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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고 Aug 10. 2016

사람은 가고 예술은 남다

김환기, 2016 환기미술관 특별기획전 (3/25 ~ 8/14)

감상주의는 후에 실컷 빠질 테니 상스런 이야기 하나 먼저 꺼내 보자. 김환기는 박수근, 이중섭과 더불어 "한국 미술시장 빅 쓰리"다. '시장'이라는 단어를 꺼냈으니 이 순위는 다분히 경매 가격에 부친 것임을 강조한다. 김환기는 그 인기만큼이나 위작 시비도 많다. 진품 감별이라면 둘째가라면 서러운 천경자 까지 끼워 넣으면 이 네 작가는 한국 미술 시장 대소사를 위해 존재한다는 주객전도의 농담마저 떠돌 정도다.

 

김환기는 인터넷에서 '이거 얼마?'하는 가치판단 시비에도 빠지지 않는다. "별것도 아닌데 40억 대", "나도 그릴 수 있겠다 싶은데 50억"과 같은 댓글의 주어다. 그래도 저 발언은 그나마 납득이 간다. 김환기 작품은 24인치, 커봐야 40인치 모니터로 보면 '복잡하지만 대충 따라 그릴 수 있을 것 같은' 패턴으로 인식될법도 하니까. 그러나 모니터 너머 김환기를 비웃는 사람들 중, 실제 그의 작품을 마주한 사람들은 몇이나 될까? 그리 생각해 보면, 앞서 말한 '납득'이라는 것은 결국 '(작품을) 본 사람으로서'의 끄드럭거림이다. 김환기는 실물과 사진의 격차가 큰 그림을 그린 화가다. 보통 성인 키를 우습게 넘기는 캔버스 크기에 펼쳐진 추상 세계를 보고 있노라면, 분명히 그것이 고요한 정지 작품임에도 어딘가 일렁이는 듯한 착각마저 들게 하는 힘이 있다.




환기미술관 메인동 3층 전경, 이미지 출처: 타임아웃 서울


김환기 작품은 갤러리 현대와 환기미술관에서 볼 수 있는데, 필자는 환기미술관을 찾았다. 환기미술관은 2013년 한국 최고의 현대건축 9위에 이름을 올린 바 있다. 건축에 대해선 잘 알지 못하기에 마구 뇌까려보면, 건축은 외부 전경보다 실내 구조와 전시실 배치가 아름답다. 아니, 환상적이다. 메인 전시실은 어느 방향으로 전시를 감상해도 그 동선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구성되어 있고, 창이 난 크기와 건물 외벽과의 비례가 아름답다. 마루의 결 또한 고 김환기 선생의 작품 세계와 닮았다. 작품을 감상하기 위해 전시실을 옮겨 다니다 보면 생각을 정리하기도 좋고, 아주 멀리서 작품을 내려다보며 놓쳤을 법한 디테일을 발견하기도 한다. 미술관 건물, 괜찮다.


93년 개관 기념으로 필름 카메라 달랑 들고 올라가 대충 한방 찍은 것 같은 공식 홈페이지 사진


다만 나 같은 일개 블로거가 환기 미술관에 대해 아쉬움을 토로하자면, 보도자료나 제대로 찍은 사진을 찾기가 쉽지 않다. 하다못해 건물 외관이라도 예쁘게 나온 사진이 있으면 좋겠는데, 이쪽 미술관 홍보, 기획팀들은 대중과의 소통에는 영 관심이 없어뵌다. 다들 무언가 바삐 움직이는 것 같은데, 그것이 일반 관람객을 위한 일 같진 않다. 굿즈로 파는 김환기 포스터는 색이 다 빠져있고, 도록은 한데 뭉쳐 오천 원, 만원 세일 중이다. 기념머그는 바닥에 금이 가있다. 전시 기획 스토리텔링도 수준이 높지 않다. 이쯤 되면 관련된 분들이 보기엔 부암동 <자하미술관>이나 <서울미술관> 구경을 갔다가 들르라는 '곁다리 미술관' 정도의 비아냥 처럼 들릴 것이다. 그러나 환기미술관은 건물, 그리고 작품 자체가 좋다. 알맹이를 좋아하는 현대미술 오타쿠들은 불평을 입에 달면서도 찾아갈 수밖에 없는 구조다. 오히려 작품 수나 감상 환경은 팬톤이 어쩌니 하면서 강남역 11번 출구에서 미술 작품을 보는 것 같은 곳 보다 훨씬 낫다. 또 이곳 말고 세상 어느 곳에서 김환기 작품을 이렇게 많이 볼 수 있겠나 생각해 보면 불편함은 목구멍까지 차오르다가도 더 이상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한다.


