지 올라가 앙상한 다리가 다 드러났다. 화장까지 짙게 한 그녀는 아름다워 보였으나 잠깐은 꽤 낯설었다. 그리고 외모의 변화보다 더 눈길을 잡아끄는 건 깊어진 눈이었다. 나는 그간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묻고 싶었지만, 잘 지냈냐고만 물었고, 그녀는 웃으며 그렇다고 대답했다. 우리는 아무렇지 않은 듯 대화를 나누었지만, 뭔가 빙빙 도는 느낌의 시간을 갖다가 헤어졌다. 연수원에 들어오기 5일 전 그날이 은영을 본마지막 날이었다.


그녀를 마지막으로 만난 게 나였기에 친구들은 나를 추궁하였다. 사실 뭔가 꺼림직했으나 나는 그녀를 잘 살피지 않았다. 젊은 날 화려한 내 커리어를 채우는 데만 온통 신경이 집중돼 있었다. 좀 더 빠짝 당겨서 들여다보고, 다독여 이야기 시켜볼 걸 그랬다. 때늦은 후회다.




사람은 참 간사하다. 죽고 싶을 때는 당장 눈 뒤 짚이고 혀 깨물다가도 언제 그랬냐는 듯 밤 호수처럼 잔잔해질 때가 있다. 나에게는 지금이 그 순간이다. 아무렇지 않게 편의점에서 저녁 메뉴를 고민하는 순간. 언제 또 버튼 눌러 '쉽게 죽는 법'을 검색하게 될지 모르는 순간. 주변 사람들도 같이 살얼음판 위를 지나는 듯한 지금 이 순간.

......

맞고 있는 거는 동안에는 이대로 눈 감는 게 차라리 나을 거라고, 자살보다는 타살로 죽는 게 쉬울 거라고 생각했다. 아빠의 발이 내 심장에 꽂혀 심장마비로 죽을 수 있기를 바라기까지 했다. 어느새 나는 진짜 바보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세상은 늘 그래왔듯 잔인했다. 한 번만 더 처맞으면 죽을 수 있었는데 아빠는 그 한 번을 채워주지 않았다.

(한로로, 『자몽 살구 클럽』 어센틱, 2025)




또, 한차례 속은 느낌이었다. '자살을 거꾸로 하면 살자'라는 철부지 아이들의 말장난처럼 시작되는 자몽 살구 클럽은 산뜻한 뉘앙스와는 달리 꽤나 무거운 주제의 이야기였다. 이 클럽의 이름에는 죽자와 살자가 묘하게 공존하다. 하지만, 죽자는 클럽은 아니다. 너무 살고 싶은데 그저 죽지 못해 살아가는 아이들이 어떻게든 살 이유를 찾고 싶어 몸부림치는 모임이다. 세대가 바뀌어도 바보 같은 사고방식의 사회 혹은 악랄한 어른들은 늘 존재하고, 그 안에서 고통받는 아이들 역시 여전하다. 게다가 열약한 환경에서 자라는 아이들이 꿈을 잃고 삶과 죽음의 경계선을 서성거리는 일은 오히려 더 많고 다양해진 것만 같아 안타깝다.


01 나는 살구 싶나

02 이보현은 살구 싶다

03 하태수는 살구 싶다

04 나유민은 살구 싶다

05 나는 살구 싶다.


처음에는 죽고 싶지 않아서, 살자를 외치며 모인 아이들의 만남은 의외로 유쾌했다. 그저 악이라곤 저질러본 적 없는 선한 아이들이었으므로. 제각각 죽을 이유보다는 살 이유를 늘려가려는 이들의 여정은 따뜻하고 행복해 보인다. 바다에 가서 영화를 찍고, 미용실에서 학생 신분에서 살짝 일탈할 정도의 멋을 내 기분전환을 하고, 소각장에서 교과서와 참고서를 불태운다. 자신이 하고 싶었던 것과 죽도록 하기 싫었던 것들을 하나하나 구분해가면서 잔치 같기도 하고, 한풀이 같기도 한 소풍을 이어가는 아이들. 아이들을 따라가다 보면 절로 그 시절로 돌아가서 함께 놀고 싶어진다. 어떻게 작가들은 이다지도 자기만의 색깔로 맛있게들 글을 써내는지 이번에는 한로로 작가의 문장과 문장 사이를 가쁘게 뛰어다니며 머릿속을 즐거운 상상으로 채웠다.


이렇게 이야기가 이어졌으면 그저 한편의 순정만화 같은 이야기였을 것이다. 그러나 세상은 아이들이 아이답게 성장할 시공간을 내어주지 않았다. 순정만화 같아야 할 아이들의 삶이 어른들에 의해 폭력 범죄 영화가 되었다. 자몽 살구 클럽의 대장으로 부원들을 이끌던 명랑소녀 태수는 제일 먼저 '살자'를 포기하고 '자살'을 선택했다. 소하같이 가진 것 없고 아빠로부터 구타를 당하는 불행한 아이들이 자살을 선택하면 '그럴 수 있지'라고 생각하지만, 태수처럼 번듯한 가정의 아이가 스스로 삶을 포기하면 '나약하다'라고 핀잔한다. 궁핍한 생활과 수많은 종류의 학대와 역경 속에서도 잡초같이 억세게 살아가는데, 남부러울 것 없는 가정에서 공부와 성적 취향 등으로 훈육 좀 받았다고 죽냐? 라고 반문할 수도 있다.


