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람브라의 추억보다 더 아름다운
나는 사람을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아 그 사람이 어떤 성격을 가진 사람인지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건 바로 내가 구제불능의 방향치이기 때문이다.
구면이든 초면이든 중요한 만남이든 하찮은 만남이든 나의 이 초자아적 능력은 금세 발휘되곤 한다.
그렇게 해서 내가 상대에 대해서 파악하게 되는 성격은 몇 가지로 나뉠 수 있다.
1. 각종 훌륭한 길찾기 앱도 모르냐고 다짜고짜 면박부터 주는 부류는 성격이 급하고 인내심이 적은 편이다.
정말 너무나도 미안하지만 나는 그 앱을 켜고 파란 점이 움직이는 걸 보며 가면서도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버리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도대체 내가 왜 이쪽으로 가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면서. 왜 나는 목적지인 빨간점과 엇나간 방향으로 가고 있는가 땀을 삐질삐질 흘리면서.
2. 조심해서 오라고 말하지만 복화술로 말하는 '이번 한 번은 참아준다'가 들리는 경우가 가장 일반적.
사실 나는 그래서 약속 장소가 낯선 곳에 정해지면 그리고 중요한 일이면 반드시 최소 30분~1시간 정도 일찍 나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기 좋게 헤매다 늦는 경우가 다반사. 자주 가던 곳도 어느 때는 전혀 감각을 알 수 없어 헤매곤 하니까........솔직히 그래서 난 모르는 동네에서 약속을 잡는 것이 가장 무섭다.
3. 정말로 괜찮고 모든 것이 다 좋을 것이라고 믿는 낙천주의자들은 그 성정답게 인내심도 많다.
그들은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 같다. 특히 나의 오랜 친구들은 저런 인내심을 제대로 발휘해서 보여준다. 내가 시간을 맞춰 제때 나타나거나 헤매지 않고 찾아왔다고 하면 진심으로 깜짝 놀란다.
3번이야 드문 케이스니 제외하고 1, 2번의 부류는 나의 심각한 방향치 수준을 보고 놀라서 반드시 이렇게 되묻는다.
"님은 도대체 그런 방향감각으로 어떻게 여행을 다니세요?"
내가 홀로 여행을 선호하는 이유도 어쩌면 여기에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누군가와 함께 정해진 짧은 기간 안에 특정 범위의 지역을 여행하고 돌아가야 한다면 나는 그 여행을 상대에게 맡겨버린다. 어차피 내가 제대로 어디론가 최단시간에 일행을 데리고 갈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그간 나를 끌고(!) 다녀주신 모든 분들께 이 자리를 빌어 특별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혼자 여행을 떠나면 그런 걱정이 없다. 가난한 여행자인 나에게는 레스토랑의 평판이 중요하지 않았다. 맛집 방문은 사치일 뿐. 오직 가성비다. 현지인들이 바글거리는 동네의 작은 식당, 시장 속의 지저분해 보이는 가판, 우연히 만나게 된 친구의 어머니가 차려준 집밥 같은 것이 내 현지 방문 식당 목록에 오르기 마련이었다.
길을 잃어도 괜찮았다.
몇 번을 지나도 낯선 거리는 늘 신선하고 아름답게 느껴졌으니까.
그 날도 그런 날이었다.
나보다 먼저 그라나다라는 도시에서 지내본 적이 있던 누군가가 말해준 알람브라 궁전 뒷편에 있다는 소나무숲을 거닐고 싶어 나선 길. 전날 압도적으로 느꼈던 알람브라에서 받은 감동의 여운을 붙잡기 위해서였다.
분명 그 사람은 웅장한 소나무들이 나를 반길 거라 했지만 내가 발견한 건 비실비실해 보이는 몇 그루뿐.
하지만 참을성을 가지고 나아가보기로 했다.
사실 그 길은 참으로 아름다웠다.
투명하고 맑고 푸른 하늘에 선명한 초록빛 풀들이 바람 따라 물결치고 그 사이 한들거리는 봄꽃이 나를 반겼다.
