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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생존하는가

룰루 밀러의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를 읽고

by 인생은 꽃

약 10여 년 전 대학교 재학 시절, 환경생태를 전공한 나는 당연히 다윈의 진화론에 대한 강의를 들었다. 그게 생태학개론이었는지, 개체군 생태학이었는지 이제는 확실히 기억이 나지 않지만 10년이 지나 이제는 전공과는 전혀 무관한 길을 걷고 있는 내 마음속에 아직까지도 신선하게 박혀있는 개념이 하나 있다. 바로 다윈의 '생명의 나무'가 갖는 의미였는데, 교수님이 그 생명의 나무를 보여주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현존하는 모든 생명체는 각자의 자리에서 가장 고등한 존재이다.

img.png 에른스트 헤켈이 그린 진화의 나무 (1866)


수천만 년의 시간을 지나 현존하고 있는 모든 종은 끊임없는 자연선택과 치열한 진화를 통해 현재의 모습이 되었고, 따라서 각자의 위치에서 가장 고등한 존재라는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보자면 길가의 작디작은 개미도, 도무지 생각이라곤 없을 것 같은 바닷가의 조개도, 그리고 소위 '만물의 영장'이라는 사람도 모두 동등한 레벨에 있다고 볼 수 있다.


나는 스스로 인간이 가장 우월하다고 믿는 편협한 사람은 아니라고 믿었지만, 그래도 인간이 이 지구 상의 대부분의 땅을 지배하게 된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런 내게 이 개념은 정말이지 신선했다. 왜냐하면 모든 생명은 똑같이 소중해!라고 말하는 것이 그저 착한 사람이 주장하는 종교의 교리 같은 게 아니라, 다분히 다윈적인, 즉 과학적이고 이성적인 설명이 가능한 말이라는 것이 너무나도 맘에 들었다.


이후 나는 사는 게 힘들어질 땐 종종 생명체는 왜 존속하려 하는지에 대한 생각을 했다. 생물학적인 시선에서 모든 종의 목표는 기본적으로 번식이다. 대부분의 생물들은 번식에 진심이고, 꼭 마치 그것만을 위해 사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다. (최근 인간사회는 출산율의 저하가 사회적 이슈이긴 하지만, 나는 가끔 그게 마침내 포화된 인구수와 망가진 지구를 치유하기 위한 자연과 종의 거대한 계획의 일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그렇다면 번식된 자손은 왜 사는가? 마찬가지로 그 자손을 낳기 위해서다. 그럼 그렇게 타고 타고 타고 타고 올라가면... 리처드 도킨스가 말한 것처럼 이기적 유전자가 DNA 매개체일 뿐인 우리를 통해 어디를 가려는 것일까? 도대체 종의 궁극적인 목적은 무엇일까? 이런 답이 있을 것 같지도 않은 질문에 대한 고민을 하다 보면 나를 포함한 모든 것들이 얼마나 우주의 먼지 같은지 알게 되고, 지금 내가 하는 고민들이 거시적인 시선에선 거의 눈에 띄지도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진정이 되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방식으로 삶의 이유를 찾는다.

최근 5년간 읽은 책 중 단연 최고다. 나는 이렇게 인간이 얼마나 어리석게 이기적인지를 과학적으로 설명한 책을 너무나도 좋아한다. 그 어떤 자기 계발서보다 나 스스로를 직시하게 만든다. 스스로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내가 속한 종을 냉정하게 바라보게 만든다.

XL


혼돈은 우리의 그 무엇에도 관심이 없다.
우리의 꿈, 우리의 의도, 우리의 가장 고결한 행동도. 절대 잊지 마라.

과연 네가 토양 속에서 환기를 시킬 수 있을까?
목재를 갉아먹어 분해의 속도를 높이는 일은?
그런 면에서 지구에게 넌 개미 한 마리보다도 덜 중요한 존재라고도 할 수 있지.


동시에 이 책은 어리석을 만큼 이기적인 인간의 역사와, 그 중심에 서있는 한 사람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그것도, 넌 왜 이렇게 이기적이니, 넌 도덕적으로 나쁜 사람이야!라고 말하는 게 아니라 과학적으로 왜 틀렸는지를 조목조목 따진다. 개개인이 가진 가치관과 상관없이 틀렸다는 명제를 인정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어버리는 게 너무나도 통쾌하다.

종에 있어 동질성은 사형선고와 같다.
자연은 외양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다.

이런 단순한 상대성의 원칙을 고려하지 못하고 그들은 사실상
지배자 인종을 구출할 최선의 기회를 망쳐버리고 있었던 셈이다



그러면서도 작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주의 먼지일 뿐인 우리가 왜 살아야 하는지, 어떻게 삶의 의미를 찾아야 하는지에 대한 힌트까지 준다. 책을 읽어 내려가며 이것만큼은 작가가 감상적으로 결론을 낼 수밖에 없지 않을까 하고 걱정했던 부분인데, 이마저도 너무 멋있게 설명해냈다.


어쩌면 진화가 우리에게 준 가장 위대한 선물은
"우리는 실제보다 더 큰 힘을 지니고 있다"라는 믿음을 품을 수 있는
능력인지도 모른다.




이 책을 읽은 사람들에게 어떤 생각을 했는지, 우리가 왜 사는지에 대한 그들의 답은 무엇인지 끝없이 물어보고 싶다.



2022.0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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