태수는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부모의 기대에서 오는 높은 성취목표, 사회적인 경쟁과 이미지메이킹 등의 중압감이 심했을 것이다. 나의 기득권을 지켜줄 아이가 돼야만 하는 가정에서 부모는 주는것이상 바라는 게 많아지고 아이들은 숨을 쉴 수 없다. 눈에 빤히 보이는 무지한 부모의 폭력과 학대만을 담론화할 일은 아니다. 세상에는 아이들을 향한 다양하고 교묘한 학대가 수없이 많다. 성적 취향의 부정은 아이에게 가장 고통스러운 부분이었을 것이다. 인간이 바보가 아닌 이상은 자신의 정체성을 부정당하고, 내가 아닌 나로서 살아가기는 힘들다. 부모가 절대 군주인데, 부모와의 관계 회복이 불가능했던 태수 같은 아이가 누구보다 덜 취약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의문점이 든다. 평범한 인간은 살아야 할 이유가 더 많을까? 아니면 죽어야 할 이유가 더 많을까? 긍정적이냐 부정적이냐의 문제만은 아닐 것이다. 굳이 철학적으로 접근할 필요도 없다. 세상의 끝에 몰린 아이들이 스스로에게 묻고 싶은 질문은 살아야 할 이유와 죽어야만 할 이유중 어느쪽이 더 우세한가 하는 것이다. 아이들이 D-day를 만들고 계획을 실천하며 살아갔던 이유는 비록 4명뿐이지만, 날 걱정해 주고 사랑해 주는 존재가 있고, 그들과 살아야할 이유를 늘릴 수 있다는 희망때문이었다. 특히나 굳이 가족이 아니라도, 태수와 유민은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을 보면서 현실을 잊었다. 소하에게는 얼른 학교를 졸업하고 어른이 되어 매일이 지옥 같은 아빠의 집으로부터 탈출하겠다는 계획이라는 게 있었다. 그러나 어른의 돌봄이 필요한 나이에 병문안과 6살짜리 남동생까지 돌봐야 했던 보현에게는 돈이 엄청 많이 들 것만 같은 영화감독이라는 꿈은 사치이다. 자신에게 꿈을 줄 수 없는 아이는 좌절한다. 내일은 달라질 수 있다는 미지의 변화 가능성이 1도 없는 현실은 사실 성인에게도 힘든 것이다. 꿈조차 꿔볼 수 없는 고통스러운 내부의 감정은 죽음만이 스스로 할 수 있는 평화로운 마지막 결정이라고 속삭인다.


가장 가슴이 아픈 건 역시나 인간 말종인 아빠와 함께 사는 소하. 술 마시고 들어온 남편의 지속적인 매 타작에 반 정신 나간 여자가 되어 집을 뛰쳐나간 엄마와 그 엄마를 대신해서 폭언과 폭행을 감내하면 사는 소하는 차츰 바보가 되어 가는 중이다. 거듭되는 폭언과 폭행에 익숙해지면 사람은 곧잘 바보가 된다. 유일하게 의지했던 엄마가 나를 버렸다는 것에서 존재가치를 부정당했고, 폭언과 폭력을 일삼는 아버지는 아이를 긴장과 불안 속에 떨게 만들었으며, 사랑받아본 경험이 없는 아이는 불행의 원인을 곧잘 자신의 내부로 돌린다. 이런 아이들은 대개가 타인에게도 마음을 열지 못하는데, 우연히 가입하게 된 자몽 살구 클럽의 언니들은 가족보다 더 나은 친구가 되어주었다. 그러나 그들은 가족이 아니다. 가족이 가족에게 저지르는 범죄는 쉽게 드러나지 않고, 또래의 아이들의 어찌 도와줄 수도 없다. 그저 시간을 내어 곁에 있어주는 게 전부일뿐이다. 소하를 결정적으로 무너지게 만든 것은 너무도 행복하게 대체 가족을 찾은 엄마를 본직후였다. 엄마가 자신을 버린 것이 아빠 때문임을 지각하고는 있지만 자신을 완전히 잊고 행복한 새 삶을 사는 엄마에게 차마 다가설 수가 없다. 이제 아이는 아빠가 이 가정과 자신에게 모든 불행의 원흉이며 자신이 죽을 이유였다는 것을 완벽하게 자각하고 자살의 스위치라는 발작 버튼을 자신이 아닌 아빠를 향해서 누른다. 왜? 아이는 더 이상은 바보가 되고 싶지 않았고 그 와중에도 살고 싶었으므로.


진짜 죽을 사람은 자신의 자살 계획을 발설하지 못한다. 아이들이 죽고 싶다고 할 때는 그만큼 살아내는게 힘들다고, 살고 싶다고 도와달라는 외침이다. 우리 사회가 얼마나 많은 소하, 태수, 유민, 보현의 외침을 못 들은척하며 실제로 자살행위나 안 좋은 일들이 벌어졌을 때만 잠시잠깐 관심을 가질지, 아이들이 불행한 원인을 찾아 지속적인 관심과 노력을 쌓아가며 도움을 줄지는 가족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전체의 담론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들의 부모처럼 너무 때늦은 후회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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