잇님들께 드리는 전상서
"그 교수님이 오빠랑 잘 안 맞는 거. 아시죠?"
어제 너는 내 면전에 대고 빙글빙글 웃으며 말했다.
"알지."
나는 분위기에 맞춰 살살 웃었다.
아니. 몰랐다.
그렇구나.
그 교수가 나랑 잘 안 맞는구나. 그래, 원래 우리 대화가 평행선을 조금 달리긴 했지.
그렇지만 대화가 평행이라고 해서 호감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나는 그 교수의 어떤 부분을 참 좋아하고 있었다.
적잖이 놀랐다. 네가 예전부터 말을 생각 없이 뱉는다는 걸 모르는 건 아니었다. 그렇지만 그것은 나만의 생각일 뿐이라 여겼다. 단어 하나하나에 흠칫 놀랄 때가 있었다. 그렇지만 악의는 없으니 몇 번쯤은 웃어넘겼다. 하지만 이간질은 다르다. 나는 화가 났다.
삼자가 생각하는 타자 평가. 그것은 방향이 어느 쪽이든 위험하다. 맞장구를 치는 순간 권력관계가 형성된다. 당장은 한쪽 욕을 하며 박수를 짝짝 치고, 깔깔대며 연대하는 것이 힘이 생긴 것 같아 의지가 되는 것도 같다. 그렇지만 푸코에 의하면, 권력 형성은 소외와 궤가 같다. 만남 이후에 남는 것은 초췌하게 헐뜯어진 타자. 혹은 공허하게 떨어져 나온 자신뿐이다.
이와 반대로 타자가 자신이 되는 순간, 그것은 더 말할 것도 없이 허무하다.
"그 사람이 당신을 이러이러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알고 있죠?"
이것은 독이다.
만약 '이 평가'가 사실이고, 듣는 이가 그것을 익히 알고 있다고 하자. 그렇다고 달라지는 것은 없다. 만약 당신이 운이 좋다면 좋게 넘어갈 것이다. 최악의 경우는 술잔을 꽉 쥐며 "무엇이 어째, 이 새끼야?" 소리를 듣는 정도겠지.
이번에는 전말을 모르는 경우. 그러니까, 어제의 나와 같은 경우다. 이럴 경우 대상은 이제 의심을 시작한다. 가장 먼저 '그 사람이 정말 나랑 잘 안 맞나?'부터 확인해야 한다. 삼자의 평가가 사실인지부터 의심을 갖게 된다. 만약 확인이 필요한 일이라면 그렇게 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고, 삼자의 말을 무조건 믿는 경우, 이간질은 대-성공이다.
만약 어제 일처럼 사실 여부를 확인하기 껄끄러운 상황이라면 어떨까. 나는 어떤 합리적 의심을 끊임없이 해야만 한다. 삼자의 평가가 '팩트'인지 끊임없이 실험하는 것이다. 나를 대하는 태도, 모습, 메신저, 소셜 미디어 속 그 사람의 이미지 등. 친교의 정서가 '나만 가지고 있는 비참한 짝사랑'인지 자동으로 자기 검열에 들어간다. 수동 모드 몇 개도 필요할 것이다.
어찌 됐건 한숨부터 나는 것은 사실이다. 책상을 딱딱거리며 두드리다가 결론이 나기까지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내가 선택한 길은 사자의 허튼소리를 경청한 내 귀를 질책하고, 씻는 것.
나는 그 날 오프라인 모임엔 적당히 보조를 맞추며 실실 댔고, 다음날 새벽 즈음 전체 채팅방을 나왔다.
이후 나의 태도는 두 가지로 갈렸다.
