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도록 가난하지만 여행은 떠나고 싶어_06

버스를 놓친 뒤에야 보이는 것들

by Snoopyholic

'산속의 산토리니'는 소문대로 아름다웠다.

세계적으로 부상하는 관광지가 되었지만 여전히 그 속에서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기에 자신의 캐릭터를 지키고 있었다.

굽이굽이 곡선과 그 사이로 빛이 드는 신비로운 모습이 아름다운 숙소에 묵었지만 바깥을 탐사하느라 막상 그 안에서 시간을 보낼 시간은 없었다.

사실 독일어 액센트가 강한 영어를 구사하는 숙소 주인의 피로함과 짙은 슬픔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져 그 근처로 다가가기 싫었는지도 모른다.

그녀는 손님이 와서 돈을 내고 그곳에 묵어주길 원했을 뿐....그 외에는 무기력했다.



상관없었다.

그곳이 거대 도시도 아니고 산골에 위치한 귀엽고 아담한 마을에 가까운 곳이었으므로.

벽과 골목과 계단이 푸른 빛으로 칠해져 정말 신비로운 기운이 감돌았다.

어차피 나는 어차피 길치였으므로 그저 발길 닿는 대로 걸음을 옮겼을 뿐인데 이곳은 나에게 너무나도 근사한 풍광들을 보여줬다.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니 사실 산속에 도시가 형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더 높이 위치한 이곳은 푸른색으로 외벽을 칠해서 독특한 캐릭터를 갖게 됐고 그 모습을 보기 위해서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는 이제는 세계적인 관광지가 되어가는 중이라는 것도.

그런 걸 대체 어떻게 알 수 있느냐고?

사실 그곳에서 MT 온 대학생 그룹을 만났고 그들과 어울리며 다양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의 저녁 산책은 그들의 파티에 초대되어 술 한 방울 마시지 않고(모로코는 무슬림 국가이다 보니 그런 공식적 파티에서는 술이 제공되지 않는다) 그들과 밤이 늦도록 춤을 추는 것으로 탈바꿈했다. 참 신기한 건 학생들 모두 내일 당장 세상이 끝날 것처럼 쩌렁쩌렁 음악을 크게 틀어놓고 거기에 맞추어 신나게 몸을 흔들어댔다는 데 있었다. 술 없이도 잘 노는 흥의 민족?! ㅋ 심지어 그저 평범한 강당의 형광등 아래에서 말이다.

그렇게까지 된 데 가장 큰 역할을 한 것이 한국 드라마였다. 애초에 그들이 내게 관심을 가진 것이 그룹 학생 중 한 명이 한국 드라마에 푹 빠졌기 때문.

내가 한국인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나에게 꽃 목걸이를 사서 걸어주었던 그녀의 수줍은 미소에 반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쉐프샤오웬이 어떤 곳이냐 묻자 그녀는 이곳이 많은 사람들이 휴양하러 오는 곳이라고 했다.

선선한 기후와 맑은 공기가 일품인 곳이라고.

광란의(?) 밤을 보낸 덕에 그야말로 꿀잠을 자고 일어났다. 충격적으로 달았던 모로칸민트티를 곁들인 아침(이에 대해서는 저의 책 <언제라도 티타임>에 자세히 나와 있으니 참고해주기시 바랍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을 먹고 전날 갑자기 중단된 산책을 이어가기로 했다.



걸어도 걸어도 아름다운 골목이 굽이굽이 펼쳐져 카메라 셔터 누르는 일을 멈출 수가 없었다.

광장에 닿았을 때 점심을 먹으며 이토록 아름다운 곳을 떠나야 한다니 조금 아쉽다는 생각을 했다.


'다음 숙소를 미리 예약해두지 말 걸 그랬나.......'


전날과 달리 갑자기 활기차진 숙소 주인과 잠시 수다를 떨고 버스 타는 곳으로 향했다.

넉넉하게 사십 분 전에 도착하면서도 괜히 일찍 왔나 싶었다.

아니지, 막차를 놓칠 수는 없지!

버스 표를 사러 창구에 갔더니 아저씨가 "No bus!"라고 했다. 나는 시간표를 들이밀며 이 차가 맞지 않느냐고 물었지만....

