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들 언제 시니어가 되셨나요
나는 지금 약간 당황스럽다.
IT업계에서 일을 시작한 지 8년 차 경력자가 된 나에게 이제야, 그렇지만 갑작스럽게 찾아온 일이었다.
나는 이 긴긴 만 7년 동안 신기하게도 늘 조직에서 막내였다.
첫 직장에서는 3년간 막내로 지내다가 팀에 신입사원이 들어올 때쯤 다른 팀으로 발령이 났고, 거기서도 역시 약 1년간 막내로 있다가 두 번째 직장으로 이직을 했다. 옮겨온 새로운 직장에서는 입사할 당시 내가 전체 조직 내 최연소였다. 누군가는 나이를 따지지 않는 이 신성한 업계에서 그런 걸 왜 따지냐고 핀잔을 줄 수도 있겠지만 살벌한 외국계 IT기업에서 그 사실은 내게 은근한 위로가 되기도 했다. 서로서로 나이나 연차를 잘 모르기도 하고 신경도 쓰지 않지만 그래도 내가 스스로 너무 많이 부족하다는 걸 느낄 땐 '그래 나 아직 연차가 적잖아. 내가 저들만큼 못하는 건 당연해. 앞으로 잘하면 되지' 같은 생각을 하며 스스로를 위로하곤 했다. 타고난 자격지심으로 인해 잘 통하진 않았지만.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더 경력이 짧은 분들이 들어왔지만, 나는 또 때마침 팀을 옮기게 되었고, 새로운 팀에서도 가장 주니어로 있다가 (외국계는 사실 그런 서열 개념이 거의 없다. 요즘은 외국계뿐만 아니라 대기업을 제외한 대부분이 그렇기도 하고...) 다시 이직을 했다. 그리고 이직한 회사에서는 딱히 연차 같은걸 생각 안 하기도 했고, 무엇보다 내가 막낸지 네가 막낸지 파악도 하기 전에 퇴사를 했다.
어쩌면 서열이 확실한 대기업에서 경력을 시작했기 때문에 유독 내가 연차를 계산하는지도 모르겠다. 물론 내가 연차를 따지는 이유가 흔히 말하는 '꼰대 짓'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연차가 무색하게 잘하는 사람들이 넘쳐나기도 하고, 무엇보다 나는 연차로 남들을 누를 만큼 나 스스로에게 자신 있는 사람이 아니다. 내가 연차에 미련을 가지고 있는 이유는 단순히 IT 업계에서 막내는 상당히 편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도제식으로 엔지니어를 육성하는 운영 조직에서 막내란 가르치고 보호해야 하는 존재다. 내게도 막내를 실감할 수 있는 여러 에피소드가 있었는데, 예를 들어 내가 일으킨 운영 장애에서 주눅이 들어 앉아 있는 나를 제외한 모두가 허둥지둥 바쁘게 움직이면서도 놀랐을 나를 진정시켜주었던 훈훈한 선배 및 상사들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또 막내는 아직 무언가를 증명하지 않아도 되는 꿈나무다. 막내는 무언가 조금만 잘해도 '몇 년 뒤가 기대된다'는 말을 듣게 되는데, 나는 상당히 오랫동안 그런 애매한 기대주였던 것 같다. 그래서 막내로 지내면 부담이 없다는 게 가장 좋다. 어떤 직종은 연차가 쌓일수록 고인물이 되어가며 일은 줄고 월급은 오른다지만, IT 업계는 기술이 너무 빠르게 변하는 탓에 노하우로 먹고살기도 여의치 않고 인정을 받기 위해선 끊임없이 스스로를 증명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연차가 쌓일수록 일과 책임은 더 많아지는데 그와 반대로 머리는 계속 굳어진다고 고민하는 선배들을 종종 만났다. 또 연차가 쌓이면 모르는 게 있을 때 물어보는 것도 부담스러워진다.
아무튼 그래서 나도 모르게 막내에 익숙해지고, 또 막내에 취해있었던(?) 것 같은데, 새롭게 출근한 회사는 9명으로 구성된 팀에서 내가 무려 3번째로 나이도, 경력도 많다. 팀에는 이제 막 커리어를 시작한 신입도 있고, 열심히 꿈과 실력을 불려 나가고 있는 폭주기관차 같은 꿈나무들도 있다. 어찌 보면 당연하다. 젊은 조직에서 나는 분명 이제 시니어에 속할 거고, 8년 차인 나는 너무나도 늦게 막내를 벗어났다. 그래도, 입사 첫날 그 말을 들었을 때 나는 적잖이 당황을 했다. 내가.. 내가 시니어라니!
