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우리 모두 한 번쯤은 거쳐온.
나는 한번 감정에 매몰되면 세상 혼자가 된다.
그리고 내 안에서 불안은 세포분열을 하듯 증식해 결국엔 늘 삶 그 자체를 회의하게 만든다. 그렇게 되면 밥을 먹지 못하고 잠을 잘 수가 없다. 그때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노력은 이미 수십 번은 본 친숙한 영상을 반복적으로 보면서 머릿속을 채우는 것이다. 그래서 중학생 때 처음 본 미드 프렌즈를 33살이 될 때까지 수십 번은 봤다. 시간이 지나면 정말 별것도 아니라고 생각되는 일에도 가끔은 이렇게 진하게 몸살을 앓는다.
지난 2주간 그래서 그렇게 살았다.
이직과 동시에 일에 대한 열정이 사라져 버리니 나는 정말 불안했다. 이게 직장의 문제인지, 업무의 문제인지, 아니면 나라는 사람이 그냥 소진된 것인지 알 수 없어 나는 정말 참을 수 없이 불안했다.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자 시시각각 나의 시장가치가 떨어지고 있다는 생각까지 들었고, 당장 내일 이런 사실이 들켜 잘리기라도 할 것 같아 노심초사했다. 건설적인 생각을 할 수 없었던 나는 프렌즈를 틀어놓고 무엇이 잘못되었지, 어디서부터 틀어진 거지를 생각하다가 새벽이 되면 프렌즈 6인방의 해맑음을 부러워하다 지쳐 잠이 들었다.
그러다 이제 더 이상 가면 큰일이 나겠다는 생각에 억지로 몸을 일으켜 일주일 만에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만나는 사람들에게 토해내듯 이런 나를 알렸다. 불행 중 다행이랄까, 나는 늘 이렇게 그득그득 담아놓던 불안을 때가 되면 주위 사람들에게 풀어놓는다.
처음엔 남편을 찾아갔다. 요즘 사정이 생겨 남편과 당분간 떨어져 지내고 있다. 오랜만에 만난 남편에게 대뜸 우울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는 않아서 참아보려 했는데, 결국 만난 지 30분 만에 감정이 터져 나왔다.
나와 조금은 다른 일을 하지만 같은 업계에 있는 남편은 나의 고민을 고스란히 이해할 수 있다. 다만 나와는 너무 다른 사람이기 때문에 공감을 하지는 못할 수도 있다. 혹시 핀잔을 들을까 걱정하며 얘기를 꺼냈고, 오랫동안 내 말을 들어주던 남편은 휴지 한 장을 건네주며 말했다.
근데 이게 왜 실패야? 이걸 네가 경험하지 않았다면 절대 몰랐겠지.
재미없는 거, 너와 맞지 않는 거 알았겠어? 이건 그냥 과정이잖아.
그럼 이제 다시 찾아봐, 재밌어 보이는 거.
이렇게 심플하다니. 새삼 남편이 대단하면서도 의구심이 든다. 이게 정말 그렇게 간단한 문제는 아닌데 말이지. 헤어져 돌아오는 길에 남편은 내게 문자 한 통을 더 보냈다.
"지금 충분히 너무 잘하고 있어. 조급해하지 않아도 돼"
지금은 다소 무책임한 말처럼 들리지만, 그래도 따뜻함이 느껴졌다.
다음날은 중학교 친구를 만났다. 친구는 전문직에 종사한다. 세상 아무 커리어 고민이 없을 것 같은 이 친구를 앞에 두고 이런 고민을 토로하는 게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참을 수 없어 또 쏟아냈다. 친구는 진지하게 내 말을 들어주다가 IT업계에 대한 질문을 몇 가지 했고, 나는 대답했다. 그리고는 성심껏 조언 몇 가지를 해주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근데 사실 나도 그 고민해.
내 연차에 내가 할 수 있어야 하는 것들을 못하고 있는 것 같아
불안해서 미칠 때가 있어.
그러면서 불과 몇 달 전에 그런 시기가 있었다고, 그때 정말 많이 힘들고 모든 게 불안했다고, 그러다가 맘을 다잡고 지금은 좀 괜찮아졌다고 말했다. 자기만의 십자가. 엄마의 말처럼 우리는 모두 내 등 위의 십자가가 가장 무겁구나 싶었다. 라이선스를 가진 너도 이런 고민에 지치고 힘들 때가 있구나.
그러면 어떻게 극복을 했냐고 물었다. 친구는 자기는 딱히 일을 사랑해 마지않은 적은 없다고, 나에게 일은 직업일 뿐이라며, 그래서 삶을 풍요롭게 채우기 위해 반려견을 키운다고 말했다. 힘든 일이 있을 때 의지하고, 또 '그래 내가 그래도 너 때문에 산다' '난 너만 있으면 돼'라고 할 수 있는 대상을 갖게 되는 것이 생각보다 큰 힘이 된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그건 해결이 아니지 않으냐, 순간 기분은 나아질지 몰라도 네가 고민하는 실체는 그 자리에 그대로 남아있는데 뭐가 힘이 되는 거냐고 물었더니, 친구는 발상의 전환이 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했다. 그냥 어느 정도 나의 욕심을 내려놓고 포기하는 것. 그걸 가능하게 해 주는 게 반려견들이라고 했다.
