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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noopyholic Jan 27.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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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체노동의 나날들_09

첫 차에 올라 새벽의 차가운 공기를 가르고 일터에 도착하면 우선 지문인식으로 내가 왔음을 확인해야 한다.

단말기로 로그인하면 될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가만히 보니 단말기 로그인은 다른 누군가에게 부탁해서 처리할 수 있으므로 오직 지문인식만이 본인이 근무시간 이전에 도착했음을 정확하게 측정할 수 있는 방법이겠다 싶다.

휴게시간을 재빠르게 정하고(선착순으로 선택하는 것이라서 원하는 시간에 쉬고 싶다면 빨리 와서 미리 선점하는 수밖에 없다) 작업복을 입고 안전화를 신은 뒤 단말기를 찾아야 한다.

이 단말기라는 것에도 성능의 차이가 있어서 어떤 기계는 반응 속도가 너무 느려서 혹은 자꾸 꺼지거나 인식을 잘 못하는 경우도 많아 일하다가 속터지는 현상이......

그걸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괜찮은 단말기를 찾아야 하는데 이것도 완충이 되었느냐 안 되었느냐에 따라서 사용 가능여부가 갈린다.

그저 일 시작하기 위해서 로그인 하려는 것뿐인데 참으로 많은 절차와 선택의 연속을 거쳐야 한다.

로그인은 내 고유 QR이고 비번은 QR 인식이 안 될 경우 그 아이디의 끝에 약속된 특수기호를 하나 붙이면 된다.

이 두 개의 QR은 초록색 명패 뒤에 있다.

정식 명패는 처음 교육 받을 때 임시1, 입사해서 일 시작하면서 임시2를 거친 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야 받을 수 있다.

회사에 입사하면 출입증이 생기는 것과 비슷한 기분인데 또 그것과 다르기도 하다.

회사의 출입증은 정식으로 카드처럼 생긴 것이 나오는 것이지만 이곳의 명패는 그냥 코팅지다.

물론 일반적인 사무직으로 근무하는 회사보다 이곳의 퇴사율이 훨씬 높고 명패가 나오기도 전에 빛의 속도로 그만두는 사람도 꽤 있다.

굳이 감상을 듬뿍 실어 그것이 책임감의 두께라고 주장한다면 왠지 이곳의 코팅지 명패는 쉽게 그만두고 가도 좋다는 느낌이라서 오히려 좋았다.

어쨌든 로그인을 마치면 초록 명패를 내 단말기를 뽑은 자리에 세워두고 일을 시작하면 된다.

시스템도 마침내 나라는 일꾼이 ‘가용’ 상태로 존재한다고 인식하게 된 셈.

그런 뒤 내가 얼마만큼의 물건을 입고하는지, 주문 몇 건을 처리하는지 등등의 모든 것을 데이터화하기 시작한다.

나는 그렇게 시스템 안에서 고유의 QR로써 모든 행동이 기록된다.

첫 차 타고 와서 물건을 진열하고 잡무를 처리하며 주문을 쳐내고 녹초가 되어 퇴근하는 건 나라는 한 개인이지만 그 기록은 나로부터 비공개처리된다.

그마저도 다 회사의 자산으로 남겨질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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