관람객들 또한 (대충) 두 가지 유형이다. 하나는 사진 촬영 금지라는 도슨트의 언질에 시무룩해져서는 대충대충 "예쁘다"만 연발하며 입구에서만 눈 크게 뜨고 사진 한 방 박고 돌아가는 부류와, 다른 하나는 실제 예술인인지 뭔지 작품을 앞 뒤로 왔다 갔다, 고개를 빼었다 들이밀었다 하며 그 디테일까지 보고 가는 부류다. 이쯤 하면 환기 미술관에서 효용을 느낄 만한 분들에게 드릴만한 언질은 다 드린 것 같으니 작품 감상을 시작하자. 덧붙이자면 이것은 어디까지나 가치 판단의 문제이니, 문제 삼고자 하시는 분들은 문제 삼으시고, 개인의 의견으로 치부하실 분들은 그렇게 해 주셨으면 한다. 댓글 남겨주시면 필자도 참고 정도만 삼도록 하겠다.



미술은 철학도 미학도 아니다.
하늘, 바다, 산 바위처럼 있는 거다.
꽃의 개념이 생기기 전, 꽃이란 이름이 있기 전을 생각해 보다.
막연한 추상일 뿐이다.

김환기, 1973년



1층: 드로잉 습작과 대표작



그의 스케치북 초연은 아이의 그것을 닮았다. 1930-50 년대 스케치북 드로잉에는 점을 찍어 표현하는 패턴 세계의 싹이 보인다. 김환기를 대표하는 화풍인 점-추상 기법은 이 시기에는 등장하지 않지만, 여인의 광주리 과실과 꽃의 외곽선을 표현하는 것에서 그 흔적이 언듯언듯 보이는 것 같다. 인터넷에서는 구할 수 없었지만 그가 부산살이 당시 배와 산등성이를 표현한 드로잉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부산과 동경을 오가던 시기, 그러니까 동경시대(1933-1937) 언저리의 스케치에는 현실과 추상을 오가는 반-추상 기법의 싹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무제, 1957년


미술관이 드로잉 북을 공개하는 것에는 다 이유가 있다. 이것은 감상자를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창작자를 위한, 그러니까 예비 미술가들을 위한 것에 조금 더 가깝다. 드로잉 북은 작가가 살아생전 어떤 실험을 하였는지, 자신의 작품 세계를 어디서 어떻게 발견하였는지 시간 순서대로 그것을 훔쳐볼 수 있는 강력한 단서다. 일기나 유품도(요즘은 서재가 그렇다) 상당한 도움이 되지만, 실제 드로잉 북만큼 적나라하게 비법을 전수하는 비기(祕記)는 없다.

지금의 김환기를 있게 한 점-추상 화풍이 구축되기까지 그는 어떤 눈으로 세상을 보고 있었는가, 그는 자기 화풍의 어떤 부분을 파고 내려가 대표작으로 승화시켰는지 관찰하고, (예비 작가인) 본인은 세계를 어떻게 들여다보는지 돌아보아야 할 때. 또는 거장은 어떤 습작을 하는가 궁금할 때, 드로잉 북은 어떤 참고서보다도 큰 도움이 된다.



