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빨리 갔으면 하는 미친 생각
열심히 이력서를 고치고, 눈에 띄는 모든 곳에 지원을 했다.
그리고 크게 기대는 하지 말자고 마인트 컨트롤을 한다.
내가 가진 경력은 너무나도 애매하고, 나는 지금 방향키를 놓친 채 태평양을 유랑하는 통통배다.
이틀 전에 시험삼아 두 군데에 이력서를 넣었다. 한군데는 아직 연락이 없고, 한군데는 오늘 아침에 '아쉽게도....'라는 문구가 적힌 메일이 왔다. 심장이 쿵. 내려앉는다. 그래 나와 JD가 맞지 않았어. 아쉬워하지 않아도 돼. 이제 겨우 첫번째야. 어디 한 군데 정도는 그래도 내게 기회를 주는 곳이 있겠지. 하지만 마음 한켠에는 이 불합격 메일이 내 인생 전체를 평가하는 것만 같아 현기증이 났다.
점심을 먹고 이력서를 다시 천천히 뜯어보며 부족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을 수정했다. 그리고 저장해두었던 다른 기업들에 이력서를 넣고 표시를 해둔다. 몇시간 동안 그 일을 반복하다가 혹시 내가 너무 급하게 행동하는 건 아닌지 생각해본다. 나는 분명 얼마 전 목표를 잃어버렸는데, 불안한 나머지 갑자기 없던 새로운 목표를 만들어 미친듯이 들이대고 있는 건 아닌가? 내 목표는 뭐지? 내게 분명 로드맵이 있었는데, 이제 그건 다 못쓰게 되었다. 그럼 새로운 로드맵을 세워야하는데, 그게 진짜 내가 원하는게 맞나? 맞다면, 지금 여기에 지원하는게 맞나? 나 지금 그냥 지금 회사만 아니면 돼라는 심정으로 닥치는 대로 해보는건가? 그것도 나름 의미가 있을까?
정답. 정답. 정답. 정답을 찾으려고 머리속이 어지러워진다. 남편 얼굴을 들여다보며 자기 얼굴에 정답이 쓰여있으면 좋겠다, 라고 하자 남편은 인생에 웃으며 정답이 어딨어, 그냥 그때 그때 원하는 대로 사는거지! 라고 한다.
알아. 아는데..... 그래도 나는 정답이 좀 있었으면 좋겠다.
그러다 문득 내가 너무 젊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지금 은퇴할 나이라면, 이런 고민은 안해도 될텐데. 나는 아직도 일할 날이 적어도 20년은 남았고 지금 인구가 줄어드는 모양을 보면 30년까지도 일을 해야할 것 같은데, 그럼 나는 앞으로도 긴긴 세월 이 답없는 고민을 해야하는 건가 하는 암울함에 어깨가 무거워진다. 너무 길다. 내가 있는 이 업계는 너무나도 빠르게 변하는 곳이고, 트렌드를 따라가 시장에서 내 존재감을 드러내려면 나는 내 지금 당장도, 10년뒤 20년뒤도, 심지어는 30년 뒤도 고민이 된다. 지금 내가 지금 40대였으면 선택의 여지도 적고 고민의 기간도 짧았을까. 은퇴하는 그 순간까지 발을 동동 구를 것만 같아 정신이 아득해진다.
머릿속 껍데기 즈음에서는 이게 말도 안되는 생각이라는 걸 알고 있다. 인생의 황금기를 보내고 있는 주제에 이런 생각을 하다니. 지금 즐길 수 있는 모든 것들을 다 포기하고 타입 워프를 하고 싶다니.
내가 그런 것들을 즐기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이런 생각을 하는 걸까. 그럼 나는 병원이라도 가봐야 하나라는 생각이 든다. 이런 생각을 하는 걸 보니 결국, 나는 일에 진심인 사람이 아닌가 보다. 내가 원하는 내 모습에 억지로 나를 끼워 맞추며 살고 있다는 생각까지 미친다. 불편한 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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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인생은 우연한 순간에 기회가 온다.라는 대책없는 말을 그래도 믿어본다.
소중한 내 인생에 이런 일이 생긴건 분명 어떤 마스터 플랜이 있기 때문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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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3.26 (SA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