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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미술쌤 옐로 Oct 01. 2021

글을 그리면서 그림을 쓴다

04. 보여주기 두려워하지 않기


“눈 감고 있으세요.”

아이들은 재미난 그림을 보여주기 전에 미리 그림을 볼까 봐 눈 감고 있으라 할 때가 있다. 한꺼번에 그림에 담긴 이야기를 쏟아낼 준비를 하는 것이다. 그림을 보자마자 놀라워하는 표정을 지으면서 관심 있게 들어주면 없는 이야기까지 이어진다. 이야깃거리를 마음껏 풀어놓은 다음 재미있었다는 말을 곁들일 때면 그림 그리는 게 재미있었는지 이야기를 들려준 게 재미있었는지 궁금하기까지 하다. 그것은 나도 마찬가지다. 아이들 그림이 재밌었는지 엉뚱한 이야기가 재밌었는지 헷갈린다.    


  

눈을 감고 있으라고 해서 꼭 감고 있지는 않다. 슬쩍 실눈을 뜨고 쳐다보거나 조금 떨어져서 바라보면 표정에서부터 벌써 이야기가 시작된다. 신나는 장면에서 웃고, 진지한 장면에서는 눈빛이 반짝인다. 머릿속으로 상상하는 만큼 열심히 손과 표정을 움직이고 있다. 아이들은 지금 리허설 중인 것이다. 이야기의 끝맺음이 완성될 때까지 자기만의 세계가 펼쳐지고 있다. 조용히 리허설이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준비한 공연을 감상하면 된다. 중간에 보고 있는 것을 들킬 때면 약속을 어긴 사람처럼 주의를 받는다.

“진짜 보면 안 돼요.”     



그림 보여주는 걸 가장 좋아했을 때가 언제인지 생각해 보면 이 시기쯤이었던 것 같다. 하얀 종이 위에 형체가 드러나는 과정이 즐거웠고, 그 형체가 품은 나만의 이야기가 좋았다. 그림이 혼자만 알아볼 수 있을 만큼 형편없이 그려져도 상관이 없었다. 중요한 건 그림의 완성도가 아니어서 그림 그리는 것에 거리낌 없었던 것 같다. 뭔가를 그릴 때마다 보여주기 위해 들고 다녔다. 자랑하고 싶고, 꺼내고 싶은 것들이 많았다. 사소한 것 하나까지 보여주고 싶었다. 그림으로 관심받는 것은 집 밖에서 뛰어노는 것만큼 신나는 일이었다. 어쩌면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그림을 그리게 했던 것 같기도 하다.


    

보여주고 싶은 마음을 들여다보면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어떤 꿈이 있는지, 어떤 생각으로 살고 있는지 전달하길 원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나를 보여주는 과정인 것이다. 특히 좋은 걸 보여주고 싶어 하는 마음이 큰 만큼 좋은 평가를 기대하게 된다. 그림에 대한 좋은 평가와 나에 대한 좋은 평가를 함께 듣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일까. 듣고 싶은 평가에 대한 기대치가 높아지면 두려움이 생겨 버린다. 두려움은 그림 그릴 때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부정적인 감정을 종류별로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그림이 서툴면 자신도 서툰 사람으로 여겨져서 걱정하기도 하고, 부족한 부분에 집착해 실망하기도 한다. 때론 부담감에 시달리기도 하고, 만족을 느끼지 못해 좌절하기도 한다. 열심히 노력해도 발전되는 느낌이 들지 않고, 표현하는 것에 점점 소극적으로 변해가는 자신을 발견하기도 한다. 그러다 슬럼프에 빠지기라도 하면 그림을 포기하거나 멀리하게 된다. 그림은 그리는 사람을 표현하는 수단이 되는 건 맞지만 그림의 완성도가 그 사람 전체를 대변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그림을 몰래 숨겨두기 위해 그리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어린 시절 그때처럼 보여주는 것을 두려워 말고 즐기자. 아이들처럼 이런 거 몰랐죠? 이런 건 어때요? 하는 마음을 상기시켜 보는 것이다. 있는 그대로의 감정을 전달하는 마음 말이다. 예쁜 그림을 보여주고 싶고 예쁜 마음만 들려주고 싶은 게 아니다. 상대방이 나와 같은 마음을 공유하기를 원한다. 장난스러운 표현에는 한바탕 웃으면 기뻐할 것이고, 갖고 싶은 물건을 그려 보여주면 어떤 선물을 기대하는지 뻔히 보이니 고민할 필요도 없다. 슬픈 표현을 마주했다면 그 상황을 헤아려주면 된다. 물론 칭찬받기를 원하는 마음으로 그림을 그릴 수도 있다. 그러면 칭찬을 해주면 되는 것이다. 한마디 칭찬으로 상대방에게 만족감을 안겨줄 수 있는데 인색할 이유가 없다.   