잠시 말이 샜다. 김환기는 동경 화원으로 있다가 1937년 서울로 돌아온다. 이 시기부터 1951년 까지를 1차 서울 시대라고 부른다. 당시는 김환기가 반-추상 세계에 막 발을 들이던 때로 한국적 정서가 담긴 대상을 자신의 화풍으로 해석하는 시기였다. 그는 정물을 그려도 마치 각기 다른 차원에 있는 듯 입체를 해석했다. 그림 오른쪽 하단의 청자 스케치를 보면 이해가 쉽다. 청자는 목, 허리, 배, 밑동 심지어 그림자마저 다른 시점에서 관찰하고 그것을 습사 한 뒤, 그것을 안쓰던 손으로 용접한 것 같다. 드로잉은 덧선 하나 없이 시원하게 뻗었다. 얼핏 생각하면 피카소의 <우는 여인> 마냥 다면체의 그림을 선보일 것 같으면서도 실제로는 참 명료하게 이해되는 결과가 나온다.


앞서 말했듯 환기미술관은 허가받지 않은 사진 촬영을 금한다. 때문에 위의 사진은 김환기의 수필집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의 삽화 사진을 사용했음을 밝힌다.


이제 1층에 함께 있는 대표작 전시실로 걸음을 옮기자.

22-IV-74 #331 Duet, 1974


그의 추상세계 작품은 코튼에 유채, 또는 캔버스에 유채를 재료로 한다. 그중 코튼의 유채 작품이 조금 더 물성적 재미가 있다. 이유라면 흰 옷가지에 김칫국물 한 번 떨어뜨려본 사람이라면 모두 공감할 텐데, 국물이 떨어지면 낙하지점으로부터 퍼져나 가는 붉은 고춧 국물의 색 진하기와 방향성이 드러난다. 그의 작품도 그렇다. 김환기는 코튼 천 바탕에 길을 내고, 그 공백을 점으로 채운다. 점의 색깔은 처음에는 일정해 보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또 그 진하기와 결이 각기 다르다. 코튼의 섬유질을 타고 베이는 물감의 깊이와 퍼져 나가는 섬유의 방향이 사방으로 다르기 때문이다.


여담으로 그의 작품 레퍼런스 코드는 단순하다. 예를 들어 상단의 작품 제목인 22-IV-74 #331의 경우는 1974년 4월 22일에 그리기 시작했다는 뜻이며, 뉴욕 시기(1963-1974)에 제작한 캔버스 중 331번째 것이라는 뜻이다. 가끔 <듀엣>이나 <봄의 소리>, <파티나 IIII>와 같은 제목이 함께 붙은 게 아니라면, 김환기는 추상 작품의 제목을 이렇게 붙였다. 훗날 김향안 여사가 생전 남편의 작품을 기리기 위해 미술관 운영과 전시, 출판을 총괄했지만 그녀 사후에 관장이 세 번 바뀌면서 보유 작품 목록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해 전체 작품을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한다. 위작 시비는 이 틈바구니 사이에서 활개를 친다.


14-XII-71 #217, 1971 (292x211 cm)


성인 키의 두 배에 비견할 만큼 거대한 작품이다. 작품 상단의 삼각형은 오늘날 포토샵의 레이어(layer)를 보는 것 같은 효과가 있지만 덧그린 것이라기보다는 옅은 색으로 한 번에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대충 보면 이것은 노란 바탕에 레이어로 삼각형을 덧씌운 것처럼 보인다. 시각적 트릭이다. 삼각형은 전체 세계에 그 거대한 머리를 들이밀고 있다. 이때 주목해야 할 것은 삼각형의 경계. 사진으로는 자세히 드러나진 않지만 실제로 보면 삼각형이 노란 배경을 침습하면서 그 경계 내부로 물감이 스미는 듯한 표현이 있다. 이것은 삼각형의 침범과 동시에 배경으로부터 침범당하는 중이다. 동적 세계의 표현이다.