무엇보다 사람으로 북적였던 알람브라와 달리 이 기막힌 풍경을 누리는 사람이 오직 나뿐이었다.
잠시 낙원에 홀로 남겨지는 호사를 누리는 기분을 아시는지.
한참 그곳을 폴짝이다가 어쩌면 나는 소나무숲에는 가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몰려와 잠시 침울해졌다가 눈을 들어보니 멀리 신비한 분위기에 휩싸인 건물이 보여 그곳을 목표로 삼고 걷기로 했다. 어차피 아무런 계획이 없는 하루였으니까.
뻬드로가 나타난 건 순식간이었다.
그의 검은개 뻬로가 먼저 나타났을 땐 정말 깜짝 놀랐다.
내가 두려움에 휩싸여 걸음을 멈추자 뻬드로가 괜찮다고 걱정하지 말라고 말을 걸어왔다.
우린 그때부터 길동무가 되었다. 누렁이 폴로도 함께였다. 나에게 어디를 가느냐 물었고 나는 저기 보이는 건물로 가고 싶다고 말했다. 뻬드로는 무언가 나에게 말해주고 싶어했지만 그는 영어라곤 코카콜라밖에 모르는 할아버지였다. 나의 스페인어도 딱히 다양하지 않았는데도 우리는 기이하게 말이 통하는 체험을 하며 길을 걸었다.
그는 이 근처에 사는 농부로 매일 뻬로와 이 길을 산책한다고 했다. 비가 와도 추워도 더워도 매일 나와 걷기에 나이가 70이 넘었지만 지금도 건강하다고, 매일 바에 들러 독주를 마시지만 거뜬하다며 너털웃음을 웃었다.
사실 그 길은 산 허리를 가로지르는 아주 좁은 오솔길이었다. 한 걸음만 옆으로 잘못 디뎌도 데굴데굴 굴러 어떻게 될지 모르는 그런 길이었다. 하지만 검둥개 뻬로와 누렁이 폴로, 시골 노인 뻬드로와 함께하는 그 길은 전혀 무섭지 않았다.
결론부터 말하면 긴 걸음 끝에 도착한 그 건물은 수도원이 맞는 것 같았고 역시 스페인어밖에 모르는 수도사가 일반에게 공개되는 날이 아니라고 해서 그냥 발걸음을 돌렸다. 아마 뻬드로가 내게 해주고 싶었던 말도 그거였던 것 같다. 수도사에게 고개를 끄덕이고 뒤 돌아보니 그들은 홀연히 사라지고 없었다.
한 시간도 넘게 걸어야 한다는 수도사의 걱정을 뒤로 하고 나는 다시 홀로 길을 나섰다. 불 켜진 알람브라의 근사한 야경을 감상하기 위해서였다. 무탈히 그곳에 도착해서는 끝내주는 풍경을 눈에 담았다. 우연히 전날 알람브라에서 만났던 다른 여행자를 만나 저녁을 먹었다. 바에서 타파스에 맥주를 한 잔 걸치고 있을 땐 낯선 사람이 다가와 다짜고짜 어딘지 짐작도 되지 않는 언어로 내게 말을 걸었는데 나의 눈이 동그래지자 이누이트족 아니었냐며 미안하다고 하더니 멀어졌다.
그라나다, 하면 참 많은 것들이 떠오르고 그중에서도 알람브라의 아름다움이 꽤 강렬한 인상으로 남았지만 가장 내 마음을 따뜻하게 채우는 미소를 짓게 하는 추억은 뻬드로, 뻬로, 폴로와 함께했던 그날의 기이한 산책이다.
그나저나 지금 사진을 다시 꺼내 봐도 '진짜 내가 저 길을 걸었다고?' 하는 생각이 든다. 아무리 나라도 혼자라면 걸을 수 없었을 후덜덜한 길이다.
어쩌면 홀연히 사라진 뻬드로와 뻬로와 폴로는 방향감각이라고는 1도 없는 어리버리한 여행자가 불쌍해서 잠시 하늘에서 내려온 수호천사였는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