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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가 아니다.

이직에 성공했지만 실패한 나에게

by 인생은 꽃

이직에 실패했다.

아니 잠깐.

면접에 합격을 하고 직장을 옮겼지만, 2달도 안되어 정신이상이 올 정도로 일을 하기 싫어졌다면 그건 이직을 성공했다고 해야 하는 걸까 실패했다고 해야 하는 걸까.

이직에 성공했지만 적응에는 실패했다는 지루하고 긴 문장으로 설명을 해야 하나.


이번이 내 3번째 직장이다. 서버 어드민으로 커리어를 시작해 이런저런 일을 하다가 클라우드 업체로 이직해 피나는 노력으로 커리어를 쌓고 야심 차게 새롭게 도전한 일. 내 평생을 책임져 줄 바로 그 일이라고 확신을 가지고 많은 사람들의 응원을 받으며 시작한 일. 그 일이 아무리 생각해도 단 두 달만에 처참한 실패로 돌아간 것 같은데, 그걸 받아들이는 것이 눈물이 왈칵 쏟아질 만큼 어렵다. 모든 것을 잃어버린 기분이다.


일을 정말 사랑하던 때가 있었다.

5년 전 아직 첫 직장을 다니고 있을 때를 생각하면 정말 반짝반짝 빛이 난다. IT와는 거리가 먼 자연대를 졸업한 나는 다분히 학문적인 전공에 대한 반대급부로 가장 실용적인 기술을 하겠다는 생각으로 IT업계에 입문했다. 다행히 나 같은 컴맹도 거두어 엔지니어 모양으로 깎는 시간과 비용을 투자할 수 있는 대기업이었다. 나는 무지했던 만큼 빠르게 성장했고, 하나하나 알아가는 내 모습이 자랑스러웠다. 내가 원하는 나의 모습이 그려지고 있었다.


그 무렵 나의 가장 큰 자랑은 일을 평생 하고 싶다는 거였다. 대학 친구들과 만나는 자리에서 나는 늘 평생 일하고 싶다고, 죽기 직전까지 일할 거라고 말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약간 거들먹거리며 말을 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만큼 자랑스러운 일이었다. 죽지 못해 일을 한다는 현대 사회에서, 일을 사랑해 마지않는 나라니! 정말 특별했다.


나의 커리어는 물 흐르듯 잘 쌓여갔다. 좋은 기회들이 찾아왔고, 좋은 타이밍에 그 기회들을 잡으며 계속 성장했다. 나는 그걸 해내며 나 자신을 증명해가는 것이 그렇게 신이날 수 없었다. 하는 만큼 사람들도 알아줬다.

그렇게 두 번째 직장으로의 이직도 살 떨리지만 순조로웠다. IT업계에 있는 사람이라면 몰라서는 안 되는 거대한 트렌드를 이끄는 회사. 그게 내 두 번째 직장이었다. 그곳에서 보낸 3년은 나중에 많은 시간을 할애해 적고 싶다. 내게는 너무나도 소중한 시간들이었고, 기억하고 싶은 순간들이 많다.


아무튼 직장생활의 두 번째 챕터를 마무리하고 두 달 전 옮겨온 새로운 회사는, 정말이지 많은 고뇌와 번뇌를 거듭하며 고르고 골라 온 곳이었다. 나를 더욱더 성장시켜줄 수 있는 곳. 내가 건강한 챌린지를 받으며 보람을 느낄 수 있는 곳. 서서히 매너리즘에 빠져가던 나를 건져 올려 줄 수 있는 그런 신선한 곳이어야 했다. 그런데...

이곳에서 받은 업무는 내가 기대하던 것과는 조금 다르긴 하다. JD 상에 있었던, 그리고 나를 혹하게 했던 최종면접에서 임원이 내가 좋아할 것 같다던 매력적인 업무는 막상 와보니 내가 할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일까. 그래도 전반적으로 완전히 예상을 빗나가는 일을 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대략 어떤 일들을 하게 될 거라고 예상하고 왔고, 그 일을 원해서 온 것이었다. 그런데 왜 그 일이 이다지도 싫은 거지?

이유를 꼬집어 말할 수 없지만 정말이지 적응이 안 된다. 신규 입사부터 시작된 재택근무 때문인지, 업무 때문인지, 사람들 때문인지, 전반적인 분위기 때문인지, 어쩌면 그 모든 것 때문일 수도 있다. 2달 동안 스스로를 어떻게든 다독이며 마음을 다 잡으려 했지만, 도무지 여기서 계속 일을 하는 미래를 상상할 수 없다.


그런 생각이 들자 가장 끔찍한 일이 벌어졌다. 내가 하는 일이 궁금하지가 않다는 거다. 기술 엔지니어에게 이건 정말 무서운 일이다. 배워야 할 것이 산더미인데 내가 해야 하는 일이 궁금하지 않고, 하고 싶지도 않다. 내가 무엇을 바라고 이곳으로 왔는지 이제는 생각조차 나지 않는다.

한동안 나는 이 끔찍한 일이 그저 이 일이 나와 맞지 않아서 그런 걸까, 아니면 (정말 최악으로) 설마 내가 그냥 이제 커리어에 대한 의지를 마침내 잃어버리고 엔지니어로서 사형선고를 받은 걸까 고민했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나는 완전히 실패했다는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는다. 일주일 동안 멍하니 모니터를 바라보며 해야 하는 최소한의 일을 하며 스스로를 천천히 죽이고 있었다. 새벽에도 잠을 잘 수 없었고, 텅 빈 집의 적막을 참을 수가 없어 하루 종일 작게 넷플릭스로 100번은 넘게 본 프렌즈를 틀어놓고 로스와 레이철이 웅얼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머릿속을 엄습하는 절망으로부터 도피했다. 그러다 오늘 더 이상 이렇게 있다간 정말 큰일이 날 것 같아서 자리를 박차고 나와 거리를 맴돌았다. 무엇이 잘못된 건지, 불과 몇 달 전 내가 무슨 생각을 하며 이직을 결정했는지 다시 곱씹어보며...


그러다 나도 이렇게 터져 나오는 생각들을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래는 가끔 자필로 다이어리를 쓰거나 비공개 블로그에 글을 쓰지만 아무도 보지 않을지언정 오픈된 곳에 글을 써보는 것도 도움이 되겠다 싶었다. 그래도 누군가 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 꼭 내 말을 들어주는 것 같다.


이제 앞으로 어떻게 할지, 결정을 해야 한다.

그리고 되뇌어본다.

이건 실패가 아니다.

실패가 아니어야 한다. 극복하고, 꼭 다시 시간이 흐른 뒤, 좋은 경험이었다고 말하자.

이건 과정일 뿐이고, 누구의 말처럼 꼭 거쳐야 하는 과정이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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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3.19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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