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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고 Jul 05. 2016

차원에 대하여

이번엔 소수를 위한 과학 이야기다. 미리 말해두자. 졸릴 수도 있다.


“형이 이걸 보면 좋아할 것 같아요.” 이 글은 친구에게 받은 PDF 파일의 재해석이다. 받은 자리에서 30분을 내리읽었다. 흥미로웠다. 약간의 삽화와 에디팅을 거치면 재미있는 글이 될 것 같았다. 이 글을 쓴 친구는 이것을 과제로 제출했다고 했다. 그는 나와 티 타임을 갖던 중 내가 블로그를 하는 사실을 알게 됐고, 다중 차원의 시각화에 대한 주제를 이야기하는 와중에 이 글을 보여주고 싶다고 했다.


“이거, 내가 나중에 잘 정리해서 블로그에 올려도 돼?” 내가 물었다.

“그럼요.” 친구가 대답했다.

그로부터 몇 달이 지났다. 원고를 다 작성하고 다시 한 번 카톡을 보냈다.

“나 원고 다 작성했어. 차원에 대한 얘기 말이야.”


친구가 답했다.

“오 세상에.. 장마와 함께 촥촥!”


이 글, <차원에 대하여>는 필자의 것이 아님을 미리 밝혀 둔다. 이 글은 친구(juice500ml)의 것이다. 다만 이러한 저작권 선언이 이 글의 신빙성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단서가 되진 않을 것이다. 이 글이 수많은 사람들의 과학적 호기심을 자극한다면 그 공이 모두 친구에게 있음을 이야기하고 싶다. 필자는 재미있었다. 이제는 에디터로서 필자가 이것을 얼마나 재미있게 살려내느냐에 달렸다.

자, 오랜만에 재미있는 과학 이야기 하나 꺼내 보자. 주제는 ‘차원’. 이 글은 우리가 시/공간을 가지고 장난을 치기까지 얼마나 많은 과학자들이 퇴적되었는가를 하나하나 훑는 글이다. 흥미로운 여정이 될 것이다. 그래도 소개팅 자리에서 이번 이야기를 꺼내지는 말자. 그랬다가는 ‘엑스포 다리의 철근이 왜 끊어지지 않는지 아느냐’는 카이스트 학생의 소개팅 일화처럼 SNS에 두고두고 회자될지도 모른다.





질문


역사의 시곗바늘이 쉼 없이 돌아가는 동안 인간 지성은 수 없이 많은 질문을 던졌고, 그에 대해 쉼 없는 대답을 만들었다. 그러나 셀 수 없는 질문만큼이나 아직도 많은 대답이 종결되지 못하고 있는데, 그 미결 질문 중 하나가 바로 ‘우리’에 대한 정의다. 지구 상에서 한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우리. 그것의 존재를 정의하는 것 말이다. 과학의 관점에서 이것은 차원의 프레임으로 설명할 수 있다. 3차원 공간에 특정 좌표를 차지하고 있는 우리-와 같은 설명 말이다. 이 글은 우리가 차원이라는 과학적 관점에서 철학과 예술, 그리고 기술과 어떠한 관계를 맺는가에 대한 글이다.


지구 위에서 한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우리. 우리의 존재를 정의하는 것은 인류의 오랜 과업 중 하나였다


지도와 좌표계


우리의 위치를 과학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도구. 우리가 여행을 위해, 이동을 위해 매일 켜는 도구. 지도다. 공간을 이해하는 데에 지도만큼 편리한 것은 없다. 바꾸어 말하자. 지도는 누가 보아도 합리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만들어야 한다. 그러면 우리가 사는 공간을 어떻게 2차원 공간에 합리적으로 압축할 수 있을까? 좌표와 사영의 개념은 이런 합리적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등장했다. 시작부터 이과적이면 머리가 아프니 사람 이야기를 먼저 꺼내 보자.


Claudius Ptolemy / Lienhart Holle: [Untitled Map of the World -- 1482 Ulm Ptolemy World Map]


지도의 역사는 톨레미(Ptolemaios, AD 83 ~ AD 168)를 기준으로 전/후를 나눌 수 있다는 말이 있다. 한국인이라면 응당 김정호! 를 외쳐야 할 터이지만 아쉽게도 조선식 측정법은 현재 지도 제작의 기준이 아니다. (대동여지도 이야기는 올해 개봉할 영화 <고산자>를 보는 것으로 위안을 삼자) 톨레미는 흔히 ‘서양 지도 제작의 아버지’라고 불리는데 그 이유는 지도에 위도와 경도의 개념을 최초로 도입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자신의 저서인 <지오그라피아(Geographia)>에 상세히 기술되어 있는데, 이 책은 르네상스 시대에 재발견되어 체계적인 지도 제작의 기준이 된다.