4-I-66 Sounds of Spring, 1966, 봄의 소리


이 작품은 모니터로 보는 색과 실제 발색이 많이 다르다. 좋은 색/화질의 사진을 구할 수 없음에 마음이 좋지 못하다. 그러나 작품을 실제로 보면 샤갈의 팔레트를 마주하는 것 같다. 김환기는 이 세상에 자연히 발색 되지 않는 색으로 캔버스를 채운다. 도트와 선으로 이루어진 모스 부호 같은 점은 마치 칸딘스키의 음악 같다. 작품의 꼬리에 붙은 <봄의 소리>또한 이와 같다. '봄'과 '소리'는 서로 다른 감각의 결합이다. 눈 앞의 작품에서 보이는 색과 코드(code)의 결합은 봄이 오는 소리를 만들어낸다. 머릿속에선 푸른빛을 내는 내천에 파랗고 빨갛고 녹색 빛깔을 내는 조약돌을 동시에 떨어뜨리는 듯한 영상이 재생된다.


16-II-70 #147, 1970

원래는 <16-I-70 #140>을 실었어야 했는데 이미지를 도저히 구할 수가 없어 같은 시기에 그렸던 사진을 삽화로 썼다. 개인적으로 가장 좋았던 작품이다. 이유는 단순하다. 레오파드의 호피를 연상시키는 그것과 발색의 오묘함 때문이다. 작품 표면에 보이는 색 레이어는 보이는 것만 4단이다. 짙은 파란 얼룩을 깔고 그 위에 바탕을 그린다. 그 후 얼룩무늬를 내기 위한 기초 배경을 올리고 그 위에 검은 점을 그린다. 도자 기법으로 표현하자면 '사벌 구이'다. 이때 시간을 두어 건조와 덧칠을 반복하니 그 은은함이 아름다움의 극치다. 게다가 면사 위에 그려졌기 때문에 물성적 우연까지 확보했다. 나의 심미적 수준은 딱 이 정도여서, 로스코가 캔버스에 두껍게 덧칠한 그림보다는 이렇게 불투명한 막으로 랩을 쌓은 그림에 더욱 마음이 동한다.

위작의 경우는 빠른 시일 내에 건조하고 그 물감을 너무나도 두껍게 칠한 나머지 균열이 생기고, 표피가 일어난다(剝落)고 하는데, 원작자의 것은 그런 결함 하나 없이 온전히 표현하고자 하는 바를 살려냈다.


25-III-69 #46, 1969 (178x125 cm)


이 작품의 푸른 원(달)은 번졌다기 보단 붓칠로 그 효과를 흉내 냈다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하겠다. 캔버스에 그렸기 때문이다. 한국적인 도형과 색 상환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위에서 말한 드로잉북이 작업 형태에 대한 힌트라면, 이 작품은 그의 기법에 대한 힌트에 가깝다. 레이어로 어떻게 단을 내었으며, 색은 몇 번 덧칠했는지, 무슨 색을 무슨 색 뒤에 칠했고 덧칠 시 경계를 어떻게 처리할지에 대한 고민이 색의 대비로서 명확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분자구조 같기도 한 원형의 결합 경계는 그 번짐이 수용성 용액의 확산 과정과 비슷해 보이면서도 가까이서 보면 성마른 붓 모로 밀어낸 흔적이 보인다.


29-VII-68, 1968


다시 한 번 이미지를 구할 수 없어, 홍콩 아트페어에 올라온 비슷한 시기/느낌의 작품을 골랐다. 원래 소개하려고 했던 작품은 <9-IV-68 #25, Patina IIII>로, 위의 작품과 마찬가지로 캔버스에 유채로 칠한 작업이다. 보통 캔버스 작업은 수채화에 비해 수정, 그러니까 붓질의 경계를 모호하게 하는 것이 수월한 편이다. 그래서 이 작품은 색 경계에 더욱 높은 점수를 매기고 싶다. 김환기의 화풍에 따라 경계는 농도 다른 바닷물이 만나듯 그 경계가 흐릿해진다. 이때 자칫하면 물감의 농도나 붓놀림에 따라 발리는 물감의 양이 달라지기 때문에 붓의 강약을 쉽게 유추할 수 있다. 그러나 본래 소개하려고 했던 작품에서는 육안으로 보아도 이 흔적이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 (아쉽게도 삽화로 사용한 작품에서는 그 방향이 유추가 가능한 편이다) 수화(김환기의 호)의 회화적 테크닉이 어느 정도인지 어림짐작 해 볼 수 있다.

