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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nim Aug 18. 2022

청춘의 상실

코로나 시대의 오징어 게임


 코로나 시대의 청년 취업준비생들(이하 취준생)은 여느 시대의 청년들보다 더 큰 좌절과 상실을 맛보고 있다. 코로나 사태로 인한 불황으로 기업들이 신입 채용 규모를 대폭 줄이며 취준생들은 취업 실패의 설움을 여지없이 느끼고 있다. 원하는 직종은 조금씩 달라도 취업 절벽을 딛고 서기 위해 저마다 혼신의 힘을 쏟고 있는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예전에는 언젠가 벼랑을 탈출할 수 있다는 희망을 품었다면 지금은 그조차도 없이 암울한 열패감에 시 달리고 있다. 그러다 보니 최근 들어 벼랑에 ‘공정’하게 매달려 경쟁이라도 할 수 있게 해 달라는 청년들의 목소리가 거세진다.


 일단 경쟁 과정이 공정해야 그에 따른 결과를 인정하겠다는 코로나 시대의 취준생들이다. 스펙을 쌓고, 시험 준비를 하여 평등하게 주어진 기회에 따라 모든 과정을 공정하게 통과한 자만이 정당하게 취업을 할 수 있다. 특히 안정성이 보장되는 정규직 일자리라면 두말할 것도 없다. 이 와중에 인천국제공항 등 공기업 내 비정규직 사원의 정규직화 정책에 대한 논란이 불거졌다. 몇 년간 나름대로 시간의 농도를 높여온 취준생의 입장에서 비정규직들은 비교적 쉽게 그러나 불완전하게 입사한 자들이다. 애당초 그들의 경쟁 상대가 될 수 없는 부류였다. 그런데 갑자기 비정규직들이 정규직으로 전환된다니, 취업의 길이 더 좁아질 것이라는 엄청난 공포가 그들에게 몰려왔다. 공포는 점차 분노로 바뀌며 취준생들을 전사로 거듭나게 했다. 그들은 특히 온라인 세상에서 이 같은 정책을 엄청나게 비난했고, 득달같이 달려들어 전투를 벌였다. 공정이라는 프레임 안에서 자신들의 분노를 감정적으로 쏟아냈다.


 코로나 시대 청년들에게 우리 사회 내 비정규직 비율의 현황과 그네들이 겪는 설움을 이해해 달라고 부탁하는 것은 무리이다. 곁에 있는 대학 내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도 관심 한 번 제대로 갖지 않던 이들에게 무엇을 바랄까. 정작 자신들이 스펙을 위해 인턴이나 비정규직 사원으로 일할 때 느낀 애환은 누구보다 선명하게 기억할 테다. 타락한 세상에 맞선 그들의 저항 방식은 한 편의 블랙코미디 같은 씁쓸함을 남긴다. 이 사회의 수많은 을(乙)들끼리 공정이라는 프레임 안에서 싸우는 모습을 바라보며 무엇인가 잘못되었다는 느낌을 받는다. 양극화된 일자리 속에서 불안하게 일할 수밖에 없는 이 사회가 공정한지가 아니라, 누구의 취업 방식이 더 공정하고 정당한지를 따지는 우리 사회와 청년들의 모습에 한숨을 내뿜는다.


(라이언 맥긴리, '청춘')


 문득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 게임>이 떠오른다. <오징어 게임>은 어마어마한 빚더미에 앉은 사람들이 456억 원의 상금이 걸린 의문의 서바이벌 게임에 참가해 생존경쟁을 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참가자들은 서로를 짓밟고 올라서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싸운다. 조금이라도 규칙을 어기면 게임의 공정성에 위해를 끼친 죄로 처벌당하고, 규칙의 테두리 안에서는 살인을 포함한 어떠한 행동도 용납된다. 사실 참가자들이 서로 연대한다면 게임의 양상을 완전히 뒤엎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토록 삭막한 게임의 섬에서 그러한 인류애적 행동이 출현할 공간은 없다. 돈의 논리에 의해 평등한 기회, 공정한 과정, 정의로운(?) 결과만이 강조된다. 극도로 비인간적인 환경에서 게임을 하게 만든 이들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누가 더 그 상황에 효율적으로 적응하는지 다투는 극 속의 상황이 안타까웠다. 그리고, 기시감이 들었다.


 어쩌다 우리 청년세대가 <오징어 게임>과 같이 바람직하지 않은 경쟁시스템에 갇혀야만 했을까. 그 기원은 25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97년 IMF 외환위기 사태는 87년 민주화 이후 90년대 해소되지 못하던 사회 불안을 총체적으로 폭발시켰고, 우리 사회에 장기적으로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자본 논리에 의해 기업 구조조정이 진행되며 수많은 실업자가 생긴 한편 비정규직 일자리가 양산되기 시작했다. 삭막한 사회 분위기 속에서 청년들은 점차 개인주의화될 수밖에 없었다. 우리 사회와 공동체의 발전에 대한 고민보다는 자신의 앞날에 대한 걱정으로 청년들은 끝없는 경쟁시장에 몸을 던졌다. 대학은 이른바 취업사관학교로 전락해버렸다. 그 후로 많은 시간이 지났지만 97년 전후로 형성된 사회 지형은 여전히 공고하다. 극대화된 자본 논리의 산물은 한국 사회를 ‘무한 경쟁사회’로 만들었고, 타인에 대한 공감 결여와 무관심은 전 세대를 통틀어 심각해져만 갔다.


 잔인하지 않은 사람들의 타인에 대한 무관심이 잔인한 사회를 가능케 한다.* 물론 이러한 현실을 만들어내고 청년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기성세대의 잘못이 매우 크다. 다만 기성세대의 잘못을 비판하려면 우리 청년세대부터 좀 더 깊고 넓은 혜안을 가져야 한다. 너무 많은 청년이 당장 자신의 현실에만 집중하는 것 같다. 언제, 어디서부터 우리 사회 시스템이 잘못되어왔는지, 그 시스템의 잔여적 존재들은 어떻게 살아가는지,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관심을 가지고 사유해야 한다. 청춘이란 특정한 ‘시기’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꿈을 신뢰하고 움직이는 ‘상태’를 의미한다는 말을 잘 곱씹어봐야 한다.*


 당신은 지금 ‘청춘’인가?



*해당 문장은 각각 지그문트 바우만(Zygmunt Bauman)과 사무엘 울만(Samuel Ulman)의 글을 인용한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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