이후 위도와 경도의 개념은 수학 체계로 넘어오면서 우리에게 조금 더 친숙해진다. 이것의 다른 이름은 X와 Y. 본래 이름은 좌표계다. 좌표계는 1637년 데카르트와 페르마가 독자적으로 개발한 시스템이다. 직교좌표계를 영문으로 하면 카티시안 코디네이트(Cartesian Coordinates), 데카르트의 이름을 따서 이름을 지었다. 직교좌표계는 지도의 위도와 경도를 2차원 공간의 x와 y 축에 대응하여 공간을 만들고, 공간 위의 특정 위치를 표현하는 과학 체계다.


위도와 경도의 개념. 그러니까 좌표계는 우리네 세계 뿐 아니라 우주를 항해하는 데에도 적용된다


이 시스템은 굉장히 ‘합리’적인데, 그 이유는 차원을 확장하는 데 용이하고(z라고 부르는 축을 하나 직교하게 덧대면 3차원이 된다), 좌표축 또한 임의의 변량으로 설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기하학을 해석학으로 전환할 수 있는 사고방식을 제시했다. 그리고 이러한 사고방식은 뉴턴과 라이프니츠가 미적분을 만드는 데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기하학, 해석학의 정의는 몰라도 좋다. 지금은 지도가 어떻게 미적분까지 확장하는지가 중요하니까.






미적분과 뉴턴의 운동 법칙 그리고 지도


앞의 설명을 정리해 보자. '지도는 공간을 합리적 차원으로 전사한 그림이다.' 그리고 '이것은 좌표계라는 시스템으로 진화했다.' 마지막으로 '데카르트와 페르마는 지도를 수학적으로 해석했다.' 정도로 요약이 가능하겠다. 다음 세대의 과학자인 라이프니츠와 뉴턴은 이러한 유산을 이어받았고, 좌표 시스템 내부에서의 움직임을 수학적으로 모델링하는 것에 관심을 둔다.


물질계의 해석은 흔히 '당구공의 비유'로 표현되곤 한다


라이프니츠는 공간 내의 움직임을 모델화하고 그것을 수치적으로 표현하고자 했고, 뉴턴은 같은 현상을 두고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영향력. 그러니까 힘과 가속도의 관계를 표현하고자 했다. 둘은 관찰 속에서 가속도와 속도의 개념을 발견했고, ‘가속도는 속도의 미분’이라는 관계를 규명한다. 그리고 미분의 발견은 ‘예측’의 영역에 지대한 공헌을 한다. 질량과 거리, 시간, 그리고 힘을 알 수만 있다면 관성계 내부에 있는 모든 물체의 예측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이를 더욱 쉽게 말하면, 지도의 발견은 적과 나의 위치를 표시할 수 있게 했고, 미적분의 발견은 내가 쏜 포탄이 어디에 떨어질지 예측할 수 있도록 했다. 모두 차원으로부터 나온 유산이다.


이렇듯 뉴턴의 운동법칙은 현실적 문제들을 수학적으로 치환하여 제시할 수 있게 했다. 말인즉, 어떤 물체를 구동하는데 얼마나 많은 힘이 필요한지를 수치적으로 제시할 수 있게 됐다는 소리다. 결과적으로 뉴턴과 라이프니츠의 발견은 과학 혁명을 현실계로 끌어오는 교두보가 된다. 시간과 질량, 그리고 일률에 대한 기록만 있으면 약간의 오차 범위 내로 업무의 예상 종료일과 예산을 산출할 수 있게 됐으니까. 결국 이러한 발견은 산업혁명의 근간이 된다.


초기 증기 기차 (1888)


산업혁명의 시초가 ‘증기기관의 발명’ 또는 ‘대량생산’이 아니냐고? 맞다. 고등학교 교과서를 기준으로 그렇다. 그렇지만 산업혁명은 ‘측정’과 ‘예측’이 가능해지며 의미를 갖는 시기다. 그리고 조금만 더 생각을 해 보면, 그 말이 곧 그 말이다.