첫째로 나는 교수를 의심하지 않기로 다짐했다. 그렇지만 이것은 다짐이지, 내 본능이 아니다. 아마 일 년 안쪽으로 내가 그 교수와 만나서 대화를 나눌 일이 있다면 나는 분명 무의식적으로 그를 검열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일단 나는 그가 나와 어색한지, 잘 안 맞는지, 그리고 그것을 이 친구에게 말을 했는지 진위 여부를 따지지 않기로 했다. 그것이 진실이라면 언젠가는 드러나게 될 것이고, 그때 마음아파해도 늦지 않다. 삼자를 의심하지 않는 것이 내가 지켜야 하는 마지막 선이다.
두 번째로 말을 전한 친구와 더 이상 엮이지 않아야겠다고 다짐했다. 그 날 내가 웃으면서 하는 모든 말이 어디서 어떤 더러운 말로 재생산됐을지 알 수 없다는 생각에 몇 번을 자다 깼다. 그 사람의 입으로 다시 태어난 내가 어찌나 불결하였는지. 나의 입을 단속하는 편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어제 자리가 꼭 아픈 교훈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세상에 원래 나쁜 이는 없어." 자리에 있던 다른 누가 말했다.
그래. 맞네.
그냥 나는 이간질이 병적으로 피곤한 것이고, 너는 원래 그렇게 나쁜 의도는 아니었던 것이고, 나는 선한 외모로 뱉는 너의 말이 상종하기 싫을 정도로 알러지가 나는 것. 그것이 전부다.
어쨌거나 나는 이간질하는 사람과 상종하지 않는다. 나에게 인간관계는 어디까지나 일대일이다. 없는 의심을 사게 하는 자의 모가지를 쳐 버리는 건 <왕좌의 게임>에서나 가능하니, 피곤할 일을 만들지 않는 게 나의 평화를 지키는 최선이다.
끝으로 이것이 아주 효율적으로 필요한 곳이 어딜까 고민해보았다. 그곳은 바로 정치판과 상속 판이다. 없는 의심을 만들고, 판단을 흐리게 하여 원하는 것을 취득하는 곳. 이것을 아는 정치 9단은 가볍게 가면을 바꾼다. 꿋꿋이 웃으며 다음을 말한다. 멀리 보는 거다. 다분히 정치적이다. 흔히들 소름이 끼친다고 댓글을 남기지.
그렇지 않은 곳. 그러니까 일상에서 이것이 쓰일 때는 거의 없다. 이것이 존재하는 모임 판 위에는 개인의 알량한 만족뿐이 없는 경우가 많다. 이번 일도 사자의 알량한 정보 우위를 확인시키는 것으로 사건을 매듭지었다. 기분이 나아지는 것은 아니지만 어쩌겠나. 부적절한 자리에 귀를 대고 있던 나의 문제다.
생각해보면 내가 좋아하고, 존경하는 어른들은 어디서도 타자의 말을 전하지 않았다. 그것이 좋은 일 일 때도 그랬다. 나중에야 그 사실을 알게 될 때, "왜 그때 말씀 안 해주셨어요?"하고 조르곤 했었는데, 그분들께서는 한결같이 "그 사람이 너에 대해 그리 평가를 하고 있다면, 지금처럼 언젠가 귀에 들겠었겠지ㅎㅎ"하고 웃었다. 그때는 이것이 노화로 인한 느린 반응을 변명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이것은 빠른 뉴런 반응만큼 어린 생각이었다.
앞으로는 <원래 그런 의도는 아니었다> 혹은 <그럴 아이가 아니다>-같은 더럽고 추잡한 변명이 기대된다. 그럼에도 만약 사전이 있다면 이것은 <당신도 할 수 있다!: 사과, 만국 공통-유니버설-병신 같은 사과문 클리셰>에 가장 먼저 등재될 것이니. 키치한 것을 즐기는 나로서는 이것도 그런대로 재미진 일이다.
회상만으로도 혀 아래에서 독이 돋아나는 기분이니, 일기는 이쯤 하는 게 좋겠다.
모쪼록 이간질은 좋지 않으니 잇님들께서는 이런 황당한 일을 조심하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