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도록 가난하지만 여행은 떠나고 싶어_04

이토록 달콤한 카디스

by Snoopyholic


이 풍경을 마주했던 순간, 너와 함께 이 길을 걷는 상상을 했어.

그날은 토요일이고 우리의 하루는 침대에서 시작되었지.
부스스한 얼굴과 머리카락을 하고선 서로의 얼굴에, 어깨에 키스를 해주고 미소를 교환했어.
내가 게으름을 피우며 침대 위에서 뒹굴거리는 동안 너는 나를 위한 모닝 밀크티와 너를 위한 에스프레소를 만들었어.
침대로 그것들을 가져오며 슬쩍 오늘은 내가 만든 팬케이크가 먹고 싶다고 하는 거야.
그럼 나는 반쯤 감은 눈으로 밀크티를 홀짝이다가 잔이 비워질 즈음 부엌으로 가서 부스럭거리며 팬케이크를 만들겠지.

"메이플 시럽이 좋아? 누텔라 바나나가 좋아? 연유 듬뿍 태국 스타일로 해줄까? 아님 버터랑 꿀을 듬뿍 바른 모로코 팬케이크?"

넌 킬킬거리며 내 맘대로 하라고 할 거고 난 깔깔거리며 누텔라가 떨어졌으니 사오라고 말할 거고 넌 그제야

"그럼 오늘은 메이플시럽!"

라고 외치며 등 뒤에서 나를 와락 안아줄 거야. 그리곤 큼직한 오렌지 다섯 개를 반으로 잘라 두 잔의 오렌지주스를 만들겠지.



아침 설거지는 나중에 하기로 하고 난 움베르토 에코의 책을 다시 읽기 시작했고 넌 나 때문에 하루키를 읽기 시작했어.
우린 Four Play를 들을지 Chopin을 들을지 이도 저도 아니면 그냥 라디오를 들을지 티격태격하다가 Bach의 무반주 첼로 연주쯤에서 타협을 하고 독서를 이어가지. 어차피 그걸 다 들으면 다른 음악들도 결국 다 듣게 될 걸 왜 옥신각신 하는지....그런데 늘 뭘 먼저 들을지 그렇게 하게 되더라.



아무튼 두 시 정도가 되면 엉덩이도 아파서 들썩거리고 배도 슬슬 고픈 것 같아서 괜히 냉장고를 열었다 닫았다 해보지만 우리 둘 다 창의적인 요리 아이디어를 떠올리지 못하고 결국은 이런 저런 풀떼기들과 각종 치즈를 꺼내놓고 어젯밤에 사다 냉동실에 넣어둔 빵들을 몇 덩이 꺼내서 오븐에 따뜻하게 덥혀줘. 넌 하이네켄 다크를 마실 테고 난 네가 늘 맛에 비해 비싸다고 투덜거리는 제이콥스크릭 샤도네를 마실 테지.
천천히 눈앞의 음식을 먹으면서 여태까지 읽은 책 내용에 대해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오후의 햇살이 좋으니 산책을 나가기로 결정을 해.



푸르고 푸르른 하늘과 바다, 그 사이를 오가는 갈매기... 넌 갑자기 사진을 찍겠다고 하더니 저만치 앞으로 달려가고 난 그냥 분주한 너를 바라보며 천천히 걸어가지.

대성당 정도에 이르면 우리는 구시가로 들어가 광장으로 걸어가. 세 명 정도의 친구를 만나 30분씩 긴 인사를 나누고(그중 하나로부터는 내일 점심에 초대도 받았어) 겨우 도착한 광장에는 동네의 모든 꼬맹이들이 나와 뛰놀고 있었어. 게다가 다섯 커플 정도의 친구들을 만나 너는 슬금슬금 남자들과 휩쓸려 맥주를 마시러 가버렸지. 난 다른 여자들과 맛있는 아이스크림을 사다가 핥으며 그녀들의 수다를 들으며 웃어. 그러고 조금 있으면 얼굴이 반쯤 빨개진 네가 남자들과 어깨동무를 하고 돌아와. 알고 보니 내일 점심 때 다 만나게 됐어.
내일 만나자며 헤어지는 데 걸리는 시간도 30분.


내일 무슨 음식을 해서 갈지, 어떤 술을 들고 갈지, 저녁은 뭘 먹을지 이야기하며 다시 대성당 골목으로 나오며 모퉁이를 돌았는데 딱 저 풍경이 나타난 거야.

"너무 예쁘다, 그치?"
"자주 보는데 뭐가 그렇게 항상 예뻐? 난 네가 더 신기해."
"저 색깔을 봐, 정말 치명적으로 아름답지 않아?"


넌 대답 대신 음흉하게 웃으며 내 입술에 쪽, 키스를 해주었어.
조금은 시원한 바닷바람이 우리 볼을 스쳐지나갔고 미소도 스쳐지나가.
우린 손을 잡고 천천히 이 길을 걷기 시작했지.

그래, 이렇게 마치 네가 곁에 있는 것처럼 너와 함께 이 길을 걷는 상상을 했어.
하늘의 색깔이 너무 치명적이어서 나 혼자 여기에서 먹먹해지는 건 싫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