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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미술쌤 옐로 Oct 02. 2021

글을 그리면서 그림을 쓴다

05. 받아들이지 못하면 멈추게 된다


미술학원에서의 첫 평가를 나름대로 잘 이겨냈더라면 방학 동안 그림을 배우며 재밌게 보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나중에서야 했던 것처럼, 시간이 흘러야 이해되는 경우가 많다. 경험치가 필요한 부분들이 그렇다. 내게 필요한 두 가지를 동시에 가르쳐 준 날이 있었다. 가르침은 하루에 받았지만, 그것을 이해하기까지는 무수히 많은 날이 흘러야 했다. 더 솔직히 말하자면, 이해하지 못하는 척했다. 받아들이지 못했기 때문이다. 두 가지 중 하나가 바로 그림으로 나를 보여주는 것을 거리낌 없이 할 줄 알아야 하는 것이었다. 다른 하나는 원하는 것을 정확히 알고 보여줘야 한다는 것이다. 제대로 보여주지 않고서 상대방이 이해하지 못한다고 섭섭해서는 안 되며, 자신도 이해하지 못하는 사실을 상대방이 인정해 주길 바라서는 안 된다. 지금이라도 그때의 생각과 감정이 전부가 아니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경험치가 쌓였기 때문이다.  


    

십여 년 전, 면접을 보기 위해 대기실에 앉아 있었다. 다들 자기 순서를 기다리며 입을 꾹 다물고 가만히 있었다. 가끔 핸드폰을 만지작거리거나 가져온 포트폴리오를 매만지기도 했다. 그 틈에 끼여 한 명당 면접시간이 5분에서 10분 사이라면 언제쯤 차례가 될지 머릿속으로 계산해 보기도 하고, 어떤 질문에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단어 하나씩을 상기해 보기도 하고 있었다. 잠깐의 시간이 흐른 후, 옆에 앉아 있던 분이 가져온 포트폴리오를 펼쳐 보이자 자연스레 고개가 돌아갔다. 어떻게 했나 보고 싶었다. 비밀도 아니고 궁금해서 보는 게 죄는 아니지만, 노골적으로 보는 것도 실례가 될 것 같아서 작품을 넘기는 소리가 날 때마다 살짝 봤다. 그런 내 맘을 눈치라도 챘는지 작품에 대한 스토리를 독백하듯 중얼거리기 시작하는 거였다.    


 

사실 면접관에게 들려줄 작품 설명을 연습했던 게 맞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마치 누구라도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보라고 하는 것처럼 착각하게 했던 이유는 연습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진지한 그녀의 태도 때문이었다. 거의 구연동화하듯이 표현하고 있었다. 그림 한 장에 그림책 한 권의 내용을 선보이는 듯했다. 나의 관심은 그녀의 그림이 아니라 그녀의 생각으로 옮겨갔다. 어떤 생각을 담고 있는지 귀를 기울이게 했다. 다른 분들도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는지 목소리가 조금 커질 때마다 쳐다보곤 했는데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듣다 보니 난해한 이야기들이 쏟아졌다. 다시 작품을 바라보았다. 바다, 물방울, 여자 주인공 등의 단편적인 이미지들이 단어 몇 개와 뒤섞이며 혼란스러웠다. 이렇게 표현해도 되나 싶은 마음이 들면서도 차츰 독특하다는 느낌으로 바뀌어 갔다. 그 이유는 역시 그녀의 태도, 거리낌 없이 자신을 보여주는 모습 때문이었다. 다른 곳이었다면 상태가 멀쩡한지 의심했을지도 모르지만, 그날은 사람이 저 정도는 돼야 작가로 살 수 있을 것 같은 부러움이 생겼다. 괜히 내가 평범하게 느껴졌다.     



몇 달간 열심히 준비한 작품들도 평범하지 않을까 하는 의심에 사로잡힌 채 면접실로 들어갔더니 예상했던 것보다 더 떨려왔다. 처음엔 일상적인 질문과 대답이 오갔다. 포트폴리오가 펼쳐지자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온 신경이 손끝으로 향해 있었다. 작품 수를 많이 채운 편이었는데 건너뛰지 않고 꼼꼼하게 봐주시는 것 같아 잠시 안심이 되기도 했다. 면접관 중의 한 분이 긴장을 풀어주시려고 농담을 던졌었다. 웃었는지 안 웃었는지는 모른다. 포트폴리오가 펼쳐지는 순간부터 정지 화면이 되어 있었던 것 같다. 그렇게 십 분이 채 안 되는 시간이 흘러갔고 면접을 마치고 나왔다. 몸은 움직이고 있었지만 대답하지 못한 한 가지 질문에 빠져 있었다. 깊이 빠질수록 손에 들린 포트폴리오가 무거워지는 느낌을 받았다. 짐처럼 여겨졌다.   