  

“이제 눈 뜨세요.”

보여줄 시간이 되었다. 아이의 눈빛은 자신의 그림이 아니라 내 눈에 꽂혀 있다. 그림을 그릴 때처럼 묘한 표정을 보내고 있다. 표정에서 느껴진다. 이렇게 보여주는 순간을 기대하며 그림을 그렸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림 그리고 싶은 사람이라면 이런 순간의 느낌을 꼭 기억하고 있길 바란다. 그림을 보여주는 것에 두려움을 앞세우지 말았으면 한다. 보여주길 잘했다 싶을지 후회하게 될지는 보여줘 봐야 안다. 아이와의 눈 맞춤에서 시선을 옮기면 아이가 표현한 세계로 들어가게 된다.  이야기 속 일부가 되는 순간이 온 것이다. 어쩌면 그 이야기의 결말은 나의 반응이 되기도 할 것이다. 참고로 말하자면, 이 순간을 즐기고 공감하는 만큼 인기 있는 선생님이 되는 것 같기도 하다.     



생각해 보면 그림 보여주는 걸 좋아했던 내가 거부감을 가졌던 순간이 아이러니하게도 미술학원이었다. 첫날 상담을 받으며 그리고 싶은 걸 그려보라고 했다. 미술학원으로 오는 도중에 봤던 공사현장이 떠올라 그것을 그림으로 그렸다. 건물을 둘러싸고 있던 철근을 나름 하나씩 정성껏 그리고 있었는데, 냉정한 평가를 받았다. 사람을 뭐 이렇게 작게 그리냐였다. 다른 이야기가 더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기억이 안 난다. 첫마디를 듣고 건물 철근 사이에 있던 작아 보이는 사람들만 생각났었다. 작게 보여서 작게 그렸는데, 작게 그려서 큰 잘못을 한 것 같았다. 어린 마음에 상처가 생겼는지 색칠을 다 하지 못했다. 더 큰 잘못을 할 거 같았기 때문이다.   


   

미술학원을 운영하면서 가끔 이 기억이 떠오르곤 한다. 아무래도 생애 처음 미술학원이라는 곳에 가서 그림 잘 그리시는 선생님으로부터 칭찬이 듣고 싶었던 것 같다. 그림 그리기를 즐기기보다 남들의 평가에 관심이 생기던 시기가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그 순간을 잘 이겨냈더라면 방학 동안 미술학원에서 그림 그리며 재밌게 보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나중에서야 생겼다. 보여주는 것에 두려움이 있다면 분명 원인이 있을 것이다. 왜 그런 감정이 생겼는지 고심해 보고, 할 수 있다면 훌훌 털어내 버렸으면 좋겠다. 그림을 볼 때도 공감하기 위해 애써야 할 것이다. 그림은 단 한 명이라도 공감해 주는 이가 있다면, 충분히 즐길 가치가 있다. 생애 전부를 그림에 바치는 사람들도 많다. 비록 그 삶이 불행해 보일 수도 있지만, 불행만이 아니었음을 그들이 남긴 그림에서 느끼게 된다. 고통보다 더 큰 사랑이 보여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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