 

14-III-72 #223, 1972 (254x200cm)


점추상 기법, 결, 환형 무늬, 번짐 효과까지. 김환기의 예술 색이 빠짐없이 들어가 있는 작품이다. 그의 예술은 말년으로 갈수록 전성기를 맞는데, 이것은 임근준 미술 평론가가 언급했듯 "한국적 추상미술의 신기원을 개척했다. 유화를 동양인의 입장에서 재창안 하고, 그를 통해 미국 현대미술계의 색면추상에 반향 하며 회화의 물성을 품격 있게 강조하"는 작업이었다.(출처) 이 작품은 마지막 뉴욕시대. 그러니까 김환기 선생이 타계하기 2년 전에 시작했던 작품으로, 화선지를 펴듯 수평으로 그려낸 '동양스런' 작풍의 정점이다. 이 작품에서 사각의 타일들은 리듬을 갖기 시작하고, 그 의지와는 달리 드러나는 색의 농도 차이는 또 다른 파고가 되어 작품 안에서 살아 움직인다.





2층: 파리/뉴욕 시기


뉴욕시기 드로잉(1965-67)이 한쪽 벽면을 채우고 있다. 이 스케치는 그의 동양적 코드가 어떻게 추상적으로 발달하였는가를 추적 관찰할 수 있다. 그는 연필로, 볼펜으로, 마커로 스케치를 하면서 캔버스로 옮길 형태와 면적, 색을 조율하고 실험했다.


여기 와서 느낀 것은 시정신이요.
예술에는 노래가 담겨야 할 것 같소.
거장들의 작품에는 모두 강력한 노래가 있구려.
지금까지 내가 부르던 노래가 무엇이었다는 것을
나는 여기 와서 구체적으로 알게 된 것 같소.
밝은 태양을 파리에 와서 알아진 셈.

김환기 파리통신 II, 1957년 1월 일기


파리시기(1956-59)의 드로잉


그의 드로잉 중 하나에는 아래와 같은 문구가 발견되기도 한다.

저렇게 많은 중에서 별 하나가 나를 내려다본다.
이렇게 많은 사람 중에서 그 별을 처다본다.
밤이 깊을수록 별은 밝음 속에 사라지고 아는 어둠 속에 사라진다.
이렇게 정다운 너 하나 나 하나가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이산저산 시


그의 대표작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10-VIII-70)>연작의 근간이 되는 시다. 이전 파리시절(1956-1959) 작품이 구름, 달, 산맥, 백자와 같은 향토적 소재를 바탕으로 이뤄낸 반-추상 기법의 이상이었다면, 뉴욕시기(1963-74)의 작품은 점추상의 시기이면서 형태적으로는 기호(code)에서 벗어나 완전 추상의 세계로 나아간다. 파리시기 작품과 뉴욕시기 작품을 한데 놓고 보면 그 기호적 구분이 명백하다.


꽃사슴, 1958 (91x73 cm), 개인소장


“하루는 수화(김환기)가 내 방이 심심하다며 사슴 그림 하나를 줬어요.
그런데 70년대쯤인가, 돈이 너무 궁해 할 수 없이 영국에 사는
한인 여성한테 몇 십만 원에 팔았지요. 한참 뒤 그 사람이 그림 수선하러 현대화랑에 가지고 갔더니, 화랑에서 이 그림 팔라고 하더래. 누가 4억 원에 산다고. 그래서 팔고는 나한테 3000만 원을 가져왔어요. 고맙다고...