지금까지 왜 신경 쓰지 않았을까, 아직까지도 막내의 위치에 익숙해져 있다는 건 너무 안일한 태도였다. 스스로 경각심을 가지고 있었어야 했는데. 한 업계에 거의 10년을 있었으면 누가 봐도 전문가가 되어있어야 하는 게 아닌가. 그러면서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그럼 회사는 보통 시니어에게 뭘 기대하지? 나는 뭘 할 수 있을까? 팀의 기대치에 내가 미치지 못하면 어쩌지? 또 시작이다. 회사를 다닌 지 일주일도 아직 안되었는데, 벌써부터 또 걱정병이 도진다.
아무튼 그래서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내가 과연 이 팀에서 시니어 역할을 할 수 있을지. 나는 이런저런 잡다한 경험이 분명 많이 있지만 뭐하나 제대로 된 게 없다는 생각이 든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나는 프로메테우스와 그라파나, ELK 스택 등등에 대해 들어봤고, 사용해 본 적도 있고, 누군가에게 설명을 해본 적도 있다. 하지만 내가 그걸 직접 설치하고 최적화하고, 심층적인 로그 분석 및 트러블슈팅을 할 수 있겠냐고 물어보면 할 말이 없다. 나는 좀 가르쳐주시면 잘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라고 말하고 싶어 진다.
또 나는 K8S에 대한 아주 기본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고, 얼마 전에는 CKA 자격증도 취득했다. 그리고 EKS환경에서 테스트도 이것저것 해봤고, 다른 사람에게 설명을 해본 적도 있다. 하지만 실제 운영환경에서 Terraform과 GitOps, Service mesh 등등을 이용해 MSA를 구성하고 문제가 생겼을 때 주체적으로 트러블 슈팅을 할 수 있냐고 묻는다면? 나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눈을 내리깔아야 한다. 지금 당장은 어떻게 하는 건지 감도 잡히지 않는다.
이런 내가 이 조직에 있으면서 언젠가 시니어로서 1인분을 할 수 있다면 그건 분명 내가 원하는 모습이 맞을 것 같다. 그런데, 당장은 시작(현재)과 결론(팀에서 살아남은 미래의 나)만 뚜렷하고 그 중간 과정은 잘 상상이 가지 않는다. 블랙박스 형태랄까, 고양이가 들어있는 슈뢰딩거의 상자랄까. 가능하다면 어떻게 가능한 건지도 아직 잘 모르겠다.
그래 나도 이제 이렇게 시니어가 되는구나, 내 선배들 누구에게나 이런 순간이 왔겠지. 누군가에겐 굉장히 자연스럽게 왔을 거고, 또 누군가에겐 반갑게 왔을 거고, 아니면 나처럼 준비 없이 당했을 수도 있다.
아는 선배들의 말이 자꾸 생각이 난다. 그 선배는 5년 전 주니어 시절의 나를 보며 100% 이해도 못했으면서 일단 Go 하고 천천히 채워나가는 내 패기가 인상 깊었었는데, 얼마 전 새로 옮긴 회사의 MZ 세대 사원들은 한 술 더 떠서 그 회전 속도를 못 당하겠더라는 농담조의 말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나도 새로운 팀의 주니어들에게 그런 걸 느끼게 되면 어쩌나 하고 걱정이다. 이분들에게 나도 많이 배우고, 협력해야겠지만 그래도 결국엔 내가 이들보다 더 나은 퍼포먼스를 내야 할 텐데, 회사가 기대하는 내 모습에 미치지 못할까 봐 걱정이 된다.
한 해 한 해 경력이 쌓인다는 건, 그만큼 내가 증명해야 할게 많아지는 것 같아 어깨가 무겁다.
나는 주니어로 남아있고 싶었던 것 같기도 하다. 꿈나무나 기대주가 편하니까. 하지만 누구에게나 그렇듯 나도 이제 정말 시니어가 되어가고 있고, 또 그에 걸맞은 퍼포먼스를 내야 한다.
스스로 내가 새로운 상황에 또 나를 밀어 넣었으니, 해볼 수밖에, 해낼 수밖에
2022.05.20
제가 쓰는 모든 글은 지극히 제 개인적인 경험과 생각입니다.
모두가 다른 경험을 가지고 있는 이 업계의 문화나 분위기를 제가 대변하는 것은 아닙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