라그랑주 역학


3차원 위의 운동 예측이 끝나고, 학자들은 3차원 공간 위에 여러 가지 실험을 덧대기 시작한다. 그들은 뉴턴의 해석 위에 알 수 없는 차원을 하나 대어 본다던가, 차원의 축을 마음대로 휘어 새로운 공간을 만들거나 하는 실험을 한다. 라그랑주(Joseph-Louis Lagrange, 1736 ~ 1813) 또한 그중 하나였다. 라그랑주는 실험 과정에서 뉴턴 역학을 확장하는 업적을 남긴다. 기존의 뉴턴 역학이 물리량 사이의 관계를 밝히는 인과론적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면, 라그랑주는 벌어질/벌어진 결과를 해석하여 그와 동일한 결과를 낼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인 해석을 재구성하는 것에 주안을 둔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기존의 현상을 해석하는 것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 '효율'적인 운동을 고안할 수 있도록 했다.


라그랑주는 1772년과 1778년 사이에 뉴턴 역학을 한 단계 쉽게 재구성했다. 그에 의하면 역학은 3차원의 공간과 1차원의 시간. 도합 4차원의 시/공간에서 일어나는 사건이다. 이러한 기술을 통해 기존의 물리적 해석은 더욱 높은 차원의 도구를 생각할 수 있게 됐다. 대표적인 도구가 ‘해밀턴의 사원수’와 ‘벡터장’ 같은 것들. 간단히 설명하자면 이러한 도구의 확장은 함수나 행렬과 같은 수학적 도구가 차원으로서 해석될 수 있는 여지를 열어두었다. 우리가 하고 있는 3D 게임은 사실 2차원 행렬의 계산 결과다. 선형 변환(linear transformation 3D to 2D)과 같은 도구는 2차원적 사고에서 나올 수 없는 것으로 고차원적 도구의 도입 이후에 탄생한 개념이다. 모두 차원에 대한 치환적 해석의 산물이다.



고사리의 구조 또한 프렉털(자기 복제)이다. 사진 출처: 자연은 프렉털이다 / 김용운, 김용국


이 시기에 등장한 것이 프랙털(fractal)이다. 프랙털은 벡터 공간에서 파생된 개념이다. 프랙털은 벡터 공간의 자기 반복적 확장이다. 이것은 번개, 나무, 강, 심장박동 등의 자연물을 수치적으로 표현하는 구조가 된다. 그런데 프랙털은 3차원 또는 4차원과 같은 정수 차원이 아니라 소수점을 갖는 실수 차원이다. 우리의 눈 앞에 있는 존재가 3차원이 아닐 수 있다는 소리다. 이는 자연계의 존재가 정수 차원에서 해석될 수 없음을 밝혔으며, 모든 물체가 미분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님을 보였다. 이 말인즉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가 정형적 세계가 아니라는 의미인데, 이것은 결정론에 대한 철학적 반증으로 이어진다. 우리가 바라보는 어떤 대상은 3차원이 아닐 수도 있다!


잭슨 폴록의 그림은 무질서하고 랜덤한 액션 같아 보이지만 컴퓨터 분석을 통해 그것이 프랙털 구조를 하고 있음이 드러났다


에른스트는 데칼코마니를 사용하여 작품 세계를 표현 했는데, 데칼코마니 역시 프랙털의 성질을 갖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이것은 3차원 세계에서 소수 차원의 세계를 응시할 수 있다



4차원의 해석


프렉털과 같은 실수 차원에 대한 연구와 함께 4차원 물체에 대한 연구도 함께 진행된다. 과학자들은 3차원 공간. 그러니까 현실계에서 4차원 물체를 관찰할 수 있을까 질문을 던지기 시작한다. 이는 지도의 딱 반대 개념이다. 지도는 3차원의 지형을 2차원으로 사영한 결과다. 반대로 현실계에서 한 단계 위의 차원으로 사영할 수 있다면 우리는 4차원의 물체를 관찰할 수 있게 된다.


(왼쪽) 에스프리 조프레의 4차원 공간의 3차원적 표현

(오른쪽) 만돌린을 켜는 소녀, 파블로 피카소, 1910, MOMA 



모리스 프린셋(Maurice Princet, 1875 ~ 1973)은 프랑스의 수학자로 현대 미술의 사조인 큐비즘의 탄생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모리스는 피카소(Pablo Ruiz Picasso, 1881 ~ 1973)에게 에스프리 조프레(Esprit Jouffret, 1837 ~ 1904)의 저서를 소개해 줬는데, 이 책은 푸엥카레의 4차원 기하학의 일부를 쉽게 풀어쓴 책으로 4차원의 다면체들이 소개되어 있다. 피카소는 이 책을 참고하여 자신의 작품 세계를 구축한다. 그의 대표작인 <아비뇽의 처녀들(Les Demoiselles d'Avignon, 1907)>을 그리기 위한 스케치에서 이러한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작품 속에서도 그 결과가 드러난다. 그림을 살펴보면 4차원 도영의 사영에서 표현 아이디어를 얻었음을 추측할 수 있는 여러 표식들이 드러난다.