  

“본인이 뭘 원하는지 모르고 있네요.”

“네?”



이것은 질문이었을까. 격려였을까. 안타까움이었을까. 예상치 못한 물음에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애매한 평가였다. 뭔가 들킨 기분이 들었다. 대답 대신 그 짧은 시간에도 머릿속엔 질문으로 가득 차 버렸다. 포트폴리오만 보고 어떻게 아셨을까? 연륜이란 이런 것일까? 경험이 쌓이면 상대방의 심리까지 꿰뚫어 보게 되는 것일까? 나 같은 사람이 많았나? 역시 너무 평범했던 것일까? 내가 뭘 원했더라......

사실 뭘 원하는지 몰랐다. 어떤 그림을 그리고 싶은지도 몰랐고, 어떤 이야기가 하고 싶은지도 몰랐다. 괜찮아 보일 거라고 여겼던 것으로 작업해 채워 넣기에 바빴을 뿐이다. 구체적으로 어떤 목표가 있었던 건 아니다. 그저 붙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었을 뿐이다. 되면 좋고, 아니면 어쩔 수 없다는 마음이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반감이 생겨 심술을 부렸다.

‘모르니까 알려고 왔지. 눈치챘으면 가르쳐나 주지.’     



「 행복하기 위해서는 지금 내 마음에 귀 기울여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기준만 좇아서는 결코 행복해질 수 없으니까요. 설령 나중에 마음이 변하더라도, 그땐 그 변한 마음에 또 충실하면 됩니다.      

우리가 행복하기 위해서는 정말 원하는 게 뭔지, 마치 정신 나간 사람처럼 끊임없이 고민하고 찾아야 하는 것 같습니다. 그 일은 다른 사람에게 맡길 수 없습니다. 오직 우리 스스로 해야 하지요. 어쩌면 그 작업은 평생 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정말 원하는 걸 빨리 못 찾을 수도 있고, 그것이 계속 바뀔 수도 있으니까요. 하지만 여행의 즐거움은 계획된 일정을 지킬 때만 생기는 게 아닙니다. 때론 일정이 틀어지고, 온갖 우여곡절을 겪는 도중에 생기기도 하죠. 행복 역시 이와 같습니다.」     



전승환 작가의 ‘내가 원하는 것을 나도 모를 때’ 작품을 읽으며 그때의 심술이 떠올랐다. 다른 어떤 질문도 없이 꼼꼼히 포트폴리오를 살펴보신 후 내 눈을 바라보며 부드럽게 말씀하셨던 사실이 지금에야 와닿는다. 심술부릴 일이 아니었다. 정직한 조언을 해주신 것이다. 그때라도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정신 나간 사람처럼 끊임없이 고민하고 찾았으면 어땠을까. 언제 변덕을 부릴지 모르는 마음에 집중하는 것보다, 현실에 집착하는 게 더 현명하다 여겼는데 아니었다. 때때로 일어나는 의문에 반감 대신 받아들이고 노력하는 자세를 가진 사람이었다면, 일정이 틀어지고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웃을 수 있었다면, 다른 건 몰라도 더 행복한 사람으로 지내지 않았을까. 지금 내 마음에 귀를 기울이라는 작가의 말이, 설령 나중에 마음이 변하더라도, 그땐 그 변한 마음에 또 충실하면 된다는 작가의 말이 너무나 절절하다. 같은 뜻으로 조언을 해주신 게 아닐까 생각하니 인정받기만을 원했던 마음이야말로 못된 심술이었던 것이다.


     

세상 참 좁다는 말을 실감할 때가 있다. 반년 후에 다른 면접장 복도에서 독백으로 내 정신을 쏙 빼놓았던 그녀를 다시 만났다. 독특함으로 무장해 나를 평범하다는 생각에 빠지게 했던 사람이 먼저 알아보고 반가워하는 모습이 신기했다. 아무에게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옆에 조용히 앉아 있던 사람을 기억하다니 의외라고 생각했다. 다만 이번에도 부러움을 느끼게 했다. 나는 면접을 보러 왔고, 그녀는 이곳을 다니고 있었다. 그녀가 격려를 해주고 갔음에도 결국 또 떨어졌었다. 굳이 변명을 해 보면, 앞서 말한 두 가지를 극복해 내지 못한 게 원인이라고 하고 싶다. 받아들이지 못하면 멈추게 된다. 긴 멈춤을 겪었다. 다행히 경험치가 쌓여 움직일 수 있게 되었지만 그러기엔 시간이 꽤 걸린 것이다. 시간을 돌아 그림을 그리고 싶은 이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것은, 거리낌 없이 나를 보여주되 섭섭해하지 말고, 다른 사람이 인정해 주길 바라는 마음에 앞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스스로 먼저 인정해 주었으면 한다. 받아들이는 그릇의 크기만큼 자신의 그림을 담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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