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소고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고 Feb 07. 2016

선생 이야기

타인과 이별하기

중학교 2학년, 여름방학이었다.

가만히 있어도 땀이 흐르는 계절, 나와 내 친구 둘은 배드민턴 라켓을 챙겨 들고 동네에 있는 배드민턴 연습장으로 향했다. 일주일 뒤에 있을 수행평가 때문이었다. 두 녀석은 모두 나와 다른 중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한 녀석은 과일집 아들이요, 다른 한 녀석은 집에서 피아노 과외를 하는 집 아들이었다.


중학교 시절 나는 참 지기 싫어하는 아이였다. 승부욕 때문에 공부도 곧잘 했다. 가만히 있어도 땀이 삐질삐질 솟아오르는 날씨에 친구 둘을 꼬셔다가 기어이 셔틀콕을 치는 이유였다.


한 십 분이나 쳤을까? 입구 쪽을 향해 서 있던 과일집 친구가 갑자기 고개를 숙여 꾸벅 인사를 한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어, 그래. 배드민턴 치러 왔니?” 인사를 받은 중년 남자가 내 친구를 바라보며 말했다.


나는 인사를 받은 그 대상이 과일 집 손님이고, ‘선생님’이란 표현은 그저 존칭으로 사용했겠거니 생각했다. 서 있는 자리에서 눈을 끔뻑거리며 서 있을 뿐 이었다. 그러자 중년 남자는 멀뚱히 있는 나와 피아노 집 친구를 번갈아 바라보며 눈을 흘겼다. 머지않아 그는 아이들이 아직 어려서 그럴 수 있다는 듯, 표정을 누그러뜨리며 자신을 소개했다.

“얘들아 안녕? 나는 이 근처 OO고등학교 사회 선생이야.” 남자가 말했다.

선생은 자신을 소개할 때 본인의 이름을 말하진 않았다. 그러나 그가 재직하고 있는 OO고등학교는 근처 남자 중학생이라면  십중팔구가 진학하는 학교였다. 때문에 그의 발언은 자신이 꽤나 높은 확률로 몇 년 사이에 마주칠 수 있는 존재임을 시사했다. 그리고 그는 무엇보다도 우리에게 인사 예절을 가르치고 싶은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와 내 친구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우리는 넙죽 고개를 숙였다.

“응 그래. 반갑다. 재밌게 치다 가거라.” 

그는 모호한 미소를 띠며 인사를 받았다. 이내 다른 코트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이것이 나와 A선생의 첫 만남이었다.


2년 뒤, 나는 (당연하게도) OO 고등학교로 진학했다. 물론 2, 3 지망은 다른 학교를 쓰긴 했지만 이 동네 행정권에서 배정될 수 있는 학교는 OO 고등학교뿐이었다. 과일집 친구와 피아노 집 친구 역시 OO 고등학교로 배치를 받았다. 나는 과일집 친구와 같은 반이 되었다. A선생의 존재는 2년이라는 시간과 새로운 세계에서 강해 보여야 한다는 강박 속에 자연스럽게 희석됐다.

새 학교 새 반에서 얼마나 떠들었을까. 교문이 드르륵 열렸다. 

A선생 이었다. 선생은 배드민턴장에서 봤었던 큰 보폭으로 성큼성큼 교단을 올랐다. 교단에 올라 스윽 한번 아이들을 훑는 선생. 아이들은 언제 그렇게 그랬냐는 듯 선생의 눈길을 피했다. 그 시선이 앞자리에 앉은 내게로 날아왔다.


“어이, S군? 이렇게 만날 줄 몰랐지?” 그는 공개적으로 내 이름을 불렀다. 입가엔 미소가 만연해 있었다.

A선생은 웃을 때 짓궂은 소년 같았다. 눈빛은 반짝거렸고, 입꼬리는 정말로 행복하다는 듯 광대 끝에 올라가 걸려있었다. 교단에서 십여 년을 사내들과 해댄 세월이  가져다준 여유였다. 그는 ‘니들이 3년 동안 무슨 상상, 무슨 짓을 해도 다 내 손바닥 안이다’라는 눈빛을 보냈다. 손오공을 손바닥 위에 올려 놓은 부처님의 미소가 이렇게 여유로울까. 그는 긴장한 표정과 센 척이 반반 섞여 있는 아이들의 눈빛에 확신에 찬 모습으로 무언의 선언을 하고 있었다.


A선생과의 학교 생활이 시작됐다. 


그는 매를 아끼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는 시퍼렇게 멍 자국이 올라올 때까지 극악무도하게 학생을 채벌 하는 선생은 아니었다. 그러나, 본인의 다리 길이 정도로 겅중 잘라낸 노란색 PVC 몽둥이(우리들은 이 몽둥이를 단무지라고 불렀다)를 분신처럼 들고 다니며 아이들을 훈육했다. 그는 교과서는 놓고 다녀도 '단무지' 만큼은 떼어 놓지 않았다. 그는 단무지로 아이들의 몸을 마사지했다. 폭력과 지도 편달 사이, 딱 불쾌할 정도의 강도였다.