세잔(Paul Cézanne, 1839 ~ 1906)과 함께 큐비즘을 대표하는 이 작품은 동일 물체에 대하여 여러 각도에서 바라본 모습을 이어서 그린 그림인데, 이는 4차원의 물체를 3차원 공간에 투영시키는 수학적 기법을 사람의 얼굴에 동일하게 적용한 방식이다.


아비뇽의 처녀들, 파블로 피카소 / 사진출처: 플리커 도미니크(Dominik)


4차원을 해석하는 도구는 사영뿐만이 아니다. 소위 ‘잘라서 보기’라고도 불리는 이 방법은 에드윈 에보트(Edwin Abbott)의 소설 <플랫 랜드: 다차원의 로맨스 (Flatland: A romance of many Dimensions)>에서도 기록된다. 이 소설에서는 잘라서 보기를 <구체(球體)의 비유>로 설명한다.


‘구’라는 3차원 물체가 있다고 하자. 이것이 플랫 랜드, 그러니까 2차원 세계에서는 어떻게 보이는지 해석해 보자. 구가 플랫 랜드의 공간을 뚫고 지나간다고 해 보자. 이 세계에 사는 사람들은 마치 신의 재림인 양, 빈 공간에 원이 생기더니 점차 커지다가 작아지면서 홀연히 사라지는 구의 모습을 관찰하게 될 것이다.

- 플랫 랜드 중에서


심지어, 그녀의 독신자들에 의해 발가벗겨진 신부, 뒤샹

이러한 모티브는 수많은 미술 작품에 영향을 준다. 대표적인 것이 마르셀 뒤샹(Henri Robert Marcel Duchamp, 1887 ~ 1968)의 <심지어, 그녀의 독신자들에 의해 발가벗겨진 신부>다. 뒤샹은 앞서 언급했던 모리스의 친구였는데, 뒤샹은 “4차원의 그림자는 곧 3차원의 물체들”이라는 언급에 모티프를 얻어 이러한 작품을 제작했다. 살바도르 달리(Salvador Domingo Felipe Jacinto Dalí i Domènech, 1904 ~ 1989)의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초입방체(1954)>는 그의 4차원의 예술적 해석이 드러난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 4차원은 십자가의 사영으로 드러난다. 4차원 입방체 전개도에 매달린 예수. 고차원의 세계에서 희생된 성인의 모습은 그 시각적 표현만으로도 범인(凡人)이 쉬이 헤아릴 수 없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이와 같이 지도에서부터 시작한 ‘자기 인지’ 작업은 산업 혁명을 거쳐 큐비즘에까지 영향을 미치며 표현과 해석의 확장에 지대한 공헌을 한다.





상대론의 등장


이제 시간에 대한 이야기를 할 차례다. 4차원의 해석은 시간을 변수로 볼 수 있는 여지를 제공했다. 민코프스키(Hermann Minkowski, 1864 ~ 1909)는 1908년 논문에서 ‘시공간’을 언급하면서 <상대론>의 이론적 토양이 됐다. 논문에서 민코프스키는 시공간을 비유클리드 기하학으로 확장하는 과정을 기록했는데, 이때 개발된 민코프스키 다이어그램은 오늘날의 시공간에 대한 해석에서까지 사용되고 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초입방체 Crucifixión / Corpus Hypercubus, 살바도르 달리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론은 중력에 의해 굽어진 시공간을 그리며, 그로 인한 시간과 공간의 왜곡을 분석한다. 시간과 공간은 시/공간의 특정 좌표에서 한 점일 뿐이며, 그 크기는 점과 점 사이의 위치에 따라 상대적으로 해석된다. 나와 타자의 기준이 상대적인 것. 이것은 포스트모더니즘과 철학적 상대론을 낳는다.


