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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고 Feb 11. 2017

재심

영화 <재심>, 2017

좋은 영화에는 극찬을 하고 싶다. 좋은 시간을 선물 받은 기분이기 때문이다. 글을 쓰기에도 좋은 영화가 훨씬 쉽다. 이것이 나의 어떤 경험을 떠올리게 했으며, 어떤 점이 최고였고, 탁! 하는 지점이 있었는가 신나게 떠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반대의 경우는 쉽지 않다. 이것은 좋고 그름을 논하며 영향을 주는 사람들이 가장 경계해야 하는 부분이다. 자신의 감상이 단순한 감정 전달에 그치지 않도록 글을 정리하고, 그것을 근거 있는 말로서 전달해야 하며, 내가 감독이 생각하는 관객인지 두 번, 세 번 돌아보아야 한다. 자신이 이 영화를 수용하기에 준비가 덜 됐거나 혹은 너무 많은 채비를 한 사람일 수 있기 때문이다. 진중권은 베스트셀러가 된 <미학 오디세이>를 다시 쓰기엔 너무 많은 것을 알아버렸다고 했고, 움베르트 에코의 책은 모두가 사랑하기엔 그 난이도가 너무 높다. 때문에 모든 영화 평론에는 영화를 본 관객의 감상만큼의 평가가 존재할 수 있다. 필자의 감상을 읽는 이들이 끝까지 가져주셨으면 하는 마음이 있다면 이것이다. 다양한 평가가 존재할 수 있음을 알고, 자신의 취향으로 창작물을 감상할 것. 그리고 창작자들에겐 언제나 박수를 아끼지 않을 것.


영화 <재심>


개봉일: 2017년 2월 15일 (수)

감독: 김태윤

출연: 정우, 강하늘, 김해숙, 이동휘, 이경영, 한재영

장르: 드라마

제작사: 이디오플랜


영화 <재심>의 시사회를 다녀왔다. 이런저런 곳에서 글을 쓰고 활동하다 보니 시사회는 왕왕 다녔다고 생각했었는데, 롯데시네마 월드 타워는 처음이었다. 영화 시작 시간에 늦지 않기 위해 평소보다 일찍 회사를 나섰다. 평소에도 이런 곳일까, 월드 타워는 늦은 시각에도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영화를 기다리며 휴대폰과 전광판을 번갈아 확인하고 있었다. 활기가 돌았다. 영화 <재심>을 기다리는 관객들도 보였다. 시사회는 총 4개의 관에서 시차를 두고 진행됐다. 필자 역시 영화표 감열지를 쥐고 설레는 마음으로 시사회를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감정을 이입했다.



영화는 전라북도 익산에서 일어난 '약촌 오거리 택시기사 살인사건'을 모티프로 삼았다. 2000년 전라북도 익산시에서 택시기사 유 모 씨가 범인에게 흉기로 12군데를 찔렸고 과다출혈로 사망한다. 전북 경찰서는 범인 도주를 목격한 최모군을 용의자로 지목하고, 최모군은 살인범으로 판결받아 교도소에서 10년을 복역한다. 그러나 실제 범인은 따로 있었고, 10년을 복역한 최모씨는 진실을 찾기 위해 법원에 무죄를 주장하며 재심을 청구한다.


영화는 SBS 교양 다큐 <그것이 알고 싶다>의 898회와 997회, <약촌 오거리 택시기사 살인사건>에도 소개된 바 있다. 개봉 이전에 이곳에서 매스컴에 재수사 촉구 여론을 일으킨 바 있기 때문에 영화는 지난 사건의 경과를 정리하고, 감상을 전달하는 작품이었다. 실화 기반의 영화이기 때문에 서사의 과정에서 각색이 들어갔다. <재심>의 작품성 결함은 여기서부터 딱 두 군데가 도드라지는데, 하나는 각색의 과정에서 변호인 준영(정우 역)에게 지나치게 극단적인 운명을 부여하고 심경 변화를 시도했다는 것과, 다른 하나는 이 과정에서 함께 흥분해버리는 사운드 이야기다.





각색


전자는 김태윤 감독의 상상력 이야기다. 시나리오를 작성하다 보면 자신이 픽션에 너무나 몰입한 나머지 극적으로 변태 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캐릭터와 자아 사이에서 가면을 바꿔 쓰는 과정에서 키보드의 손은 일필휘지로 페이지를 넘겨버린다. 이렇게 이야기를 주욱 써 내려간 이후에는 이입된 감정 속에서 작가 본연의 모습이 투영되진 않았는지 경계하며 그것을 잘라내는 과정이 필요하다. <재심> 시나리오 속 인물들의 대사 중에는 간간히 김 감독의 인물 설정 경계가 불분명해지는 지점이 드러난다. 화면 속에서는 분명히 변호인 준영(정우 역)과 현우(강하늘 역)가 대화를 나누는데, 머릿속에선 한 사람이 독백을 하는 느낌이다.


이것은 모든 등장인물들이 지나치게 감정적인 대사를 뱉는 것으로 나타난다. 재심을 설득하는 준영과 흔들리는 현우 사이에는 분명 냉정과 열정, 그리고 그 사이의 공간이 존재한다. 변호사로서 돈을 벌고 싶다는 욕구와 진실을 밝히고 싶다는 의지 사이에서 고민하는 현우와 창환(이동휘 역) 사이에도 냉정과 열정 사이의 감정이 존재할 것이다. 그렇지만 이들의 대사는 가장 냉정한 표정과 목소리를 뱉는 중에도 뜨겁다. 조연 배우의 모습도 마찬가지다. 때문에 영화는 등장인물들이 만드는 갈등으로 완성된다는 느낌보다는 한 사람의 모놀로그 연극을 감상하는 듯하다.