석남 이경성(전 국립 미술관장) 인터뷰


파리 시절의 그림 하나를 가져오면서 에피소드(4억)도 하나 끼워 넣어봤다. 사슴의 머리 뒤편에 있는 것은 푸른 달로, 이 시기 김환기 선생은 파란색 달을 즐겨 그렸다. 아래는 뉴욕시기. 그러니까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다. 바탕은 아교가 색이 바라 살짝 누런 빛을 띠고, 그 위를 수많은 점이 별빛처럼 수놓아 있다.

10-VIII-70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1970


여러 작품에서 로스코의 느낌이 느껴진다면 작품을 제대로 보았다 할 수 있다. 칭찬의 근거는 본인이 아니라 김환기 선생의 일기니 더욱 믿어도 좋다. 김환기 선생은 평소 로스코에 존경을 표하곤 했는데, 로스코가 타계할 당시 일기에 애도의 표현을 적을 정도였다. 그의 작품에서 로스코와 비슷한 느낌의 숭고(sublime)가 느껴진다면 김환기 화가가 기뻐할 일일 것이다. 이 작품은 로만 오팔카(Roman Opalka)의 느낌도 나고, 이우환 작가가 캔버스로 작품 세계를 옮겨간 시기이기도 하니, 여러모로 떠들 것이 많은 작품이라 할 수 있겠다.


4-IIII-68 #238, 1968 캔버스에 유채


개인적으로 참 '빨' 못 받는 작품이라 생각한다. 실제로 보면 거대한 캔버스에 일관성 있게 칠해진 검은 물결과 정제된 배경이 인상적이다. 리듬을 구성하는 소리 조각 또한 한층 정제된 모습인데, 색이 달라지는 경계를 들여다보느라 이 작품 앞에서 한참을 서성였다. 면사가 아닌 캔버스에 그린 작품이지만 이 작품은 캔버스대로 김환기가 표현할 수 있는 화풍의 최대가 드러난 작품이라 평가하고 싶다. 개인적으로 작품 <VIII-1966)> 작품은 휴대폰 배경화면으로 해 놓고 싶을 정도로 아름다웠는데, 이 또한 재단에서 공개한 이미지가 없으니 안타깝다.


2층에서 또 볼만한 것은 그의 작품의 '기호화'다. 그는 이쪽 영역까지 숭고의 뿌리를 내리진 못한 것 같지만, 기호의 영역에 이름을 걸칠 수 있을만한 알리바이를 마련하기엔 충분한 작품을 남겼다. 아마 환기미술관의 2층 드로잉 습작을 본 사람들은 기억할지도 모르겠다. 그의 스케치 중 하트가 그려진 그림과 그 주변 경계를 표현하는 방식에는 어딘가 모르게 헤링(Keith Harring, 1958-90)의 흔적이 보인다.


식물Plants, 1967


위의 작품에서 헤링의 그것을 찾아볼 순 없겠지만 한국적 정서가 가미된 식물 기호가 마치 고대의 룬 문자를 관찰하는 듯 흥미롭다.


미술관 내에서 실내 촬영이 불가하다 분명히 고지하였음에도 어떤 훌륭하신 분께서 사진에 해시태그까지 달아 인스타에 올려주셨다. 필자는 감사의 뜻과 복잡해진 심경을 함께 담아 여러분들과 이 사진을 공유하고, 출처를 밝힘으로써 문화 시민으로서 <샌델의 정의론적 갈등>, 더 쉽게 말하면 <죄수의 딜레마>를 느끼고자 한다. 오른편 그의 유화에서 키스 헤링 느낌이 나려지 않는가?


그렇지만 캔버스 또는 코튼 위에 표현된 기호의 세계에서 헤링의 화풍은 그다지 큰 의미를 갖지 못하였을 터이다. 만약 헤링의 키치한 즐거움이 김환기의 캔버스에서 탄생했다 머릿속으로 소설을 써 보면, 헤링은 김환기를 따라한 스트릿 그래픽 디자이너. 김환기는 '기호와 기치의 세계를 화단에서 표출해 낸 배짱 좋은 예술가' 정도의 평가를 받아내며 스포트 라이트 언저리만 맴돌았을 것 같다.