고차원적 해석에 의하면 ‘하나의 진리’, 즉 대진리(A Great Truth)는 오로지 하나의 세계에서만 통용되는 것일 뿐이다. 아리스토텔레스나 칸트의 절대 진리 체계는 상대적 공간 안에서 흐릿해진다. 이는 버트랜드 러셀의 언급에서 상세히 드러나는데, 그는 시간의 상대성이 절대적인 시간 체계를 지웠으며, 이것은 과거와 현재, 미래를 모두 흐릿하게 하고 선-후 관계만 존재하게 될 것임을 주장했다. 그의 언급은 현실 세계의 절대성에까지 의문을 갖게 한다.


여기까지 이야기를 마쳤을 때, 4차원의 실험적 해석이 공상처럼 여겨질 수도 있다. 절대적 현실을 부인하거나 평행 우주론이 등장하는 시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의문은 합리적으로 있음 직한 해석임을 밝혀 둔다. 왜냐하면 이러한 고차원적 실험은 뉴턴 역학이 적용되지 않는 현상의 해석을 가능하게 했으며, 수많은 초정밀 기술이나 거대한 형태의 기술을 실현 가능하게 했다. 예를 들면, 양자 컴퓨터, 우주 개발, 핵폭탄 등이 있다. 이러한 기술들의 이론적 기반은 <상대론>에 있으며, 이러한 기술은 현대 과학의 최전선에 있다.





영화 인셉션(2010)의 한 장면. 창조적 파괴라는 말이 있다. 어떠한 기술적 도약을 위해서는 파괴의 과정이 필연적이라는 뜻이다


마치면서


우리의 위치를 합리적으로 정의하기 위한 질문을 시작으로 차원이 등장하고, 그것은 곧 지성이 특정 대상의 실체를 파악하는 도구가 됐다. 그리고 차원은 지성의 입맛대로 제 크기를 늘였다가 줄였다가 하며 철학과 기술, 그리고 예술에 영향을 미쳤다. 요즘 시대의 차원은 시/공간에 존재하는 인간에게 어떠한 제약이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논쟁의 중심에 있다. 대과거의 인류가 현재의 인류를 규정한 법칙이 합리적인가에 대한 재판이 벌어지는 중이다.


인터스텔라(2014)의 시간 도식, 대진리(The Great Truth)는 고차원적 해석이 가능해짐과 동시에 흐릿해진다

창조적 파괴(Creative Destruction)라는 말이 있다. 어떤 기술적 도약을 위해서는 파괴의 과정이 필연적으로 수반된다는 경제학자 조지프 슘페터의 언급이다. 오늘날 그의 언급은 차원에 대하여 적용되는 중이다. 우리가 알고 있던 차원이 사실은 잘못 규정한 것은 아닐까에 대한 질문이다. 인간은 무지에 대한 공포를 포섭하기 위해 지성을 사용하며 진화했다. 이러한 포섭의 과정을 위해 수많은 이들이 모험을 떠났고,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그러한 '포획된' 세계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어딘지도 모르게 뿌리를 내린 이 곳의 존재는 사실 불안정하다. 누군가는 계속 우리네 뿌리를 밑동째 흔들고 있다. 더욱 단단한 합리의 뿌리를 내리기 위해서다. 그러나 우리가 더욱 단단해지기 위해서는 무지의 폭도, 그 깊이도 더욱 팽창되어야 한다. 때문에 현대 사회는 점점 더 미결적이고, 더욱 불확실해질 것이다. 우리 세대는 청춘뿐만 아니라 온 인류가 불안정해질 운명이다.


절대적 나침판은 20세기에 들어 시공의 폭풍 속으로 빨려 들어간 지 오래다. 우리는 이제 스스로의 지성을 기준으로 각자의 품에서 고유한 나침판을 꺼내야 한다.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면 피카소의 그림을, 뒤샹의 오브제를, 플록의 그림을 뚫어져라 바라보자. 혹시 그 속에서 새로운 차원이 반복적으로 탄생하고 소멸하는 것이 느껴지는가? 그래도 잘 모르겠다면 <인셉션>이나 <인터스텔라>, <백 투 더 퓨쳐>, <닥터 후>를 보도록 하자. 그 속에서 재미를 느끼기 시작한다면, 이제 품 속에서 나침판을 꺼내자. 당신의 나침판 바늘이 자유 진동하며 S와 N극이 아닌 어떤 지점을 찾아 나서는 중일 테니까.


절대적 나침판은 20세기에 들어 시공의 폭풍 속으로 빨려 들어간지 오래다


Fin.



Special Thanks to: Juice500ml


[1] Osher Map Liberary, <Smith Center for Cartographic Education. I. Introduction>,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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