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도록 가난하지만 여행은 떠나고 싶어_05

경계하는 경계 도시

by Snoopyholic

적어도 주변 사람들 사이에서는 여행을 많이 다닌 것으로 꽤 알려졌기에 이따금 이런 질문을 받는다.


"네가 갔던 곳 중에서 가장 좋았던 곳은 어디야?"


한동안 나의 대답은 "스페인!(반드시 느낌표까지 붙어야 함)"으로 정해져 있었다.

그곳에 가게 되기 전까진......


사실 처음에는 그렇게까지 좋아하는 줄 몰랐다.

하지만 그곳에서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내 마음이 그곳을 향해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원래 계속 곁에 있으면 좋은 걸 모르는 연인과도 같은 느낌이랄지......

만약 누군가 이 글을 읽고 있다면 이쯤해서 궁금해졌을지도 모르겠다.


'도대체 거기가 어딘데?'


나의 '그곳'은 바로 모.로.코.


스페인이라는 대답을 들었을 때는 고개를 끄덕이던 사람들도 모로코라는 대답을 들으면 고개를 갸우뚱하며 나에게 되물었다.


"거기가 왜?"


처음에 내가 혼자 그곳으로 2주 동안 가 있겠다고 했을 때 나의 스페인 친구들의 반응도 비슷했다.


"모로코? 너처럼 자그마한 여자 혼자서?"


입 밖으로 꺼낸 적은 없지만 가지 말라고 혹은 일정을 조금만 줄일 수는 없느냐는 말을 입에 머금은 채 내 곁을 맴도는 걸 알 수 있었다.

대신 이런 말들을 나에게 건넸다.


"문화가 상당히 다른 곳이야."

"호객행위가 매우 집요하대."

"순진한 관광객들은 호구 되기 십상이라던데."

"넌 체구가 작은(그렇다, 한국에서 떡대인 나도 서양에서는 아담한 편에 속하는 것이다) 여자잖아. 절대 으슥한 곳에는 가지 마."



호기롭게 그곳을 루트에 넣긴 했지만 내 결정이 잘못된 것은 아닌지 자못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모로코로부터 다음 국가로 향하는 비행기표까지 사둔 상황이라서 더 생각이 많았다.

아예 일정을 대폭 줄여서 관광지 위주로 휘리릭 둘러보고 비행기만 타고 빠져나갈까 싶기도 했다.

그렇게 두려움이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날뛰던 중 이성이 무슨 소리냐고, 너의 기준에서 봤을 때 그런 건 관광이지 여행이 아니지 않느냐고, 인생이란 게 계획대로 되지 않는 것이긴 하지만 이번엔 좀 그대로 해보라며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둘은 한동안 기싸움을 하는 듯했는데 승자는 이성 쪽이었다.

나는 그렇게 친구의 배웅을 받으며 스페인의 타리파 항을 떠나 모로코의 탕헤르 항에 도착했다.



배를 타고 국경을 넘는 것이 처음이라 더 긴장이 됐던 것 같다.

입국심사에서 고압적으로 한국은 비자피가 없느냐 묻는 심사원(당신이 더 잘 알아야 하는 것 아닙니꽈? 라고 되묻고 싶었는데 참았다)에게 우리는 국가간에 협정을 맺어 면제라고 대답하고 'Sortie(프랑스어로 출구)'를 따라 겨우 빠져나오니 모로코였다.



배에서 내리자마자 수많은 호객꾼에게 둘러싸이는 걸 각오하고 눈 질끈 감고 나섰지만 분명 아까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 배에서 내렸는데 막상 밖으로 나오니 길을 물을 사람조차 보이지 않아 난감했다.

겨우 말을 걸 수 있는 사람에게 버스 터미널이 어디냐 물었고 그 사람은 친절하게 방향을 가리켰다.



쉐프샤오웬으로 가는 버스표를 사고 짐을 맡겼지만 그 버스가 출발하기까지는 적어도 두 시간이 남아 있었다.

