_우리 엄마와 일본 엄마
인간이란 참 재미있다. 영하권의 동장군이 찾아온 날, 창 안으로 들이치는 따스해 보이는 햇살을 바라보며 나는 따뜻했던 어느 봄날을 떠올리고 있었다.
...
엄마는 난생 처음으로 일본 땅을 밟았다. 공항으로 마중 나온 일본 엄마와의 재회는 4년 전 서울에서 이후 처음이었다. 그렇게 치면 일본 아빠와 다시 만난 건 거의 20년 만의 일이었다. 나 또한 오랜 만에 일본으로 돌아간 것이었다. 언제 가도 익숙한 일본 집에 짐을 풀고 있자니 나의 일본 아줌마 친구들이 정체가 궁금했던 우리 엄마를 보겠다는 핑계로 모여들었다.
그동안 일본의 집에는 몇 가지 변화가 있었다. 가장 큰 변화는 ‘북쪽의 산’이라는 애칭을 가진 정원을 아주 깔끔하게 정비한 일이다. 그 사업(?)의 일환으로 연못에 방치되어 있던 다실을 깔끔하게 새로 만들었다. 전에는 놀러갈 때마다 저 연못 위의 작은 집에 괴물이 살아서 매일 밤 몰래 밥을 가져다주는 것 아니냐며 일본 엄마를 놀리곤 했는데.
사람들과 새로운 다실에서 차를 마실 거라는 그녀의 말에 “괴물이 살던 집에 차 마시러 가는 거예요?” 하고 묻자 이미 내 농담을 아는 친구들이 모두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말쑥하게 정비된 봄의 정원은 아름다웠다. 예쁜 꽃들이 피어 있었고 일본 아빠는 죽순 수확에 분주했다. 정겨운 돌길을 따라 도착해서 조심스럽게 들어간 다실은 깔끔하게 정리되어 반짝거리는 기운마저 감돌았다. 한쪽에는 작은 공간이 있어 그릇과 차 관련 물건들을 보관하고 물을 받거나 사용한 다기들을 씻을 수 있게 해두었다. 그 외에도 사람들이 둘러앉아 차를 마실 수 있는 공간과 회랑 같은 작은 공간이 또 있었다. 커다란 유리창 밖으로는 연못과 정원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앞에 책을 쌓아놓고 옆에 있는 소파에 앉아 종일 책만 읽어도 지겹지 않을 것 같았다.
작지만 알찬 공간이었다.
창밖으로는 조금 전까지 죽순 수확에 바쁘던 아빠가 다리 한가운데 서서 잉어들에게 먹이를 주는 모습이 포착됐다. 연못 위로 뻐끔거리는 잉어들의 입 크기에 놀랐다. 커다란 잉어들이 그렇게 많이 산다는 걸 처음으로 목격했기 때문이다. 마침내 아빠까지 착석하자 차 마시는 시간이 돌아왔다. 간소하나마 정해진 규칙이 있는 일본의 다도의 정신과 순서를 지키기 위해 방금 전까지 큰 소리로 웃으며 느긋했던 사람들 모두 정갈히 무릎을 꿇고 앉았다. 이윽고 팽주(찻자리를 관장하는 사람)가 다식을 건네고 인사를 했다. 앞쪽으로 돌아간 팽주는 손잡이가 기다란 물 뜨는 도구로 차완을 예열하고 말차를 넣은 뒤 뜨거운 물을 붓고 절도 있는 모습으로 차에 거품을 냈다. 그 사이 손님들은 다식을 먹었다. 이윽고 팽주가 손님들에게 깍듯이 인사하며 차완을 건넸다. 받는 손님 역시 깍듯이 인사하고 받은 차완을 감상한 뒤 손으로 돌려 정면을 피해서 차를 마신다. 팽주는 차완을 장식한 그림의 의미를 설명해준다. 나에게는 꽤 익숙한 모습이었지만 이 모든 과정이 처음이라 마냥 신기했던 엄마는 눈이 동그래졌다.
호기심에 가득 찬 모습을 본 일본 엄마가 우리 엄마에게 팽주를 해보지 않겠느냐고 제안했다. 모두가 침착하고 친절하게 새로운 팽주에게 역할을 가르쳐주기 시작했다. 덕분에 다실의 모든 사람들이 차를 마실 수 있게 됐다.
예의를 갖췄던 찻자리를 정리한 뒤에는 다리를 풀고 편하게 앉아 이런저런 담소를 나누며 정원의 봄을 만끽했다. 며칠 전에 공수해왔다는 신차를 봄의 빛깔이 어울리는 찻잔에 마셨다. 티푸드는 신록처럼 연둣빛을 띠는 별사탕이었다.
엄마는 몇 번이고 이곳에 오길 잘했다고, 너무나 특별하고 좋은 시간이라고, 정원이 참 예쁘다고 말했다.
그녀의 활짝 웃는 얼굴이 그저 보기 좋았다.
어쩌면 이런 것들이 내가 차를 사랑하는 이유가 아닐까.
...
그날의 미소와 웃음소리를 추억하며 늘어진 겨울 오후의 햇살을 받으며 차를 홀짝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