우리 반에서 가장 적게 맞은 친구가 1년 사이에 50대 정도를 맞은 것 같다. 그는 지각에도 단무지를 들었고, 수업 중 나른함을 이기지 못한 친구에게도 마사지를 선사했다.

그 세기가 딱 적당했기에 (물론 맞을 땐 많이 따갑고 아프다) 아이들은 그것을 폭력이라 생각지 않았고, 어느 정도 자신이 잘못한 것에 대해 수긍하며 채벌을 순순히 받아들이곤 했다. 무엇보다 그의 채벌이 아이들에게 반감을 사지 않았던 이유는, 그가 공부를 잘하는 친구들과 소위 말하는 '일진'들을 편애하며 훈육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일진 친구도 지각하면 다섯 대. 우리 반 일등도 지각하면 다섯 대였다. 모의고사 성적이 떨어져서 매를 맞게 될 때에도, 그는 학생들이 스스로 설정한 목표보다 떨어진 만큼만 엉덩이를 때렸다. 그는 자신이 세운 목표를 달성한 녀석들은 건드리지 않았다. 그것이 맞기 싫어서 부린 잔꾀든 그것이 아니든 간에, 그는 학생들이 약속한 자신의 모습을 벗어난 경우에만 단무지를 휘둘렀다.


그가 언젠가 종례시간에 담배를 피우는 녀석들 이름을 주르륵 읊었다.

“C, D, E 그리고 F. 니들 담배 피우지?” A선생이 빙글빙글 웃으며 공개적으로 물었다.

녀석들은 서로 알듯 말듯한 눈빛을 교환하다가 해봐야 통하지 않는 거짓말임을 이내 눈치채곤 들어가는 목소리로 그렇다고 자백했다.

“다른 선생 눈에 걸리지 말고, 성장기에 키 안 크니까 적당히 해라. 이상 종례 끝.”


A선생은 이런 사람이었다. 쿨했다. 그렇다고 아이들을 방관하거나 훈육을 귀찮아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돌고 돌아 들은 소문에 의하면 담배를 피우던 친구가 시내에서 흡연을 하며 걷던 중 A선생을 만난 적이 있었단다. 고개를 얼른 돌렸지만 그는 빙글빙글 미소를 띠며 그 친구를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단다. 친구는 도망쳤지만, 며칠 뒤 A선생이 자신을 따로 불렀다고 했다.


“맞고 싶은 대수를 말해.” A선생이 말했다.


그 친구는 순순히 엉덩이를 댔고, 몇 대를 맞았는지는 소문이 밝혀내지 못한 부분이었다. 그러나 체육복을 갈아입던 중, 그 친구의 허벅지 위로 새파랗게 주룩주룩 그어진 줄무늬를 보며, 우리는 그 소문이 사실임을 암암리에 확인할 수 있었다.


A선생은 공부를 하는 친구들에게도 무심하지 않았다. 사립 고등학교 교무실에는 으레 학습지 외판원들이 샘플로 두고 간 공짜 문제집들이 쌓여 있었다. 그는 그런 문제집들 중 도움이 된다 싶은 녀석들을 추려 공부를 하는 애들에게 툭툭 던져주곤 했다. 여기서 공부를 하는 아이들이란, 공부를  잘하는 아이들 뿐만 아니라, 성적은 조금 떨어지지만 노력을 멈추지 않는 성실한 아이들을 포함하는 말이다. 보통 지방 사립고 선생이란 실적 때문에 성적이 어느 정도 되는 녀석들/부잣집 자식들을 뽑아 특히 예뻐하곤 하는데, 그는 잘하고 돈 많은 집 자식들보다 노력하는 아이들에게 눈길을 돌렸다.




여기까지가 그의 성격을 설명하기 위한 수준의 에피소드인 것 같다. 

그는 내게 각별한 사람이었다. 나에게 A선생은 담임선생님 또는 사회 선생님이라기보단 배드민턴을 치는 아저씨 이미지였다. 나는 그를 스승이라고 생각하기보단, 내 학습을 지도해주는 ‘동네 아저씨’ 정도로 생각했다. 이것이 '선생님'보다 가까운 표현 인지는 잘 모르겠다. 어쨌든 그 '아저씨'는 내게 가까운 존재였으며, 가끔 몽둥이로 때리고, 네가 하는 일은 다 내 손바닥 안이지.라는 표정으로 빙글빙글 웃는 모습으로 남아 있었다.

A 선생의 최근 소식을 듣게 된 것은 스물일곱에 나간 반창회 치킨집에서였다.

