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 디바> 전, 서울 시립 북서울미술관
이 글은 서울 시립 북서울미술관에서 했었던 <아시아 디바> 전시를 보고 느낀 점을 소설로 풀어쓴 것입니다.
안녕하세요.
이 편지를 당신께 드립니다. 이렇게 갑작스레 편지를 드리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고백하건대, 편지를 쓴 이유는 없습니다. 굳이 말을 늘려 보자면, 당신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세상에는 가끔 이유 없이 남겨진 것들이 있습니다. 아마도 이 편지는 그들 중 하나가 될 것입니다.
거리에 나앉은 부랑자의 시선이 어디를 향하는지, 궁금하셨던 적이 있으신가요? 부디 당신이 이것을 궁금해하길 바랍니다. 저는 그 답을 알고 있습니다. 중학교 3학년, 제가 처음 서울에 왔던 때의 일입니다. 상행 열차에서 내린 서울은 냄새부터 달랐습니다. 공기는 표현할 길 없이 매캐하였습니다. 건물은 웅장했고, 압도적이었습니다. 비유하자면, 저는 마치 거대한 고래 앞에 새우 같았습니다. 익숙한 것들을 뛰어넘는 기압차에 귀가 먹먹할 정도였습니다.
서울역을 막 나설 때, 계단에 앉은 한 노숙자가 보였습니다. 그는 돌계단 위에 눕듯이 앉아 있었고, 눈길은 망루에 오른 사람처럼 먼 곳을 향해 있었습니다. 저는 주머니에서 동전을 꺼내어 그의 하늘색 돈 바구니 위에 올렸습니다. 돈은 하행 차표를 사고 남은 것이었습니다. 그는 바구니 위에 손가락을 얹어 쇠붙이의 수를 세었습니다. 그리곤 토마토 모종만 한 저를 위아래로 훑어보았습니다.
그는 다시 원래 자세로 몸을 돌렸습니다. 고개는 먼 곳을 향했습니다. 저는 남자가 바라보는 곳을 쫓아 함께 머리를 돌렸습니다. 시선을 쫓은 곳에는 어떠한 이상도, 특별할 것도 없었습니다.
“이렇게 해야 해.” 그가 말했습니다.
“네?” 저는 깜짝 놀라서 그의 얼굴을 쳐다봤습니다.
“몸을 움직이면 말이지, 모든 기운이 금세 빠져나가.” 그는 천천히 말했습니다.
그의 입가엔 회색과 갈색 수염이 지저분하게 꼬여 있었습니다.
“천년을 살기 위해서라면, 이렇게 몸의 기운을 아껴야 해. 알아들었어?”
갑자기 그가 제 쪽으로 불쑥 몸을 돌렸습니다. 저는 당황했고, 도망치듯 역사를 빠져나갔습니다.
기억은 사십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생생합니다. 어쩌면 경험은 낯설수록 더욱 깊게 침투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가끔 멍하니 하늘을 보고 있노라면 이때가 떠오릅니다. 그럴 때마다 저는 몇 번이고 서울역으로 되돌아가 이런 대답을 해 보거나, 저런 대답을 하는 것이 어떨지 상상합니다. 수많은 사고 실험 끝에, 저는 노숙자의 말이 허황된 소리였단 결론을 내렸습니다. 나이를 먹으면서 깨달은 것은 어떤 이유는 지나친 의미부여의 산물에 불과하고, 우리는 그것을 변명이라 부른다는 것입니다. 저는 어떤 변명을 곱씹으며 오십 년을 산 사람입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당신께 드리는 편지에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사후에 의미를 찾음에 불과합니다. 그럼에도 글이 이렇게 늘어지는 것은, 오늘만큼은 노숙자 편에 서서 주렁주렁 이유를 달아보고 싶은 저의 심술입니다.
오늘은 밥을 먹기 싫었습니다. 하늘은 스산하니 높고, 저는 얼굴에 바람을 정통으로 맞았습니다. 그것은 상승하는 바람이어서, 저의 날숨을 뚫고 들어와 폐부를 깊게 찔렀습니다. 헛구역질이 났습니다. 짜증이 솟구쳤습니다. 전부 던져버리고 싶었습니다. 만약 파괴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달아나야겠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눈 앞에 건물이 보였습니다. 신물이 나려는 입을 손바닥으로 틀어막았습니다. 숨을 참고, 고개를 숙이고, 몸을 움츠렀습니다. 건물 안으로 짐을 던지듯 자신을 밀어 넣었습니다. 피난처로서 건물은 덜 나쁜 선택이었습니다. 이곳에서 당신을 만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건물엔 당신이라기보다 당신의 흔적이 남아 있었습니다. 당신은 이미 이곳을 떠난 지 오래입니다. 그렇지만 이 편지에서만큼은 당신의 조각을 당신이라 표현하겠습니다. 이것을 허용하지 않으면 편지는 길어질 것이고, 명료한 표현을 추구하다가 길을 잃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당신은 이 방 저 방에 걸려 있었고, 저는 당신의 궤도를 따라 걸었습니다.