저녁에는 친정집의 언니를 찾아갔다. 언니는 늘 이런 상황의 피해자다. 보통 언니와의 대화는 '야 요즘 드록바 쩔지 않냐?' '미친 개웃겨 ㅋㅋ' 수준의 대화를 벗어나지 않는데, 이런 시기에 나는 꼭 언니를 찾아가 친구에게도 심지어 남편한테도 미안해서 하지 못하는 얘기를 끊임없이 쏟아낸다. 마침내 내가 몇 시간 동안이나 울며 불며 똑같은 말을 반복하며 내 인생이 망한 것 같다고 말하는 것을 멈추자 언니가 진지하게 말했다.
언니는 재작년에 회사에 대한 권태기가 왔었다고 한다. 언니도 굉장한 워커홀릭이고, 일에 파묻혀 사는 스타일인데 그 시기에 처음 매니저가 되고 너무 힘들어서 더 이상 일이 재밌지 않자 내가 하는 일을 더 이상 사랑할 수 없다면 어떡하지?라는 두려움이 엄습해 왔다고 했다.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자 내가 할 줄 아는 건 이것밖에 없는데 이걸 못하게 되면 나는 정말 쓸모없어지는 거라는 결론이 나버려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고 했다.
그런데 그때 정말 힘이 되었던 노래가 있었다고 한다. 방탄소년단의 <블랙스완>이라는 노래인데(언니는 아미다), 무대에 더 이상 설 수 없을 때, 그리고 실제 죽을 때 이렇게 두 번 죽는 예술가에 대한 얘기를 담은 노래다. 그중 RM의 랩 중에 이런 가사가 있다.
이게 나를 더 못 울린다면
내 가슴을 더 떨리게 못 한다면
어쩜 이렇게 한 번 죽겠지 아마
하다못해 지구 최고의 성공을 해낸 RM 마저도 이런 고민을 하나보다. RM이 친구에게 이런 고민을 털어놓자, 친구가 말했다고 한다. 방탄소년단 RM이 망해도, 인간 김남준이 망한 건 아니지 않으냐고. 그때 언니도 결심을 했다고 한다. 회사 OOO에서의 내가 죽어도, 인간 나는 죽게 하지 않을 거야. 그러자 어느정도 시간이 지난뒤 권태기는 자연스럽게 지나갔다고 한다. 그리고 언니는 덧붙였다.
일은 반드시 너를 배신해.
일이 매일매일 너를 행복하게 만들어줄 순 없어.
그러면서 일을 사랑하고 그만큼 열심히 하는 건 좋지만, 일을 너 자체와 혼동하지 말라고 했다. 너를 규정하는 건 일이 전부가 아니고, 여러 개 중에 하나일 뿐이라고. 일에 대해 그렇게 그릇된 짝사랑을 하다간 반드시 배신당하고 삶의 의미를 영원히 잃어버릴 때가 온다고 말이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선 일 외에 사랑하는 일을 만들라고 했다. 발레가 되었든 클라이밍이 되었든 뭐가 되었든, 신나고 꾸준히 할 수 있는 일을 만들라고 했다. 낮에 만난 친구와 같은 얘기다.
언니는 좋은 조언들을 계속해주었다. 친구나 언니 같은 사람들한테 얘기를 하고 조언을 듣는 것도 필요하지만, 반드시 같은 업계에 있는 선배들한테 조언을 구하라고 말이다. 언니는 내게 다시 이직을 시도해보는 것도 좋지만, 짧은 시기에 또 옮기는 거라면 정말 많이 신중해야 한다고 했다. 만약 지금 다니는 곳만 아니면 돼라는 생각으로 섣부르게 이직을 했다가 또 맘에 안 들면, 그땐 정말 너 스스로를 의심하게 될 거라고 말이다. 그래서 언니는 처음에 하고 싶은 일이 생겼을 때 그 일에 대해 좀 더 정확히 알기 위해 카페, 갤러리 등등 온갖 사이트를 뒤져 그 일을 하는 사람들이 보이면 그냥 닥치는 대로 일단 쪽지나 DM을 보내 물어봤다고 한다. 그러면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이 의외로 정말 친절하고 몸 둘 바를 몰라하며 진심 어린 조언들을 해줬다고 했다. 언니는 그 조언을 듣기 위해 이곳저곳을 찾아다니며 미래의 선배들을 만났었다고, 지금 생각해도 너무나도 기특한 일이었다고 했다. 내가 그건 대학생 패기로나 가능한 거 아니냐고, 33살 먹은 내가 할 수 있겠냐고 했더니 눈을 동그랗게 뜨며 그게 왜? 33살이 뭐 어때서?라고 했다. 그리고 사실 생각해보면, 나이가 들어갈수록 진로 고민이 느는 게 자연스러운 것 같다고도 덧붙였다. 그 말이 묘하게 위로가 되었다.
듣고 보니, 친구도 언니도 심지어 RM까지도 비슷한 고민을 거쳐왔다. 남편도 티나게 고민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분명 그런 생각들을 해봤을 거다.
잘 생각해보면 내가 지금은 아련하기만 한 첫 직장과 두 번째 직장을 다닐 때도 잠깐씩은 이런 고민을 했었고, 그때도 누군가 나에게 비슷한 조언들을 해줬던 것도 같다.
결국 우리가 하는 모든 고민은, 누군가가 했던 고민이고 어쩌면 누구나 극복하는 고민일지도 모른다.
나의 상황은 여전히 하나도 해결되지 않았다. 돌파구는 보이지 않고 내일은 당장 출근을 해야 하는데 정말이지 단 일초도 일하고 싶지가 않다.
대신 내일은 또다시 멍하니 모니터를 바라보는 대신 선배들에게 연락을 해보려 한다. 분명 선배들도 같은 길을 거쳐갔으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내가 존경해 마지않는 선배들이 되어있으니, 답은 그들에게 있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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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3.20 (SU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