인스타그램 @ej_chloe_jung 님 덕분에 우리가 이 그림을 감상할 수 있게 됐습니다.

모두를 피핑 톰으로 만든 기분


그만 깐족대고 다시 김환기 작품 세계에 집중해 보자.


무제, 1970년대


그의 스케치 중 <29-I-71>에는 점묘화의 경계로 드러나는 리듬감과 발색에 따른 흐름까지 계산한 듯한 움직임이 보인다. 가볍게 칠한 물감 뒤로 드러나는 스케치는 그가 사각형 셀 하나의 공간을 찌그러뜨리거나 왜곡하지 않으면서도 균형 있게 리듬감을 부여할 수 있는가를 연구한 흔적이 나타난다. 역시 스케치에서만 확인할 수 있는 작품 노하우다.


아침부터 백설이 분분.
종일 그림 그리다.
점화가 성공할 것 같다.
미술은 하나의 질서다.

김환기 1965년 1월 2일 일기


여름호수, (본래 20-IIII-70 #167, 1970을 소개하려 했으나 이미지가 없었다)


2층 전시실에서 가장 가지고 싶은 작품이었다. 211x148cm 크기의 거대한 작품이 무릎 높이 정도의 간격을 두고 올라가 있었다. 여름 호수의 단순한 요소만 남기고 모두 제거한 듯한 작품. 김환기는 <어디서 ... 다시 만나랴>에서 보여주었듯 하늘과 자신의 공통점과 그 대비를 고민했다. 이 작품의 주제의식이 그 시구와 관련이 없다 하더라도 호수 하단과 상단의 대비는 자신과 천하의 대비와 공통점이 한데 섞여있는 것 같다. 김환기 화백의 작품 세계인 반복, 확장, 점묘화 기법과 로스코의 서브라임이 모두 들어가 있는 것 같아 좋다.


2층에서 제법 오랜 시간을 이 작품 앞에 서 있었다. 한 마디의 말로 한 대상을 정의할 수 없듯, 한 가지 작품으로 한 작가를 정의할 순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 작가의 특징이 응축된 어떤 한 작품이 있고, 그를 잘 안다고 착각하는 자가 그 속에서 작가의 특징을 입맛대로 추출/재조합할 수 있다면, 그 작품은 작품대로 작가를 대변하는 작품이 될 것이다. 이것은 감상자만이 가질 수 있는 주관이자 제멋대로 생각할 권리다. 필자는 이 작품이 그렇다 생각하고, 그래서 좋지 않은 화질로 <20-IIII-70 #167>을 공유하는 것이 아쉬울 따름이다.


2층의 작품 사이사이에는 유독 일기 회고가 많았는데, 그중 인상 깊었던 구절 하나를 공유한다.


고생하며 예술을 지속한다는 것은
예술로 살 수 있는 날이 있을 것을 믿기 때문이다.
고생이 무서워 예술을 정지하고,
살기 위해 딴 일을 하다가
다시 예술로 정진이 될 것인가.

김환기 1970년 1월 14일 일기





3층: 뉴욕 시기, 푸른 점

이른 아침부터 뻐꾸기가 울어댄다 했다. 뻐꾸기 노래를 생각하며 종일 푸른 점을 찍었다. 앞바다 돗섬에 보리가 누렇다 한다. 생각나는 것이 많다. 부산에서 향과 똑딱선을 타거 아버지 제사를 모시러 가던 때... 맨해튼... 지하철을 타거 뻐꾸기 노래를 생각해 본다.

김환기 1970, 6월 23일 일기.


김환기는 뉴욕시기에 대한민국 1대 추상화가로서 자리를 굳혔다. 동양적 방식으로 펼쳐낸 천과 추상적 표현의 사용, 그리고 평론가들의 이해를 바탕으로 김환기는 맨해튼에서 고국의 하늘과 별을 그렸다. 3층의 작품은 전성기. 그러니까 '푸른 점'의 방으로, 색과 형태가 조금씩 다르면서 모두 다 개성 있는 김환기 화백의 작품으로 사방이 둘러쳐 있다.