OO고등학교를 졸업한 후부터 스물일곱 사이에 나는 군대를 다녀왔다. 7년이라는 시간이 흐르는 동안 학교 근처에 살던 우리 가족은 다른 동네로 이사를 했고, 나는 서울로 대학을 다녔다. 간간이 고향에 가곤 했으나, 고향집은 OO 고등학교와는 먼 곳에 이사를 했고, 학창시절 고3 담임선생과 한차례 진하게 성장통을 겪어낸 탓에 일부러 학교를 찾아가는 일은 없었다. OO 고등학교에서 내가 남긴 것은 친구와 수능 성적 뿐이라고 생각하며 살고 있었다.

그런데 한 친구 입에서 예기치 않게  A선생의 소식을 들었다.

“그거 알아? A선생 학교 그만뒀어.” 

친구가 말했다.


“정말이야? 왜? 사고 쳤어?” 

나는 반사적으로 물었다. 

OO 고등학교에서 선생이 일을 그만둔다는 사실이 이상했기 때문이다. 이 학교는 그런 곳이었다. 그 학교 선생이 되기 위해서는 이사진과 학교 발전기금 기부금을 조정해야 했다. 또한 정년이 지난 선생들 중 몇몇은 이사실을 거치면 도서관 관리, 컴퓨터실 관리 등의 되곤 했다. 그런데 이런 고등학교에서, 그것도 정년도 까마득한 선생이 퇴직이라니. 무언가 이상했다.

놀란 내 얼굴을 보고 다른 친구가 말했다.
“몰랐어? A 선생 학교 그만둔 거 소문 꽤 크게 났었는데.” 



“진짜? 왜?” 

나는 다시 한 번 물었다.


“나도 정확히는 모르는데, 그 선생. 자기 가정 버리고 바람났다나 봐.” 

친구가 말했다.


처음 화두를 꺼냈던 친구가 앞의 말을 이어받는다. 
“듣기로는 한 학생 학부모랑 그랬다는데? 과부. 그러니까 편부모인 학생 어머니랑 그랬다고 하더라.”


나를 제외한 다른 친구들은 이미 이 이야기를 알고 있었던 것 같다. 나는 'A 아저씨’의 이야기를 멍하니 듣고 있었다. 그들에게 'A 아저씨'는 지나가는 가십거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의 수업을 듣지 않았거나 그와 인연이 별로 없던 친구들이었다.

나는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바람을 피우는 사람' 그러니까 객관화된 삼자. 그 사람은 나쁜 사람이다. 나는 그것을 머리로는 분명히 인지하고 있다. 바람피운 사람은 사람 이하, 그러니까 ‘무슨무슨 동물의 새끼’라는 말로도 모자랄 만큼 파렴치한 존재라고 학습하며 자랐다. 주입식 사고에서 벗어나 자주적으로 대어 봐도, 그런 년/놈들은 가정을 파괴하는 천하의 파렴치범들이다. 그런데 나는 왜 이렇게 멍하며, 당연한 악을 받아들이는데 시간이 걸리는 것일까. 왜  스물일곱의 청년 인생에 바람 피다 인생을 망친 첫 지인이 A선생인 것일까. 생각을 멈출 수 없었다.

나의 배드민턴 선생이었던 A 아저씨가 악(惡)이라니. 지금 돌아봐도 아마 조금 놀랐던 것 같다.

나중에, 정말 나중에 고향에 내려가면 ‘그에게 만큼은 안부를 여쭈러 가야지’ 하고 생각하던 나였다. 그런 내게 돌아온 소식이란 그는 도덕적으로 옳지 않은 행동을 한 사람이며, 그를 만나면 부정한 사람으로 소문이 날 수도 있다는 친구들의 조언이었다.

그와 보낸 나의 학창 시절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불장난이 대체 뭐길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긴, 그는 남자가 봐도 매력적인 중년이긴 했다. 살면서 그런 유혹이 그를 비껴갈 거란 생각은 안 드는 분위기의 사람이였다. 다만 내가 그를 예단하지 못했던 것이 있다면, 그는 '선생'이기 때문에 유혹을 떨쳐낼 것이다-라고 굳게 믿는 것 이었다. 사건이 터지기 이전에 누군가가 그에 대해 이러한 물음을 던졌더라면, 아마도 나는 "그는 바람을 피지 않을 거야." 또는 "그는 바람을 필 거야."하는 사이에서 답을 내리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그의 결정에 조금 놀랐다.

왁자지껄한 술자리에서 잠시 떨어져 나왔다. 새벽 공기를 쐬며 잠시 생각을 정리했다. 그리고 A 선생이 바람을 피우는 선택을 했고, 그것이 이 자리의 5분짜리 가십 거리였음을 인지하게 됐을 때. 나는 그를 마음속에서 영영 떠나보냈다. 나는 오슬오슬 떨리는 양 팔을 부여 잡고, 다시 한 번 가게 안으로 몸을 밀어넣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