실랑이를 하던 우리를 보다 못한 다른 사람이 다가와서 나에게 침착하게 설명해줬다.



"오늘부터 써머타임이 시작되어서 한 시간 빨라졌어. 그러니까 네가 타려던 버스는 이미 떠나고 없는 거지."


막차를 놓쳤으니 발이 묶였다.

우선 예약해둔 숙소에 전화를 걸어 상황을 설명하고 하루만 미뤄도 괜찮겠느냐 물었는데 다행이 괜찮다고 했다.

무거운 배낭을 다시 짊어지고 발을 질질 끌고 정처없이 걸었다.

신선한 채소와 과일로 가득한 시장을 지나 정신을 차리고 둘러보니 올드 메디나 바깥이었다.



이제는 바위처럼 느껴지는 배낭을 잠시 내려두고 앞으로의 일을 생각하기로 했다.

하지만 생각하려 하면 할수록 아무 생각도 나지않았다.

다만 내 앞에는 관광객이 아닌 이곳에 사는 사람들이 공원에 나와 여유롭게 휴식을 취하는 모습이 펼쳐지고 있을 뿐.....



그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 나는 한참을 앉아 그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우리는 자꾸만 눈이 마주쳤고 우리는 자꾸만 서로에게 미소를 건넸다.

그런 끝에 그중에 한 명이 나에게 다가와 종이뭉치를 건넸다.

몇 번을 사양했지만 한사코 내 손에 쥐어주고는 멀리 도망가버렸다.



배낭 때문에 따라가지도 못하고 종이를 펴보니 아까부터 다들 손에 하나씩 들고 입에 넣어 굴려 까먹던 견과류였다.

종이 위에 찍힌 아랍 청년의 얼굴이 하도 멀끔해서 혼자 킬킬대고 웃었다.

짭짤하고 향신료 맛이 나는 그것을 하나씩 집어 먹는데 배에서 신호가 왔다.....꾸르륵......

하아, 식당을 찾아야겠군.....생각한 순간 저쪽에서 어슬렁거리던 일본인 여행자가 아까 터미널에서 날 봤다며 말을 걸어왔다.


"너도 버스 놓친 거야?"

"응, 써머타임이 언제 시작되는지 알 게 뭐야... 안 그래?"


우리는 한바탕 웃어재꼈다.


"난 배가 고파서 저녁 먹으러 가려고 하는데 넌 뭐 할 거야? 그 배낭은 뭐야? 숙소 아직 못 정한 거야?"


우리는 일단 그가 묵는다는 저렴한 숙소에 가서 체크인하고 돌덩이 배낭을 내려놓은 뒤에 저녁을 먹으러 나오기로 했다.

그가 봐둔 레스토랑이 있다며 찾아가는 동안 우리는 그간의 여행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눴다.

말 통하는 여행자를 만나 신이 나서 떠드는데 갑자기 그의 눈이 먼 곳을 향하며 입이 서서히 벌어지는 것이 아닌가.



눈앞에 펼쳐진 풍경을 믿을 수가 없었다.

하늘이.....

그야말로 충격적인 분홍색(Shocking Pink)으로 물들어 있던 것이다.

거리는 붉은 빛에 잠겨 있었다.

세계 곳곳을 누비며 각종 노을을 봐왔지만 이런 색감은 정말이지 난생 처음으로 접했다.

더 충격적인 건 이 거리의 사람들 중 그 누구도 멈추지 않았다는 데 있다.

이토록 눈물겹게 아름다운 풍경이 이들에겐 그저 일상이기에 누구도 걸음을 멈출 이유가 없다는 듯 묵묵히 각자 자신의 걸음을 걸었다.

오직 여행자 둘만이 그 자리에 붙박이가 되어 하늘이 파랑색으로 변할 때까지 움직이지 않았다.



맛있는 따진으로 배를 채우면서도 우리는 끊임없이 방금 전에 만난 풍광에 대해 이야기했다.

숙소로 돌아와 각자의 방으로 헤어지는 순간에도 우리가 나눈 인사는 '잘 자'가 아니었다.


"우리가 버스를 놓쳐서 천만 다행이야. 그렇지 않아?"


나는 그렇게 다시 한 번 쉐프샤오웬의 짙고 푸른 어둠 속에 몸을 맡기고 꿀잠을 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