Air and Sound I, 2-X-73 #321, 1973

이 작품을 해석하기 앞서, 앞에서 언급했던 <봄의 소리>를 잠시 상기해 보자. 작품에서 사각형 타일은 '소리'를 상징하고 있음을 유추할 수 있다. 그리하면 <바람과 소리 I> 작품을 거침없이 가로지르는 질긴 흰 선의 정체는 '바람'이 된다. 물론 어디까지나 글쓴이의 상상에 근거한 추리이니, 너무 맹신해선 안될 것이다. 현대 미술의 가치는 자의적 해석과 비판에 있음을 상기하자.


흥미로운 것은 '바람'의 표현이 타일을 다 만들고 흰 줄을 그어 완성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작품은 이미 스케치 단계에서 바람이 될 영역을 그어놓은 후, 그 영역을 보전하면서 사각형 타일을 채워나가는 방식으로 완성됐다. 그러니까, 이 작품은 자연히 있는 바람 위에 소리를 그린 작품이다.


이것은 말이 쉽지, 발상을 바꾸는 단계의 사고가 필요하기 때문에 자기 작품 세계에 대한 무던한 실험 없이는 고안하기 어려운 방법이다. 즉, 레고 놀이처럼 이것을 빼고 저 위에 덮고, 다시 반대로 하는 등의 무한한 실험 없이는 좀처럼 생각하기 어렵다. 아래 작품을 한 번 더 보면, "팍" 하고 터져 퍼지는 음원의 표현 아래, 바람결이 자연스레 남아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16-IX-73 #318, 1973


3층은 세로로 200cm가 족히 넘는 작품들을 사방에 둘러놓음으로써 김환기 추상 회화의 극치를 압도적으로 표현한다. 한 작품을 제외하면 모두 72, 73년도 작품으로, 맨해튼 시기. 그러니까 점추상 회화의 최정점의 시기의 작품들로만 한 테마를 구성했다.



3층에서 소개하고픈 작품은 많았지만 이미지가 별로이거나, 별로일 이미지마저 구하기 어렵다. 다시한번 말하지만 환기미술관은 타 미술관에 비해 대중들에게 각박하다. 이는 미술관 주 수입원이 어느 곳인지를 쉬이 유추할 수 있도록 사고의 길을 열어준다. (일반 업계에서조차도 돈이 어디서 벌리느냐에 따라 타깃 고객을 대하는 방식이 달라지지 않나.)

또 말이 샜다. 만약 여기까지 그림만 슥슥 스크롤하며 내려왔다면 독자 분은 정상. 필자가 적은 글자 하나까지 이해하며 정독하려 들었다면, (또는 앉은자리에서 한 번에 여기까지 읽었다면) 예비 미술가. 아니면 미술 오타쿠 밖에 없겠다. 50억짜리 미술품을 찬양하는 글 치곤 이 글은 지극히 감상적이며 비논리적이니까 말이다.


마지막으로 김환기 작가의 일기 한 구절을 인용하며 글을 닫을까 한다. 이 구절 하나만으로 전시 주제인 <사람은 가고 예술은 남는다>를 요약할 수 있을 것이며, 뭇 슬럼프에 빠진 예비 예술가들을 환기미술관으로 소환할만한 캐치프레이즈급 술회이기 때문이다. 기대가 더욱 커지면 실망밖에 건질 것이 없을 테니, 얼른 마무리를 짓도록 하자.


일을 하며, 음악을 들으며 혼자서 간혹 울 때가 있다.
음악, 문학, 무용, 연극 - 모두 다 사람을 울리는데 미술은 그렇지가 않다.
울리는 미술은 못 할 것인가.

김환기, 1968년 1월 26일 일기에서



전시 <사람은 가고 예술은 남는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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