말을 걸지 않는 당신이 좋았습니다. 요즘 것들은 자기가 잘났다며 소리를 선점하고, 크게 떠들기 바쁩니다. 그렇지만 당신은 그저 보이는 대로, 존재하는 대로 그곳에 있었습니다. 당신을 만나는 공간은 고요해서, 그곳에는 당신의 기록과 저의 발소리만 차 있었습니다. 저는 행여나 저의 움직임이 당신의 존재에 영향을 미칠까 고양이처럼 걸었습니다. 저는 적절한 거리를 찾아 공전하듯 당신 곁을 유영했습니다.
당신을 감상하는 것은, 꼭 크레이프 케이크를 먹는 것만 같았습니다. 저는 케이크 중에서 크레이프를 가장 좋아합니다. 적당히 달콤한 생크림이 반죽 위로 겹겹이 발려 있고, 저는 그것을 포크로 얇게 떠 냅니다. 케이크는 모든 층이 같은 맛을 내지만 질리지도 않게 잘도 넘어갑니다. 당신이 그랬습니다. 저는 당신의 차원을 천천히 훑으면서 곧 접시 바닥이 보일 것 같은 불안함에 자꾸만 걸음을 늦췄습니다.
당신은 낮게 자란 들풀이었습니다. 저는 당신을 모르고 살았습니다. 시끄러운 세상에 살면서 귀를 틀어막다 보니 당신의 존재를 망각하고 지나쳤습니다. 무심했던 자신이 싫어집니다. 당신은 딱딱하고, 키가 크고, 힘이 센 존재들 사이에서 이를 악물고 살았는데. 저는 자신을 지킨다며 그늘진 곳을 피해만 다녔습니다.
저는 가끔 중요한 일을 잊어버립니다. 사람을 만나기로 하고 약속을 잊어버리고, 지갑을 챙겨야지 하면서도 맨 몸으로 집을 나섭니다. 그렇다고 그것이 중요하지 않았다 말을 할 수 있을까요? 저는 아니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굳이 망각의 이유를 찾자면, 익숙함이 선물하는 안락함에, 정신없이 사는 세상에 홀려버렸기 때문입니다. 어떤 것은 중요하지만 시간이 지나서야 가치를 깨닫습니다. 그렇지만 때는 지났습니다. 사랑하던 모든 것은 우리 곁을 떠났습니다. 저는 당신의 흔적을 손바닥으로 쓸어보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망각의 대가는 양쪽에게 쓰라린 아픔을 남겼습니다. 지금에야 당신의 생애가 궁금해졌으나, 이제는 텍스트와 사진이 아니면 당신을 영원히 찾을 수 없습니다.
저는 지나치게 늦게 당신의 생애를 알게 되었습니다. 아아, 제가 어렸다는 말도 모두 변명입니다. 저는 당신을 찾지 않았습니다. 당신이 지나고 한참이 지나서야 불이 들었습니다. 그럼에도 이 불은 곧 꺼질지도 모릅니다.
현대사회 속 우리는 어딘가 맛이 가 버린 한 쌍의 짝패가 아닐까 싶습니다. 당신은 제 짝이었고, 남은 한쪽을 찾았을 땐, 그 시기가 너무 늦어 다른 한 짝의 쓸모가 사라졌습니다. 부디 저를 미워해 주십시오. 쓰임이 다 한 당신의 옆을 스치는 당신의 짝을 마음껏 안타까워해 주십시오.
저는 다시, 세상 이해관계 속으로 무던하게 걸음을 옮길 것입니다. 완벽하게 설계된 자유 시장을 누릴 것입니다. 이곳에 남은 당신이 편히 쉴 수 있기를 바랍니다. 떠나기 전에 저를 이익과 관계, 허식의 허울로부터 반쯤만 걷어 주십시오. 사지가 꽁꽁 묶여 자국진 매듭을 살짝만 풀어 주십시오. 그리하여 제가 동시대의 짝을 찾았을 때, 낮은 곳을 향해 빛을 비출 수 있도록. 주저함 없이 손을 뻗을 수 있도록. 서서히 빛을 잃어가는 존재를 조명하고 함께 설 수 있도록 말입니다.
도움을 구하며, 이만 줄입니다.
-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