주제를 정리하기 위해 사용한 시각적 은유는 그 시도는 좋았으나 그 술수가 뻔했다. 박찬욱 감독의 영화 <아가씨> 마지막 씬(scene)에서 그가 대칭 구조를 통해 만인에게 회자될 명장면을 각인시킨 방법을 떠올려 보라. 김 감독은 이렇듯 영화의 주제를 시각 언어로 바꾸는 트릭을 영홧속 로펌 대표의 부토니에와 파트너 변호사(이동휘 역)의 부토니에, 그리고 현우의 마지막 변론에서 그의 슈트 라펠에 달린 변호사 배지로 수행한다. 그러나 그 기술이 들어간 화면은 인위적이고, 가슴팍을 향한 조명은 직설적이다. 이러한 필자의 감상이 본 영화가 자신의 '첫 데뷔작'이라고 고백한 감독에게 가혹한 것일까? 그렇지만 관객들은 근 10년 동안 팩션(fact+fiction, 실화 기반의 각색) 영상에 너무나 익숙해졌고, 팩션은 '안전한' 흥행 방식으로 두터운 고정 관객을 보유하고 있는 장르가 됐다. 신선하기 어렵다는 소리다. 만약, 김 감독이 이러한 관객들의 지루함을 타파하기 위한 기법으로서 현우의 가혹한 운명을 설정하고, 시각적 트릭을 도입하는 방식을 사용했다면 그 사용이 과했다 표현하고 싶다.





사운드


이제 사운드 이야기를 하자. 영화에서 사운드는 이야기를 전개하는 큰 축이다. 사람들은 OST로 영화를 기억하기도 하고, 개그맨은 영화 음악을 도입으로 패러디의 시작을 알리기도 하며, 특정 배우는 먹는 효과음으로 대중들에게 각인된다.


위와 같은 의미에서 영화 <재심>의 사운드는 매우 아쉽다. 스네어 드럼은 뜬금없는 장면에서 터지고, OST는 등장하지 않아도 될 곳에 과장된 사운드로 들어간다. 한재권 음악감독은 충무로에서 이름난 감독이다. 그러나 그의 필모그래피는 <실미도>, <범죄의 재구성>, <아라한 장풍 대작전> 등 액션 사운드에 충실하다. 본 영화는 드라마에 무게가 실려 있다. 색채 짙은 이야기를 전달하는 사운드는 이 영화에 적절치 못했다. 그림으로 치면, 샤갈의 작품에 채도를 잔뜩 올린 컬러의 사운드가 들어갔다.

 


음향감독 또한 채도가 짙은 사운드를 사용했다. 붐 오퍼레이터의 노고를 어떻게든 드러내고 싶었던 것일까? 영화 초반, 변호사 현우의 처량함을 유희로 표현하는 장면이 있다. 이곳에서 현우를 무시하는 역할로 등장하는 고등학생들의 뒷 말은 지나치게 잘 담겼다. 개그를 하기 위해 삽입된 장면이라는 것을 또렷한 대사와 깨끗한 보이스로 설명한 셈이다.





그럼에도


영화에도 리그가 있다면, 이 영화는 2부 리그 1등이다. 그러나 프리미어 리그에선 경쟁력이 있을 것이라 점지하기 어렵다. 부연설명하자면, 이준익 감독의 <동주>는 2부 리그 2등 영화다. 그렇지만 <동주>는 메이저 리그에서 강팀을 꺾을 수 있는 한방이 있다. 가끔은.


<재심>은 안전한 영화다. 한참 비판했지만 시나리오는 실패할 일 없는 소재로, 실패할 일 없게 전개됐다. 시나리오, 사운드, 화면에 사용된 격정적인 요소들은 어쩌면 필자와 성향이 다른 관객 속에 주기적으로 회자될 수도 있을지 모른다. 그렇지만 필자에겐 마지막 공연을 앞둔 장인들의 기예 같아 보였다. 현란한 기술을 보느라 시나리오와 주제의식에 깊게 이입할 수 없었다.


그러나 칭찬하고 싶은 부분도 있다. (아마도 제작진 쪽에선 그렇다 생각지 않을 수도 있다. 그래도.) 영화 <재심>은 2017년에 <공공의 적 1>을 다시 보는 기분을 들게 했다. 어릴 적, <공공의 적>을 보면서 강철중(설경구 역)에 미친 듯이 몰입했던 향수가 떠올랐다. 악을 징벌하는 장면에선 나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던 그때가, 그 긴장되는 맛이 다시 생각났다. 법정 활극과 액션, 색채 짙은 사운드, 깡패보다 더한 형사와 차가운 변호사, 그리고 소시민보다 못한 삶을 사는 주인공의 이야기는 가슴을 울컥하게 한다. 감정을 건드린다. 그러나 시나리오가 안전하다는 것은 이러한 소재의 유리한 사용 만큼이나 명확하다.


만약 김태윤 감독이 이번 작품, 또는 앞으로 추구하는 방향이 예술세계라면, 다음 작품은 실화 기반의 안전한 시나리오 사용을 재고하고, 과장된 감정 장치들을 더욱 치밀하게 배치해야 할 것이다. 그가 계속해서 작품 활동을 통해 발전하는 모습을 기대한다.


강하늘, 이동휘, 이경영, 그리고 김해숙은 얼마나 입체적이고 열정 있는 배우인가. 필자는 이 배우들의 도전정신과 다작 욕심에 박수를 보낸다. 스크린 속 배우들의 연기는 절실히 살아 있었다. 비틀거리는 시나리오와 과장된 흐름 속에서도 감상자의 어떤 '버튼'을 누르고자 하는 그들의 열정은 <재심>에 의미를 부여하는 어떤 관객들에게 큰 힘을 실어줄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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