별 것 없는 터미널에 멀뚱하게 앉아 있긴 싫어 밖으로 나왔다.

유럽과 가까워 이방인이 수없이 드나들었을 경계 도시이기에 이방인을 바라보는 시선이 관대할 줄 알았지만 오히려 날카로웠다.

특히 나의 카메라에 대해서는 매우 신경질적으로 대했다.

불이 들어왔던 내 마음의 경계 전구의 불빛도 강렬해졌다.

잔뜩 움추러들고 긴장한 채로 돌아다니니 목이 말라왔다.
오렌지 쥬스가 싸고 맛있다고 들었는데 구체적으로 얼마인지까지는 알지 못했으므로 선뜻 사지도 못했다. 디르함의 가치에 대해서도 아직 몸에 익지 않은 상태였기에 더욱 그랬다.



현지인이 얼마를 치르는지 눈여겨 보고 사는 방법도 있었지만 문제는 오렌지 쥬스를 마시려는 현지인이 단 한 명도 없었다는 데 있다.
풍광도 그것을 채우고 있는 사람들도 너무 이국적인 나머지 프레임 안에 모조리 담고 싶다는 욕망은 컸지만 사람들이 카메라를 보는 눈초리가 매섭고 여행객인 나에게 보내는 시선 또한 곱지 않아서 이래저래 조금은 더 곤란한 기분이 되고 말았다.
급작스럽게 바보가 된 기분이랄까.
정처없이 계속 거리를 걸었다. 터미널로 돌아갈까. 하지만 버스 시간은 아직도 한참 남았고 난 정말 목이 마르다.

'그래, 결심했어! 그들이 얼마나 큰 사기를 치든 난 오렌지쥬스를 그냥 마시겠어!!'

그렇게 나는 오렌지를 잔뜩 쌓아놓은 한 가게에 들어가서 쥬스를 외쳤다.
눈썹이 진하고 가무잡잡한 피부를 가진 쥬스 가게 아저씨들이 내게 처음으로 웃어준 모로코 사람들이었다.



나도 같이 웃었다.
그러자 마음 속의 빗장 하나가 스르르 풀어졌다.
시원하고 상큼한 쥬스를 원샷하고 거리를 돌아다니는데 신기한 일이 생겼다.
마치 마법 음료를 마시기라도 한 듯 사람들의 표정이 밝아 보였다.
신기한 일이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생길 수 있지?
그리고 나는 고심 끝에 조금 비겁해지기로 했다.
내 작은 똑딱이 카메라를 숨긴 채 그들의 모습을 담기로 한 것이다.
지금 남기지 않으면 언젠가 이 모든 것을 잊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조금 비겁하지만 그렇게 했다.



아버지는 인자한 미소를 아이들에게 건네고 아이들은 저희들끼리 신이 나서 깔깔거리며 동네를 활보했다.
젤라바를 입은 할아버지들은 느릿느릿 골목을 걸었다.
장을 봐서 가는 아주머니들의 발걸음은 전 세계 공통적으로 종종걸음이다.
그렇게 한참을 골목에 주저앉아 경계 도시의 사람들을 관찰한 뒤에 버스시간에 맞추어 터미널로 돌아왔다.



푸른 바다가 일렁이는 경계 도시를 떠나 짙은 초록빛이 이어지는 길로 접어들 때쯤 생각했다.
경계는 결국 사람이 만든 가르는 선이기에, 사람의 마음이 한없이 경계하면 무섭고 삼엄할 수밖에 없는 곳이자 무뚝뚝한 사람들로 가득한 곳이지만 만약 사람이 마음의 빗장을 조금만이라도 푼다면 그 틈 사이로 비집고 나오는 다정함을 언제든지 바라볼 수 있는 곳이라고.
언젠가 다시 그곳에 닿는다면 조금 더 빗장을 열 수 있겠지, 생각하며 나는 점점 경계 도시에서 멀어져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